소설 몰이꾼(상) - 문상오 저 * 본 데이터의 무단 전재 및 복제를 금합니다. ----- 차 례 ----- 작가 소개 작가의 말 1. 뒤바뀐 별자리 2. 세상 밖으로 3. 그림자도시 4. 꽃뱀 5. 해인(海印) 6. 몰이꾼 작가 소개 작가 문상오는, 1958년 충북 단양에서 출생하여 1990년 충청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소무지"가, 1991년 농민신문사에서 주최한 새농민창간기념공모에 단편 "그 찬란한 빛, 어둠에서 오다"가 각 당선하여 문단에 나왔다. 1992년 "동백예술상"을 수상하였고, 작품집으로는 "소무지"가 있다. 현재 한국소설가협회와 문인협회, 아주작가연맹,농민문학회 등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가 주로 다루는 대상은 소시민과 농민, 노동자 등 이 사회로부터 방치되었거나, 삶의 터전이 뿌리뽑힌 자들이다. 어둡고 음습하며, 세상의 그 어떤 구원으로부터도 차단된 역외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절박한 상황을 가식없이 그려낸다. 그의 언어에는 해학과 독설이 있다. 웃음이 있고, 그 웃음을 다 마치기도 전에 가슴이 철렁한 비유가 있다. 흐르는 물이었다. 바람이 되기도 하고, 장대비로 쏟아지는 소나기가 되기도 한다. 때로는 그들 자신을 비춰주기도 하고 답답한 가슴을 씻김질하기도 하며, 또 어느 때는 그들과 같이 통곡하기도 한다. 어느 일간신문에 연재를 마치고 난 다음, 그가 한 말을 들어보자. "인간사 시비곡직이란 어차피 다수의 편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물고기가 물을 보는 눈과 같이 우리가 세상을 대하는 눈 또한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피투적(被投的)이고자 하나 기투적(旣投的)인, 그래서 자의란 말은 어디에도 없고 오직 정형화되고 예비되어진 숙명이란 틀 안에서 아둥거리다 한세상 마감하고 마는 것이 바로 우리 삶이라고, 어쩌면 딱 부러지게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말이다. 실없이 살다 속절없이 가버리는 게 인생이란 것일지라도 말이다. 사람에겐 저마다 지긋한 사랑이 있지 않겠더냐. 남녀간에 꿀도 붙고 새끼도 치고, 이웃하고는 엄배덤배 어울릴 줄도 아는 그런 사랑 말이다. 이게 사는 재미요, 내일을 유기할 수 없는 이유라 할 것이니, '썰'을 풀던 설을 쓰던 소설이란 것도 다 이에 다름 아닐 것이다." 작가의 말 시골에다 고향을 둔 사람이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한번쯤은 토끼몰이를 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대여섯 명씩, 많을 땐 스물도 좋고 적을 땐 두서넛도 좋고, 또래또래 패거리를 지어 이산 저산을 숨가쁘게 뛰어다니던 어릴적 그 추억. 더구나 이렇게 스산한, 가을로 접어드는 길목에 서 있을 양이면 멀리 조붓한 능선이 뒷동산으로 다가오고, 어느새 내 자신은 몰이꾼으로 변해 있는 것이니, 아스라이 스러져간 그 옛날이 그리워서만은 아니니라. 설풋 잠에서 깨어보면 소름이 돋도록 몸서리쳐지는, 잔인하고도 기구한 환각 같은 이놈의 현실. 주변의 모든 이들이 적이거나 제거되어야 할 방해자일 뿐, 결코 진정한 동지란 단 한 사람도 없다는, 절대 고독하고 숨막히는 이 아침에, 초라히 다가오는 그 산토끼는 과연 누구란 말인가. 중증으로 치닫는 피해망상증 환자의 선입견이라고 일소에 부칠는지 모르나, 그 피해망상증이란 또 어디에 기인한단 말인가? 어릴적의 몰이꾼과 산토끼가 뒤바뀌어 버린 어처구니없는 세상에서, 내가 전상국과 그 일가를 만났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전상국을 포함한 주변의 인물들. 그들은 결코 영웅이 아니었다. 지극히 평범하다 못해 좀 덜 떨어지기까지 한 이들은, 독립에 몸 바친 애국지사도 아니요, 사회운동가도, 민주투사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독재와 절대권력에 항거했던 민주열사도 아니었다. 창날처럼 번득이는 깃발이 휘날릴 때도 그들은 침묵했고, 온 나라가 민주화라는 열병으로 들끓을 때도 그들은 죽은 듯이 조용했었다. 그러했으니 어떤 이에겐 기회분자로 비판을 받기도 했고, 또 어떤 때는 낙오분자란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누가 돌을 던질 것인가. 그들은 그저 쫓길 뿐이었다. 붉은 깃발이 푸른 깃발로 바뀌건, 절대독재가 자유민주로 바뀌건, 어쩌구 저쩌구 하여 세상이 골백번 바뀐다 해도 열외자로 남을 수밖에 없는 그들은, 죄 지은 것 없이 굽신거려야 했고, 하루를 연명하기 위해 손이, 발이 되어야 했다. 처절한 복수심과 원한에 사무쳐 무작정 쫓기다 보니 어느 날 갑자기 몰이꾼으로 변해 버린 전상국, 친구를 돕다 영문도 모른 채 석궁에 맞아 죽어간 김석배 폐악한 사회구조가 어떤 것인지도 모르고 그저 이용만 당하다 귀향하게 되는 전한국, 그들은 거미줄처럼 정치하고 교묘하게 짜여진 사회구조를 탓할 만큼 유식하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그들에게 돌을 던지지 못하는 이유는 역사 밖으로 밀려나 있지만 역사를 있게 했고, 사회로부터 버림을 받았지만 그 사회를 지탱해 온, 허공을 날으는 새들에게 있어서의 그 허공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그들을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본 유일한 목격자이다. 이 세상 어디엔가 살아 있다면, 진실로 나는 그들에게 더 이상의 비극이 없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그리고 김석배의 영전에 삼가 명복을 빈다. 타락한 사회와 굴절된 역사의 증인으로. 1995년 9월 지은이 씀. 1. 뒤바뀐 별자리 1. 그가 가게문을 연 것은 열시가 조금 지나서였다. 가게라고 해봐야 세 평 남짓한 이발소였다. 더 일찍 열 수도 있겠으나, 그는 열 시를 고수하고 있었다. 손님이 없다는 주된 이유보다도, 그는 천성이 늦잠을 좋아해서 해 뜨기 전에 일어나 본 적이 없었다. 협회에서도 셔터문을 내리는 시간은 지도하고 있었지만, 문 여는 시간에 대해선 자율로 하고 있었다. 그는 우선 기인 하품을 물더니, 기대고 있던 의자 등받이를 뒤로 젖히며, 가슴뼈가 수수깡으로 튀어나오도록 기지갤 켰다. 그리고 나선,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손을 팔걸이에 올려놓은 다음, 턱을 고였다. 지그시 감고 있는 눈동자가 현요했다. 드물게 뵈는, 생각하는 이발사인 듯했다. 그렇다고 여늬 이발사와 틀린 점은 없고, 굳이 다른 점이 있다면 머리숱이 성글다는 것인데, 그것도 얼핏 보아서는 눈치 채지 못할 정도였다. 그는 대머리였다. 타고날 때는 수북하던 머리털이 3,4년 전부터 빠지기 시작하더니, 이젠 티가 나게 훤했다. 정수리 언저리만 옴폭하게 패여져 볼썽사납긴 했으나, 그래도 이마에서부터 모조리 벗겨져 올라간 민대가리가 아니길 그나마 다행이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찍고 붙이고 하여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는 한, 눈치채지 못했다. 김석배의 고개가 앞으로 크게 끄덕했다. 심각하던 표정이 어느새 풀어져 있었다. 이내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생각이 깊으면 졸음이 온다더니 그가 그랬던가. 그는 어느새 오수를 즐기고 있었다. 주인이 졸고 있는 이발소 안엔, 멀리 서울에서 내려온 서너 명의 남자와, 서너 명의 여자가 텔레비전 속에 빙 둘러앉아 열띤 토의를 시작하고 있었다. 여자들은 하이타이 속에 빠졌다 나왔는지 저마다 입에 거품을 물고 있었고, 남자들은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손을 내젓기도 하면서 무언가 강력히 항변하는 투였다. 아마도, 진보된 일반의 관념에도 불구하고, 또한 수많은 정책결정자들의 통일된 의지표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후진국 수준에 머물러 있는 여성지위에 관한 논쟁인 듯 보였다. 헤어스타일이 꼭 남자와 같은 여자가, 남녀불평등의 구체적 사례를 일일이 들어보이고 있었다. 여성들은 남성들의 용품점엘 들어가는 것을 주저치 않는데, 왜 남성들은 여성용 매점에 들어가기를 꺼려하느냐고 했다. 예를 들어 브레지어나 팬티 같은 속곳은 말할 것도 없고 스타킹이나 블라우스 같은 겉옷을, 더군다나 남도 아닌 자신의 아내에게 사다주는 것조차 창피스럽게 생각하느냐 했다. 2. 술집만 해도 그렇다 했다. 스트레스를 푸네, 손님 접대를 하네 하면서 남성 자신들은 고자 처가집 드나들 듯, 자주 가는 스텐드바나 요정 같은 데에는 여급을 두게 하면서, 여성들을 위한 남자접대부는 호스트바니, 게이니 하여 퇴폐영업으로 규정하느냐고 따졌다. 그러면서 접대부의 '부'자를 '婦'자로만 쓸 게 아니라 '夫'자로도 써야 한다고 했다. 석배가 빙그레 웃었다. 유감스럽게도, 그는 여자들의 이와 같은 당당하고도 옹골찬 주의주장에 감복해서가 아니라 꿈을 꾸고 있었으니. 무슨 말인가 중얼거리더니, 이번엔 아예 소리내어 키득키득 웃기까지 했다. 헤 벌린 입술에 침까지 질질 흘리고 있는 그는, 막연히 약속된 결혼식 날짜를 미리 앞당겨 시행해보는 중이었다. 꿈속이긴 했지만 예행연습인 셈이었다. "신랑 김석배 군에게 묻겠노라. 그대는 신부 주연실 양을 맞아 함께 동고동락하며 평생을 같이 하기로 맹세하느뇨." "예이...!" "역시 신부 주연실에게 묻노라. 그대 또한 신랑 김석배 군을 맞아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될 때까지 진심으로 사랑하고 공경하며 어떠한 일이 있어도 금슬지계를 지켜가겠느뇨." "예에..." "신랑 김석배 군과 신부 주연실 양은 주례와 여러 하객이 보는 앞에서 맹세하기를, 어떠한 일이 있어도 서로 믿고 사랑하며 일생을 함께하기로 하였노라. 연고로 본 주례는 이성지합의 예에 따라 두 사람이 혼인하였음을 선언하노라." 주례의 성혼선언문이 낭독되자마자 그는 만세삼창을 외치더니 곁에 서 있는 신부 주연실 양을 번쩍 안아올리는 게 아닌가. 그러더니 쳐다보는 하객들의 눈길은 안중에도 두지 않은 채, 꽃가루를 뿌리듯, 안아든 신부를 하늘 높이 헹가래쳤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로, 어안이 벙벙해 하던 하객들이 박장대소. 손바닥이 깨져라 손뼉을 치는 사람. 허리가 끊어져라 쿨룩거리는 노인도 있고. 배를 쥐고 흔드는 임산부에, 얼마나 웃어제꼈던지 지 애미가 눈물까지 흘리자 덩달아 빽빽 악을 쓰며 우는 어린놈도 있고. 그야말로 예식장은 난장판을 방불케 했으니. 식장에서 울려나오는 웃음소리가 어찌나 크고 요란했던지 석배가 움찔했다. 하늘로 하늘로, 날아오르던 웃음소리가 두겹 세겹 뭉쳐지더니 하얀 꽃가루로 와르르 쏟아져내리고 있었다. 함박눈이었다. 분분히 날아내리는 함박눈을 보면서 그가 눈을 번쩍 떴다. 3. 함박눈이라... 한여름에 함박눈이... 석배가 뭉툭한 콧등을 손등으로 부비며, 축농증에 거린 놈마냥 킁킁거렸다. 그리곤 입맛을 쩝 다시곤 히죽 웃어보이는 게 아닌가. 눈이야 개아지도 좋아하는 거니께 길몽일터. 하물며 눈도 그냥 눈이 아니라 함박눈이었응께. 그가 다시 입맛을 쩝 다셨고, 히죽 웃었다. 빌어묵을... 내 꿈도 내 맘대로 못 하다니. 걸 그냥 완전무결허게 내 껄로 맹글었어야 하는 것인디... 기지개를 늘어지게 켠 그가 휘파람을 불며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주례에게 인사하듯 허리를 굽혔다. 거울 속에다 머리를 디밀고는 이렇게도 돌려봤다 저렇게도 젖혀봤다 했다. 아직 속박이할 때는 아니었다. 식모(植毛)는 그냥저냥 붙어있었고, 교묘히 덮어넘긴 머리카락은 건재했다. 그는 늘 그랬다. 거울 앞에서면 먼저 속박이 한 머리카락부터 뒤져봤고, 그 두발의 안녕하심을 둘러본 연후라야 상감마마 용안을 우러러뵈듯 자신의 얼굴을 흐믓하게 바라보곤 했던 것이다. 모든 것이 이상없음을 확인한 석배의 눈길이, 창 밖의 대로를 건녀가려다 말고 텔레비전 화면 앞에서 멈췄다. 브라운관 속의 면면을 일별해 나가던 그가, 모래밭에 갈무우 뽑아내듯 코드를 나꿔챘다. 전기세가 아까워서가 아니라, 또 수도요금에 또박또박 딸려나오는 시청료가 억울해서가 아니라, 화면 가득히 크로우즈업된 대학교수인가 하는 그 양반. 서울에 계신 지체 높은 분이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또 뭔가를 한답시고 티를 내느라고 그런지는 몰라도, 그래도 그렇지 그래. 이건 태중에서 받아나온 후, 이적지 가위질 한번 대보지 않은 봉두난발이었으니. 저래가지고서야 어디 나 같은 놈의 천출내기 깍사야 밥이라도 한술 빌어먹을 수 있겠나 싶었다. 떨어지는 비듬이, 보지 않아도 훤할 일이니 그나마 먹은 밥알까지 올라올 지경이었다. 속내 모르는 축들이야 이용업만큼 탄탄한 직업이 또 있겠느냐 할 것이다. 열흘을 굶어도 하루 먹을 것은 벌어들인다는 머리숱이니 때가 되면 어련히 알아서 찾아올 손님이겠고, 초상집 말고야 빗질 한번 안 하고 찾아갈 곳이란 없으니 무에 걱정이냐고 말씀하실 것이다. 지당하신 말씀 같으나 몰라도 영 모르시는 말씀이시다. 찾아오는 손님마다 빼꼼히 열어보고는 대뜸 하신다는 말씀이 무언지 아십니까. "면도사 없어?" 하더라구요. "제가 긴데요." 하니까. "며언도사 말이야. 면도오사...!" 참으로 난감하더군요. 4. 개업하고 뭘 모를 때야 그 말이 무슨 말인가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았더니 여자면도사를 그렇게 부르더라 이겁니다. 달리 말하자면, 면도는 명목이고 안마시술을 주업으로 하는 여급을 이름이지요. 몇 년 전만 해도 넥타이나 걸치고 구두라도 비까번쩍한, 좀 살 만큼사는 사람들이 주로 찾더니만 요샌 턱주가리에 수염도 안 난 놈들까지 삐끔히 들여다보곤, 에이...ㅇ네. 이지랄하고는 문을 쾅 닫고는 간다니까요 글쎄... 내 원 세상에...이래가지구서야 어디, 장갈가서 여편네라도 대령해서 면도질을 시키던지... 뭐요? 그래선 뭘 그래섭니까. 예전부터 내려오는 말 치고 어디 틀린 말 있습디까. 돈이 돈을 번다고, 아주 똑 떨어지더라구요. 내 겉은 놈이야 물려받은 재산이 있나,그렇다고 뒤를 봐줄 일가붙이가 있나, 엇부리기 송아지도 둔덕이 있어야 부빈다고. 겨우겨우 장만한 보증금 천이백 말고는 다 털어봐야 부랄 두쪽이 가진디... 대어중어식하고 중어소어식하는 세상에, 남에게 안 잡아먹히고 이냥저냥 끼니라도 이어가는 게 용하달밖에요. 석배가 무연히 길 건너편을 바라다 본다. 사실 그는 세상을 살아오면서 가장 싫어하는 게 있었으니, 무얼 생각한다는 거였다. 쉽게쉽게 살자고 해도 난마같이 꼬여지고 마는 게 세상일이거든, 무얼 따지고 계산한다는 게 도대체 생리에 맞지 않을 뿐더러, 요령을 배워 잇속을 채워야 한다는 걸 애초 알지도 못했다. 속는다고 해봐야 잃을 것은, 갖고 있는 것만큼일 것이요 다 잃는다 해도 설마 목숨까지야 빼뜨려 가겠느냐는 생각이었다. 논바닥에 엎드린 남생이처럼 두 눈을 껌뻑거리며 밖을 내다보고 있던 석배가 여전히 웃음을 매단 채 무언가를 회상하고 있는 듯했다. 건너편 건물의 2층. 유리창에선 까치 두 마리가 날개를 치고 있었다. 그 날개짓은 석배 자신의 처지와 너무나 닮아서, 아무리 자세히 들여다봐도 비상을 하고 있는 것인지 하강을 하고 있는 것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좌현을 하늘로 두고 우현을 지면으로 하고 있는 놈은, 언제나 그렇게 고자리에 있을 뿐, 한 치 밖을 벗어나지 못하고 늘 그렇게 붙박혀 있었다. 선회하고 있던 까치가, 다방이라는 글자 속으로 겹쳐질 때쯤, 석배는 또 한번, 꿈속에서처럼 흐뭇이 웃었다. 그놈과의 재회가 악연이었다면, 그녀와의 조우는 뭐랄까...그래, 분명 가연일 것이다. 이매망량을 만나야 야광주를 얻는다고, 꼭 그짝이었다. 그날은 월요일이었고, 이발사에겐 일요일이기도 했다. 바람꽃이 연 사흘째 기승을 부리고 있었는데, 그래서 그랬던지 시민들은 뿌연 모래바람 을 피하여 문을 걸어잠그고 있었다. 딱 한군데 붐비는 곳이 있었다면 아랫집 소아과의원으로, 그곳은 바람꽃이 아니래도 늘 그렇게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5. 소설가 양반 하릴없이 국어사전 뒤적이듯, 면도기를 쓰다듬고 있자니 문짝이 삐그덕거렸다. 누가 찾아온다는 건 반가운 일이었다. 손님이라면 더 말할 나위 없겠으나 손님 아닌 객꾼이래도 마다할 리 있겠나. '면도오사 있습니까' 하고 묻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어서오십쇼. 이발하시게요? 하는 말을 입에다 담고는 눈가에 웃음자락까지 매달고 있는데, 왠걸 출입문만 조금 열려있을 뿐, 사람이라곤 그림자도 비치지 않았다. 바람인가? 문까지 열렸는데...귀신이면 모를까. 그럼 귀신인가? 아무려면... 아무리 신식귀신이래도 머리손질을 하겠다고야...그가 지금까지 보아온 귀신은, 그 역시 가상된 모형일 테지만, 벌겋거나 시퍼런 눈동자에, 모발은 산발이어야 했고, 그것도 귀면을 반쯤 가리고 있어야 했다. 거기에 묘사가 좀더 사실적이자면 소복에 맨발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이쯤이 그가 알고 있는 귀신의 모양새였다. 혹시 아나, 귀신의 세계에도 무슨 개혁이라는 게 있어서, 의식개혁도 하고 제도개혁도 하고, 또 그렇게 무슨무슨 개혁을 충실히 이행한 귀신에게는 자가승용차 세금이라도 면제해 주는지. 김석배가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실없던지 피식 웃었다. 요따위 이발소에나 들어올 귀신 주제에 무슨 승용차가 가당키나 하겠는가 생각했던 것이다. 그가 빼꼼히 열려진 출입문 틈으로 얼굴을 내밀어보니 밖에는 진짜 손님이 주인처럼 서 있는 게 아닌가. 김석배가 불어오는 바람꽃에 눈을 질끈 감느라고 멈칫했다. 밖에 서 있는 주인 같은 손님과, 안에서 멈칫거리는 손님 같은 주인의 눈이 딱 마주치는 순간, 누구의 입에서랄 것도 없이, "야아 임마! 별 눔의 샛기, 요기서 만나다니!" 하면서 동시에 내달았고, 뒤엉켰다. 거간의 회포로 봐선 소주가 몇 짝이래도 풀릴지 말지한 김석배와 전상국의 회중(懷中)이었으나, 일요일 같은 월요일이라 해도 근무시간은 근무시간이었고, 또 불알이 빨갈 때부터 사귀어 온 친구라곤 하지만 상국이 놈과 같이 있으면 웬지 모르게 주눅이 들고마는 김석배였다. 차나 한잔 마시자고 찾아갔던 곳이 바로 저기 건너다 보이는 까치다방이었는데, 그때 그들 자리에 동석한 사람이 그녀, 주연실, 아니 그냥 주양이라고만 했던 아가씨였다. 석배로선, 상국은 만날 때는 가벼운 마음이었으나 떠나보내고 나서는 짐이 되었고, 주양이라고 하는 다방레지는 그와 반대로 만나서는 울근불근했었으나 두고두고 아쉬운 사람으로 남아 있었다. 6. 사실 그날, 그들 둘이 앉기가 무섭게 쪼르르 달려와선, 요구르트 한 병을 홀짝 비우고 간 사이, 그때까지만 해도 석배는 그녀에게 전혀 무관심인 상태였다. 그것은 석배 자신이 부주의했던 탓에서가 아니라, 그녀에게 관심을 둘 만큼 상국의 얘기가 밝아있질 못했었다. "...했으니, 별 수 있겠냐. 한마디로 대책 없는 거지. 돈은 돈대로 깨지고..." "원래가 임마, 허리디스크는 고질이라고 않더냐. 돈이라두 건졌음 구멍가게라도 열 게 아니냐고. 너란 인간 한다는 일이 꼭 미주알 빠진 담에야 똥 싸 뭉개드라." "개애눔의 샛ㄱ. 내가 임마 디스크가 뭔지 알기나 했것냐. 뚝 하니까 고장인 줄 알았고 병원에가서 주사 한방이면 해결되는 줄 알았지." "그러니까 미련하다는 거 아니냐. 주사라고 암 데나 지르면 약 되는 줄 아냐. 건 임마 땜질하는 데나 쓰는 거여, 빠이쁘. 하기사... 지집이라면 인절미 주무르듯 하더니 꼴 조오타. 그래서 뭐랬냐. 다 뿌린 대로 거두고 지은 대로 가는 거라고 안 하든." "근데 이 자식이 요오... 너 지금 불 난 집에 와서 선풍기 틀어놓기냐. 산뽀도 하던 놈들이 시로도라 그랬다니까." "누누히 말하지만 넌 니 애비가 곰이었던가 니가 죽어서 곰이 되든가 봐라, 둘 중에 하나지. 그럼 임마 줄을 놨어야지. 허리가 부러지두룩 잡고 있는 놈이 너 말고 누가 또 있것냐." 석배가 혀를 끌끌 찼고, 상국이 시무룩했다. "나두 첨엔 삐긋 하길래 야리가달 놓아버릴까 했었다. 하지만 내가 그걸 놓으면 밑에서 받치고 있던 놈들이 오징어포가 될텐데. 내 허리 펴겠다고 몰살시키겠냐. 차마 못 하겠더라." 상국이 한숨을 푹 쉬었고, 이번엔 석배가 시무룩했다. "쯧쯔...딱하게 됐구나. 돈 잃고 마누라 생과부 맨들고. 자고로 스무살 과부는 살아도 서른과부는 못 산다 했니라. 뭔 맛을 좀 안다는 말씸이겠고. 우쨌거나 너두 느 마누라 간수 잘 해야겄다." 하면서 석배가, 상국의 한숨을 농으로 삭이려 하자, 상국이 맥없이 웃었다. "염병할...구더기에 절여서 도리깨로 내칠 놈. 느그 형수님이 너 맨치로 바람부는 대로 날리는 민들레씨 겉은 줄 아냐. 유식한 말로 거 뭣이냐, 오상무슨 절절하드라만, 하여튼 느 형수님이 그렇게 절절한 분이시다, 이눔아." 하고는 어디 숙방띠기라도 좋으니 일자리 한 군데 봐달라고 했었다. 7. 둘이 일어섰고, 석배가 계산대 앞으로 갔다. 상국의 꾀죄죄한 행색으로 보아 찻값은 고사하고 돈 빌려달란 소리 안 하는 것만도 다행이라는 생각이었다. 석배가 요금을 지불하려 하자 넘겨다보고 있던 상국이 불쑥 앞으로 다가서더니, 마담인 듯한 여자에게 따지듯 물었다. "보시오. 마담. 커피 한 잔 값이 울맨지는 모르지만, 거 너무 지나친 거 아뇨!" 상국이, 아무리 따져도 계산이 안 맞는다는 듯 이의를 달자, 안녕히 가시라고 또 오시라고, 다소곳이 인사를 올리려던 마담이, 전표를 탁탁 두드려보이며, "요구르트 한 병 있잖이유. 우리 미스 주께서 마신 거." 하면서 새촘하니 아주 못마땅한 듯했다. 상국의 눈썹이 꿈틀하더니 가늘게 떨렸다. "모르겠소 낸. 양인지 쥐인지가 뭔지는 모르지만, 요구르트는 시킨 적 없고. 내 이적지 하고많은 다방엘 다녀봤지만 요론 덴 또...사람 우숩게 알고 또박거리는 거 아녀 시방..." 계산대가 어수선해지자 멀찍이 앉아서 다른 손님들과 노닥거리던, 예의 그 아가씨가 뽀르르 쫓아 나왔다. 수입개가죽 씹는 얼굴로 서 있던 상국이 근엄하게 짖어댔다. "어이, 아가씨두 한번 따져봐라. 엉? 예의는 격식을 차려야 하고 장사는 상식에 맞아야지. 안그래 어엉?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아까붜서 그런다." 석배가 요구르트 한 병을 갖고 뭘 그러냐며 겨우겨우 뜯어말렸고, 그제사 고개를 숙이고 있던 주양이라는, 그러니까 석배와 상국이 자리에 앉자마자 요구르트 한 병만 홀짝 비우고는 다른 테이블로 가버렸던 바로 그 아가씨가 고개를 들어 석배를 쳐다보았다. 전래동화에 나오는 '나무꾼과 사슴'의 그 사슴 같은 눈빛이었는데, 그녀와 눈길이 마주친 석배가 몸을 잘게 떨었다. 물론 그 떨림은 너무도 미세하고 가늘어서 주위의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으나, 석배로선 전기에 감전된 듯 우두망찰했다. 발그레한 얼굴에 생긋이 웃어보이는 볼우물. 단발이면서도 천박하지 않은 커트머리.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은 키에, 야하지도 않고 박하지도 않게 차려입은 입성하며, 석배로선 나이 서른을 넘기면서 이제까지 만나본 여자들 중에 그렇게 흔충거려보긴 또 처음이었다. 잘 익은 앵두처럼 탐스럽던 입술은, 앞뒤 가릴 것도 없이, 당장이라도 꼭 껴안고는 잘근잘근 깨물어 톡 터뜨렸으면 싶을 정도로 매혹적이었고, 깊고 그윽한 눈빛은 볼수록 사람의 마음을 끌게 했다. 8. 그러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귀티가 배어있었다. 다방의 여늬 종업원과는 달리, 함부로 범접하기엔 망설여지는, 어떤 보이지 않는 위엄이랄까 경외스러움 같은 것이, 법당 안의 향훈처럼 은은히 풍겨져나왔다. 아마 그것은 아주 어릴 적부터 몸에 배어 있는 듯하여, 돈 많은 귀부인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날림으로 급조된 그런 위엄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그날 이후 지금까지, 석배로선 내적 갈등의 연속, 혼돈의 와중에 있었다. 앞서 말한 바 있거니와 그는, 무얼 생각한다는 걸 아주 싫어했었다. 그러잖아도 골치아픈 세상에 새삼스럽게 무얼 생각한다는 게 생리에 맞지도 않았을 뿐더러, 또 그러한 것에는 길들여지지도 않았다. 단순하고 명백한 것만을 선호했다. 그러한 그가 까치다방의 주양을 만나고부터는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변해가고 있었으니, 그렇게도 마뜩찮게 여기던 생각이란 놈에 길들여지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생각이란 녀석도 별게 아니었다. 아슴프레히 멀어져가는 과거의 기억들을 되돌려 보고. 그 과거 속의 사건들을 재구성하여 각박하고 빈틈없는 현실 속에다 들여놓음으로써 어떤 활력과 환기를 불어넣어주는, 이를테면 마라토너들이 레이스를 펼치다 받아 마시는 청량음료 같은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과거를 반추하여 현실을 조감해보고, 불확실하긴 하지만, 그러나 다가오기로 결정되어진 미래를 유추해내는 일. 그러한 것들이 생각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철학용어사전에 나오는 어렵고도 난해한 사(思)자 돌림의 형제말들 - 사유니, 사색이니, 사고니, 사변이니 하는 그 모든 단어들이 결국 '생각'이라는 말의 변용일 것이고 보면 철학이라는 것도 별 게 아니구나 하는 주제 넘은 생각까지도 해보는 거였다. 이러한 생각들, 다시 말해서 생각의, 생각에 대한 정의를 내릴 수 있게 된 데는 온전히 그녀, 까치다방의 주연실 양의 공로였으니, 한시도 그의 뇌리에서 떠난 적이 없었다. 처음엔 그저 뿌옇게 번져오던 그녀의 모습이, 오늘처럼 손님이 없을 때, 또는 짬짬이 시간이 날 때마다 길 건너편의 다방건물을 올려다보는 시간이 많아졌고, 그럴수록 그녀의 생김생김, 요모조모가 아주 구체적이고 선명하게 다가왔다. 하루이틀 생각만으로 버텨오던 석배가 대놓고 다방출입을 시작하게 된 건, 이로 노인을 알고난 다음부터였다. 성이 이씨인 것만은 확실한 것 같은데 이름은 모를 일이었다. 남들이 그저 '이로. 이로'하니까 석배 저도 이로라고 부를 따름이었고, 노인이라고는 했지만 그 역시 알 바 아니었다. 9. 그는 난쟁이었는데, 검은털 하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아주 희디흰 백발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허허...저거 호호백발 아녀 난쟁이 호호"했고, 그런 소리를 들을랴치면 그는, "예이끼 눔덜... 남의 승까지 갈 건 뭣이고. 이로가 아니면 이백이라든가 차라리 이호라 할 것이지." 해서 그에겐 여러가지 이름이 붙어다녔다. 나이는 몇 살인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눈썰미가 밝은 사람이라해도 삭발산승과 수녀, 곱사등이와 난쟁의 나이는 헤아리기 힘들다고 하거늘, 그는 난쟁이라는 신체적 조건 말고도 특이한 점이 몇 군데 더 있었다. 백발로만 따진다면 망팔에 접어든 고로로 보이나, 주름살 한 가닥 없는 동안(童顔)이었고 치열 또한 빠진 곳이 없어 10대 소년을 방불케했다. 그러했으니 그의 치수는 보는 이마다 제각기 다 달랐고, 또 같은 사람이라 해도, 보는 시각이나 차림새의 행색에 따라 들쭉날쭉 했다. 염전에 있었던 일로, 상국을 만난 지도 달포쯤은 지난 때였을 것이다. 그날도 오늘처럼 무슨 꿈인가를 꾸고 난 후였는데, 불쑥 나타나선 면도를 지시했고, 다 밀고 나자 어이없게도 하는 말이, 현금은 가진 게 없고 정히 받고 싶으면 내 뒤를 따르라 했다. 주먹으로 한 대 갈기고 6천 원이요, 하려다가 그 인품이 너무 고매하기도 하려니와 한주먹거리도 못되는 난쟁이인지라 꾹 참고 따라갈밖에. 꿈과 현실이 뒤바뀌어 보일 때가 가끔은 있었으나, 그날같이 뒤죽박죽인 날도 없었다. 나이 어린 시동(侍童)이 객승을 따르듯, 노인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가자니, 한편으론 우습기도하고 또 그런 자신이 한심하기도 했다. 난쟁이 노인에게 면도 한번 해준 걸 갖고 이렇게까지 야박하게 굴어야 하는가 생각하니 부끄럽기도 했으나, 어쨌건 따라나온 길이었고, 앞장 서는 난쟁이었다. "자네 인생이 뭔지를 아나?" 앞서가던 난쟁이가 밑도 끝도 없이 묻는 말은 참으로 거창해 보이는 인생이란 것이었으니, "거야 일장춘몽아니유. 가만 있거라...하지도 지났고 일장여름몽이겠구만." 이놈이 이거 돈이 궁하니까 밸 수를 다 쓰는가 싶어 냅다 농짓거리로 나가는데, "허어...근자에 드물게 뵈는 학식이로고. 그런겨...여름몽." "뭐요...?" "헛허허...여름몽. 그려...봄에 꾸는 꿈은 춘기가 있어 색으로 나타나니 이를 일러 환몽이라 하나, 여름에 꾸는 꿈은 그 기가 하늘로 뻗치니 공으로 돌아가거던. 이를 일러 백몽이라 하니, 천지근동 천인합일의 이치라 꿈이라고는 하나 어찌 꿈으로만 돌릴 것인가." 10. 난쟁이 이로 노인이 제집처럼 찾아든 곳이 건너편 까치다방이었다. 마담을 비롯한 전 종업원들이 친부라도 되는 양 깍듯이 맞았다. 아마 오래 전부터 있어 온 듯, 노인의 자리가 한쪽에 마련되어 있었다. 석배로선 하루에도 몇 번씩 염을 두었다가도 왠지 쑥스럽고 민망하여 망설이던 곳이었다. 그런 후로 손님이 없다 싶으면 난쟁이 이로를 찾았고, 또 거길 가면 발그레한 볼우물에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매를 가진 그녀가 있었다. 그녀도 석배의 그러한 심사를 알았던지 싫은 기색이 아니었다. 이젠 길 건너편을 바라보는 것이, 그러다 정히 보고 싶으면 난쟁이 노인 이백을 만난다는 핑계로 다방 까치를 찾아가는 것이, 일상사처럼 아주 자연스럽고도 기꺼운 일로 되어버린 석배였다. 속된 말이지만, 꿀도 많이 먹으면 취하고 우유도 지나치게 마시면 설사를 한다는데, 그녀는 아무리 오래 생각해도 병이 되질 않았고 아무리 자주 만나도 싫증이 나질 않았다. 그늘에 누운 푿소가 되새김질하듯, 좀 전의 꿈자리를 지그시 감은 눈으로 다시 펴보던 석배가 다시 입가에 엷은, 그러나 더없이 흡족한 웃음을 달았다. 그는 아주 여유있어 보였고, 자신감에 차 있는 듯했다. 테이블과 시트 여기저기 널려진 만화책을 한쪽으로 몰아놓더니, 그것들을 다시 권별로 묶어 구석장에다 가지런히 세웠다. 저녁나절에는, 지금처럼 한가하다면, 만화가게라도 들려 몇 권의 만화책을 좀 꼬불쳐와야겠다는 생각도 해봤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를 걸어올 사람은 없었다. 어느 날 갑자기 친해진 난쟁이 이로가 있었으나 지금쯤 사업에 한창일 것이다. 더구나 오늘이 월요임인을 감안한다면, 필시 썰렁한 다방,구석보다는 출장중일 것이고. 시전의 좌판대 옆에다 돗자리를 깔고 앉았거나, 어디 흥청거리는 한길가를 빌려 갈피갈피 너풀거리는 고서 몇 권과 해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송정토정비결과 수정만세력을 부채살로 뒤적이고 있을 것이니. 머뭇거리고 있자니 전화벨은 계속 울려왔고, 수그러들 기세가 아닌 걸로 보아 받기는 받아야 할 판국이었다. "여기인, 깔끔이발..." "관둬라 임마, 나여 나." "누구시드라...여긴 이발손데요." "새앳ㄱ...! 나라니까 임마! 상국이." 겨울바람소리였다. 전신줄과 양푼깨지는 소리가 뒤섞인, 그런 혼탁하고도 카랑카랑한 쇳소리가 노간주 가시처럼 따끔거리며 석배의 귓구멍을 후비고 들었다. 11. 수화기를 빤히 들여다보며 석배가 흠칫 놀란다. 그사이 여지껏 전화 한줄 없더니 한여름 땡볕에 삭풍으로 다가서다니. 무슨 또 도깨비 놀음을 하자는 건 아닌가 하여, 반가운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었으나, 너만 믿고 가겠다는 일자리 부탁은 아닌가고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난 또...워쩐 일이냐. 그사이 코빼기도 안 보이더니. 큰거 한건 했는가 보구나 너." "나라니까 임마! 전상국이." "알아 임마. 나한테 반말 할 놈이 너 말고 또 있겠냐. 허리는 좀 폈냐." "말도 마라. 타작마당 뒷불에 싸래길 줘 먹어두 이거보단 날 거다. 그래, 니넌?" "저번에 그일? 알아본다구 했어, 용한 사람이. 쪼매만 기다림 소식 있겠지. 뭐여...! 요 근처라구? " "일은 무슨일. 애 못 낳는 며느리 절간에나 보내랬다고 시내 한바꾸 돌아보는 길이다." 말소리가 가닥없이 꼬여지는 걸로 보아 아주 가까운 곳은 아닌 듯했고, 조금은 마음이 놓여지는 석배였다. 그러나 실낱 같은 전화선 하고 4차선의 한길 하고는 또다른 거리였으니, "후딱 갈팅께 너 거기 있을 거제?" 하는 노간주 울타리로 가게문을 애워싸는 상국이었다. 꼼짝없이 갇힌 몸으로 구닥다리 시계바늘을 돌리고 있자니, 상국이 거짓말같이 뛰어들었다. 대팻밥으로 절여진 꾀죄죄한 입성이었다. 달포 전에 만났을 때의 행색 그대로였다. 달라진 게 있다면, 검으튀튀하던 얼굴빛이 수돗물을 먹는 도시인을 닮아 좀 뽀얘졌다는 것인데, 그것은 일거리가 없어 방구석에만 들어박혀 있었으니 그러할 것이어서, 궁하게 보이면 궁하게 보였지 자랑할 티는 아니었다. "꼴이 말이 아닌 걸 보니 패가 꼬이긴 어지간히 꼬이는 모양이구나." 석배가 혀를 끌끌 차면서 거간의 안부를 물었다. 상국이 그냥 고개만 끄덕였고, 역시 절이김치에 버무려진 어리굴젓 모양으로 폭삭 삭아져 있었다. 지 어미 천금지금 다 깔고 앉아서도 팔팔하던 놈이, 더위 때문만은 아닌 듯 보였다. "어디가 또 고장이냐. 썰어말린 말가죽맨치로 코만 풀고 서 있게. 전화통에선 쌩쌩하던 애가...너두 요새 유행하는 거, 노래기 맨치로 동전을 잡숴야 말이 나오냐." 그가 앉으라는 시늉으로 선풍기 모가지를 비틀자 그제서야 설피 웃으며 바짓가랑이의 먼지를 툭툭 털어냈다. 그 웃음은, 아주 귀찮고 성가실 때 이것저것 뭉뚱그려 지어보이는, 해석하기가 좀 곤란한 웃음으로, 명명하고 흔쾌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12. "낸지랄..., 모르겠다. 좀 나아지는 게 있어야 살맛이라도 나지. 이건, 안에서 꼬인 일이 나가보면 뒤틀려 있고, 밖에서 긁힌 생채기가 들어와보면 곪아터져 있으니...외유내한이라더니 신세가 말이 아니다." "외유내한...?" "밖에서 놀고 안에서 쉰다 이 말이지." "신선이구나. 다 타고난 복이다. 매미두 울어야 이슬이 생긴다는데, 문지방 너머에 돗자리. 것두 모자라 대문 밖에다 차일까지..." "새앳긔 하군. 건 그렇고, 너 어디 아가씨 하나 ㅇ냐. 허름해도 좋으니...그래, 관둬라. 니눔 팔자나 그놈 팔자나 총각팔자 면하긴 겟구멍에조갭지 날 때 기다릴밖에." "뭔 새따먹은 소리냐. 아가씨는 뭐고, 그놈 팔자라니?" 상국이 씁쓰레 웃었고, 그 웃음은 좀 전의 웃음과 별반 다를 게 없는, 낙담과 절망이 뒤섞인 한숨 같은 것이었다. 석배가 답답하다는 듯 앉은뱅이 선풍기의 숨통을 가지껏 조이자, 속수무책으로 당한 놈은 죽어라 발버둥쳤다. "차 한잔 할테냐?" "차아? 그러잖아도 푹푹 찌는 판에 펄펄 끓는 물 마시고 돈 주게 생겼냐. 그럴 돈이 있으면 막걸리를 들이겠다." "촌눔. 차라구 어디 끓기만 한다냐. 냉커피에 냉차에, 뭣이냐, 쥬스라는 것도 있드라. 아가씨도 보고." "생각없다." "하긴, 젓가락 장단에 니나노라도 걸쳐야 아가씨도 감상하는 놈이니까. 그래 가자. 시간도 됐고. 어디 가서 칼국이나 말아 먹든지..." 석배가 앉았던 자리를 주섬주섬 챙겼고, 씨광한 표정으로 석배를 꼬나보고 있던 상국이 무릎을 탁 치면서 건너편의 까치다방으로 눈길을 돌리는 게 아닌가. "맞다. 니 방금 분명 아가씨라 했겠다. 잘 돼 가냐. 미스 쥔지 양인지 하는 아가씨 하군." "경을 칠 눔. 지 호주머니에 든 떡도 못 먹는 놈이 남의 시루에 있는 생떡을 탐하냐. 궁금하면 직접 가서 물어보던지." "허긴...그때가 운제냐 벌써. 문지가루 푸석푸석 날아오를 때였으니, 전근 갔겠구나." 듣고보니 그랬다. 석배가 알고 있기론 다방종업원의 계약기간은 대개가 한 달이었다. 손님들이 새로운 종업원을 바라는 것인지, 아니면 종업원들이 새로운 근무처를 원하는 것인지는 알 바 아니로되, 어쨌건 한달을 주기로 다방종업원들의 얼굴은 바뀌었고, 손님들도 으레 그러려니 알고 있었다. 13. 그런데, 그녀는, 석배가 알기로도 벌써 두 달이 넘도록 근무처를 까치다방으로 박아놓고 있었으니,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하지만, 제 논에 물대기 식으로, 그녀가 거기 있는 사실이 그래야 할 것처럼 조금도 이상하지가 않았다. 석배의 딴 생각을 짐작할 리 없는 상국으로선 더 이상의 말이 없었고, 다른 곳으로 업소를 옮겼으려니 하는 눈치였다. 석배가 상국을 데리고 나온 곳은, 그 까치다방을 돌아 뒤편 골목을 끼고 앉아 있는 분식점이었다. 분식점의 규모가 크거나 호화롭지는 않았으나 내놓는 음식은 맛깔스러워서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었다. 또한 주인아낙이 워낙 수더분해서 초면치레라 해도 어색함이 없었고, 한번이라도 길을 튼 사람이라면 제집처럼 편한 마음으로 들어섰다. 한여름 불복더위에 사람 쪄죽일 일 아니고서야 칼국수가 웬 말이냐며 가재걸음으로 삐치는 상국을, 목매기 송아지 잡아끌 듯하여 데리고 온 이유도 다 그래서였다. 찌그덕거리는 유리문을 디밀고 들어서자 분식점 안은 미리 와 있는 손님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마지못한 걸음걸이로 엉거주춤 서 있던 상국이 그제서야 알겠다는 표정이었다. 임금님 수라상 앞에서 반찬 투정 못 한다고,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치고 기다릴 정도라면 다른 말은 필요치 않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서너 명의 주방여자들 중에서 맨 앞쪽에 나와 있던, 육덕 좋은 여인이 들어오는 석배를 향해 눈웃음을 흘겼다. 앞치마 위에 전대를 두른 걸로 보아 주인인 듯했다. "얼래얼래...난 또 뉘시라고. 무십기는... 면총각한다고 큰소리 떵떵치더니...시상천지 이눔의 집구석 맨치로 맛 ㅇ는 집구석도 ㅇ을 기라며, 다신 안 온다고 호언이시드니, 사장님끼서 우짼 일로..." "뭐든지 익훠서 먹으라매. 냉수만 퍼제켰드니 배가 살살 아픈 게...손님도 오시고 해서 익은 국수 한사발 팔아주러 왔소. 마누라야 당췌 신식색시가 돼놔서...크흠." 하대도 아니고 공대도 아니었다. 진반농반으로 주고받는 말임에도 듣기에 거북살스럽지 않은 게 이상했다. 더구나 여인의 나이 지긋하여 석배의 에미뻘은 되었음에도 그들 둘은 스스럼없이 대했고 천연덕스럽게 받았다. "덥냐?" "됐다. 근데 이 집은 맨날 이러냐. 1분만 늦었어도 서 있을 뻔했다." 마지막 남은 한 개의 호떡의자를 끌어당기려는 찰나에 문이 열렸고, 목줄이 툭 튀어나온 서넛의 화이트칼라가 실내를 한바퀴 쓰윽 둘러보더니, 그들이 방금 챙겨든 의자에 눈길이 머물러서는 아주 애석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14. 그리곤 그들이 문을 쾅 닫고는 어디론지 가버리자, 이제껏 경계의 눈초리로 꼬나보고 있던 상국이 다행이라는 듯 내뱉는 말이었다. "왜, 국수가닥이 목구멍에 걸릴까 봐 그러냐? 서서 먹는다고 말릴 사람 있기야 하겠냐. 나두 가끔은 서서두 먹어 봤응께. 일나서서 먹어라야. 죄만스러움." "근데 이 자식이 요... 뭔 일로 대낮부터 국수타령이라 했더니 배배 꼬인 게, 너 아침두 라면 먹은 거 아니냐. 물만 부으면 튀어나오는 쪼골쪼골한 컵라면인가 하는 거 말이다." 마주앉아 있는 그들은 선풍기바람조차 귀찮았던지 입씨름으로 무료함을 달래고 있었다. 이건 이쪽으로 옮겨놓아라, 고춧가루를 그렇게 많이 풀으면 맵지 않느냐, 손님들 식성은 손님들이 더 잘 알 것이니 다지기로 그냥 갖다드려라 하며 일일이 지시하고 명령하던 주인 여자 역시 일손 부리기에 지쳤던지, 만만한 게 뭐라고 석배를 걸고 넘어졌다. "근데 오늘은 우째 혼자 오셨을까. 앞집 색신 어디다 팔아묵고. 호박씨도 깔수록 냠냠한다고. 설마, 그새를 못 넘겨 갈라선 건 아닐거고." 주인여자가 해죽거렸고, 엉겁결에 걸려든 석배가 고개를 슬몃 틀었다. 그 얼굴색이 어찌나 벌겋던지 보는 사람이 민망할 지경이었다. 석배로서야 어떻게 해서든 얼렁뚱땅 얼버무려 난처한 입장을 피하려 했지만, 눈치 빠른 상국이 그걸 놓칠 리 있겠는가. "시방, 저 아줌씨 뭔 말이냐. 호박씨야 까먹자고 발린 것이니 그렇다치고. 앞집 색시넌?" "그냥 묻어둬라. 저 아줌마 별명이 물까마귀다. 산에 있을 땐 까마귄데 물에 들면 영락없는 까치새낀겨." 석배가 손사래를 치며 아주 가볍게 날려버리는 시늉이었으나, 상국의 귓구멍 속으로 들어가버린 주인여자의 말이 도로 튀어나올 리는 없겠고. 거기에 더하여, 주인여자는 강냉이알 까발리듯 죄다 주워섬기고 있었으니. "얼래라...시상에 저 능청하군. 내가 물까마귀면 총각사장님께선 물구랭이게. 관 두시우. 한복 한벌 애낄라다 평생 총각귀신 못 면할테니. 중이 지 머리 못 깍는다고, 매파 없이 추파만 던진다고 일이 성사 될 줄 알었음 오산일 기우. 후!" 하는 말로 다리까지 걸고 넘어지는 게 아닌가. 김석배가 주둥이를 당나발을 해가지고 식식거리고 있는데, 이번엔 상국이 손을 훼훼 내저었다. 15. "관 둬라 마. 콩밭 매고 토끼 잡는 정도가 아니라 타작마당에 마마밥솥 들여놓는 격이구만. 니눔 겉이 켸켸묵은 정부미야 마마밥솥이 아니면 죽도 못끓일 팔자고. 이제보니 이집이 국수집 쳐놓곤 제대로 된 국수집이구만 뭘." 하면서 주인여자를 돌아보며, "앞집 아가씨라 하셨습니까. 이눔이야 코 빠진 냉국수라도 휘딱 말아묵어야 할 입장이고. 그 귀하신 분이 도대체 누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손님두 어지간 하슈. 보아하니 친구지간 같은데 여직 모르고 계셨다니. 저쪽 모퉁이 2층에 있는, 그 왜 까치다방이라고. 후웃...!" 주인여자는 모처럼 신이 났던지 물 묻은 손까지 말리며 기세 좋게 웃는데, 주문생산만 하신다는 조물주께서 어인 연고로 시간에 쫓기셨던지, 아니면 좀 요령을 부리느라 부랴부랴 만드신 탓인지, 그 웃는 모양새란 가히 일품이어서 따라 웃지 않고는 못 배길 지경이었으니. 그러나 상국이 우습긴 했으되 덩달아 웃어줄 경황이 아니었다. "뭐요! 까치다방? 그럼 쥔지 양인지 아던 그... 돌배야, 확실하냐? 그 아가씨가 여즉 그 다방에 있는 게." "짜아식은...,물까마귀라니까." "얌마. 물까마귀도 산에 가면 까마귀라매. 여기는 임마 강변이 아니고 산인겨 산. 허고 아줌마 관상을 보아하니 멀쩡한 사람 물귀신 만들 양반 같진 않다." "헛소리 작작하고 그만 국수나 먹자. 얼릉 임마. 가게문 열어놔야 돼."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칼국수가 그들의 앞에 놓여졌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굳이 더 할 말도 없었다. 석배와 그녀와의 관계가 주인여자의 말처럼 그렇고 그런 사이라 해도 험이 될 리는 없었고, 석배의 오염되지 않은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상국이었다. 여적지 뭔 맘으로 있다가 연분을 만나다니, 짚세기도 짝이 있고 고슴도치도 궁구르는 재주는 있더라고, 박수를 쳐주면 쳐주었지 걸고 넘어질 상국이 아니었다. 그러나 상국에겐 해결해야 할 숙제가 있었다. 뭔가 다짐을 박으려던 그가 그냥 국수가닥에 젓갈을 가져갔다. 주인여자 역시 눈치 빠르게 음식상에서는 멀리 떨어졌다. "근데 무슨 일이 있냐. 이적지 코빼기도 안 보이던 놈이." 코를 훌찌럭거리며 김을 후후 몰아내던 석배가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대접을 내려놓았다. 아무래도 찜찜했다. 무슨 말인가 할 듯하면서도 정작 해야 할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상국이었다. 답답하기도 했지만 궁금했다. 16. 상국의 초라한 행색으로 보아 거간의 사정이 호전되었으리라고는 볼 수 없었고, 그렇다면 당연히 물어왔어야 할, 봐달라던 일자리는 그래 알아보기는 했느냐는 말을, 지나가는 빈 말에서조차 꺼내놓지 않은 상국이었다. 쥐불놀이에 검불 타듯, 직선적이고 단순한 성격임에도 한편으론 의뭉스러운 구석이 없는 것도 아니었으나, 오늘처럼 그렇게까지 내색하지 않은 적은 없었다. "답답하긴...지 애비 죽고 반우제 맞는 놈 같구나. 국수그릇에 조창이라도 묻어있던. 청승하군...뭔 일인지는 몰라두 용건이라는 게 있을 거 아니냐고." 석배가 재차 다그치자, 상국이 마지못해 입을 열긴 했는데, 비실비실하기로는 우수에 나온 개구리 경칩을 기다리는 꼴이요, 어물거리기는 꼭 틀니 빠진 노인네 사탕 훑는 식에, 말이라고 하는 말이 언청샌님 나발 부는 격이었으니, 귓구멍을 아무리 열어놓은들 알아들을 턱이. "...얘기 안했냐. 외유내한..." "결국, 놀러왔다 이거냐?" "일감도 구할 겸, 그 자식 일도 있고..." "그 자식? 그 자식이라니... 누구?" "그런 기 있다. 너 참 약속 하나 들어줘야겠다. 자아, 걸어." 상국이 대뜸 새끼손가락을 걸어오는 게 아닌가. 참으로 가관이었다. 내 아직 인연을 못 만나 홑살림을 한다마는, 잡수신 나이가 아침이면 수북이 잡혀오는 탈모 숫자로도 모자랄 판인데, 조무래기 애들처럼 손가락을 걸자니. 하기사 요즘 젊은것들, 더러는 있기도 하여, 눈만 맞았다 하면 입술 맞추는 것은 일도 아니고, 사흘을 못 넘겨 합궁까지 맞추어가던데, 그 사이에 꼭 거치고 가는 것이 있어, 지금처럼 애기손을 걸고 모지인을 찍더라만. 그 본을 떠 신랑각시 하자는 얘기냐고, 흐흣 웃음이 나오는데 놈의 얼굴빛이 대중없이 심각하여 웃지도 못하고 멀겋게 있자니, "쉬운 건 아니지만 어려운 것두 아니다. 맘만 먹으면 해줄 수 있는 일이다. 하니, 걸어라." 석배의 눈 앞에 손가락이 왔다갔다 하는데 아무래도 심상치 않았다. "나 임마 돈 ㅇ어. 말 하기 좋아 사장이고 듣기 좋아 회장이지, 따져봐라. 밑천이라고 있는 게 가위 하나에 얼레빗이 고작이다. 말 그대로 빚이다 빚이여. 너두 한번 따져봐라. 한 달에 공식적으루 들어가는 돈만 해도 칠십만 원이다. 남의 집이니 달세는 줘야 할 거고. 물세, 오물세, 수도세, 하수도세, 전기세, 전화료, 시청료에 동회비까지, 거기다 물만 먹고 살 수도 없는 일이이고, 증말루 죽을 지경이다. 구십만 원만 쳐도 하루에 매상 삼만 원, 쉽게 말해서 하루에 대가리 다섯 개는 밀어야 하는데..." 17. 한참을 주워섬기던 석배가 좀 미안했던지 상국의 눈치를 살폈고, 상국이 씁쓰레 웃었다. "됐냐, 이제." "아녀. 되긴. 그냥 그렇단 말이지 다른 뜻이야...그래 필요한 돈이 울만데?" "짜아식 하군. 걱정마라 돈은 아니니까. 돈이라면 있는집 과부 속치마를 붙잡고 늘어지면 늘어졌지 넌 안 찾을팅께." 지레 겁을 먹고있던 석배가 머쓱하니 웃었다. "내가 너한테 해줄 수 있는 일이라...뭔지는 모르지만 그래, 손이나 걸고보자." 석배가 손을 내밀었고, 병든 병아리 모가지 비틀 듯, 상국이 석배의 손가락을 후려잡았다. "너...너 말이다.요기 조 다방에 있다는 쥐양 인가 하는 아가씨 말이다." "쥐가 아니구 주다 주, 붉을 주." "붉은 쥔지 하얀 쥔지. 그렇구 그런 사이라며?" "사이는 무슨 사이. 그냥 일면식이 있다 뿐이지. 근데 그 아가씨는 왜?" "따악 하루만 빌려주라. 아니 하루는 무슨. 넉넉 잡고 한 시간임 될거다." "미이친놈. 니가 임마 얘기해봐. 난 자신 없다. 그 아가씨가 어데 길바닥에 놓여진 임자 없는 보릿자루도 아니고, 목걸이에 방울만 달아서 딸랑거리면 따라오는 하룻강아지도 아닐 것이고. 난 도저히 불가능이니까 가능하게 보이는 니나 알아서 혀." 석배의 얼굴이 울그락푸르락 했다. 닭똥집을 씹던 놈이 목구멍에 걸려 있는 계분을 토해낼 때처럼 캑캑거렸다. 석배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 하자, 상국이 식탁을 쾅 치면서 손가락질을 해대는데, 좀전의 고분고분하던 태도는 간데없고 여차하면 당장이라도 주먹이 올라갈 기세 아닌가. "얌마! 샛긔야...니 금방 약속했잖냐. 들어준다고." "글쎄 난 자신없다니까." "자신 있고 없고 다 좋은데 내 얘기나 마주 들어보고 임마. 설마하니 이 허리병신이 매파노릇은 못할망정 니 애인 가로챌까봐 그러냐. 그런 게 아니고 사정이 있어 그런다니까." 석배의 얼굴빛으로 봐서 도저히 풀릴 것 같지 않았던지 이번엔 상국이 싹싹 비는 시늉이었는데, 그 꼴이 꼭 꽁지 잘린 도마뱀 형국이었다. 석배의 얼굴이 누그러진 듯했으나, 여전히 닭똥 씹은 표정이었다. "어쨌건 난 모를 일이다. 상국이 니 사정이 어떤 것인지는 들어볼 것도 없고. 정히 원한다면 코치는 해줄 수 있다. 천원 한장 내질르고 커피를 시켜. 설마 배달이라는데야 안 오겠냐. 좀 멀면 택시비라도 보태주고." 18. "그런 게 아니라니까...그런 게. 여기서 얘기해봐야 그렇고 일단 일어나자. 옘병할 눔의 샛기 두구두구 속 썩인다니까." 상국이 자리를 털자 기다릴 것도 없다는 듯 석배가 일어나며 뒷주머니를 뒤적거렸다. 벌거죽죽한 5천 원짜리 한 장이 묻어나왔다. 턱을 주억거리던 상국이 예졸(隸卒)처럼 주인 아주머니를 불러댔으나, 조금 전까지만해도 넉살좋게 떠들던 그녀는 없고, 대신 겉절이를 담그고 있던 말라깽이 여인이 주인처럼 해죽 웃으며 우수리돈을 질러왔다. 타박타박 걷는 두 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앞서가는 석배는 뿔이 잔뜩 난 채로였고, 쩔레쩔레 따라가는 상국은, 그 뿔을 어떻게 하면 쉽게 뽑아낼 수 있을까 하는 궁리였다. "얘긴 즉, 너의 형 때문이라 이거냐." "그렇다니까. 그 자식이 당장 온다는 겨. 오늘 온다는 걸 긋두 과부 일수이자 무르듯 사정사정해서 연기시킨 게 낼모레다. 그러니 우째겠냐. 사실 너한텐 암 말두 안하구 갈려구 했었지. 하두 답답해서 돌아치는 길이다." 칼국수로 땀을 빼고 온 그들 둘은 다시 석배의 이발소에 와 있었다. 무슨 얘기가 오갔는지는 모르나 한국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석배는 흔연히 웃었고, 한증탕에서 나온 기분인 듯, 시원하고 홀가분해 보였다. "한국이라고? 그럼 임마 진작에 그렇다고 했어야지. 난 또...얘기해 줄게. 설마 그 정도야 못들어주겠냐. 하지만 좀 전에 한 말은 명심해라. 갸들두 먹구 살어야 하거던." "새앳ㄱ. 주둥이에 말만 실었다 하면 그놈의 돈. 시간당 만 원씩 쳐준다니까. 내 돈이 들어가는 것두 아니구 지가 챙겨서 오겠지. 어쨌건 너만 믿구 갈테니 단단히 일러놔 임마. 괜히 빵꾸 내면 난 개망신이다." "넨 지랄...개망신은. 다른 사람이면 몰라두 한국이라면서 뭘." "그러니까 하는 말 아니냐고. 너는 개망신 뜻도 모르냐? 개한테 당하는 게 개망신인겨." "내가 알았다는데 왠 뱀발이냐. 알았응께 교육이나 잘 시켜놔라. 괜히 주제 파악도 못하고 침이나 질질 흘리게 하지 말고." "건 걱정 말라니까. 내가 어디 그놈 때문에 이러는 줄 아냐. 노인네가 하두 족치니까 심봉사 뺑덕어미 부르듯 오라는 거지." 상국이 의자를 뒤로 젖히며 기지개를 폈다. 아주 홀가분한 표정이었는데, 선풍기 바람이 시원했던지 점심도 누른국으로 했겠다 딱히 갈 곳도 없겠다 한잠 늘어질 작정인가 보았다. "내가 여기 첨 올라와서 한 생각이 뭔 줄 아냐, 너." 19. 상국이 눈을 스르르 감으며 아주 오래 된, 그러나 너무도 생생하고 뚜렷한 기억을 개트림하듯 틀어올리고 있었다. 저놈이 또 무슨 엉뚱한 말을 하려고 저러나 시큰둥해 하던 석배가 시선을 밖으로 했다. 가슴 저 밑바닥이 쌉쌀하고 알알하게 번져왔다.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는 어떤 비애감 같은 것도 있었다. 그래, 사람도 없고 심심하기도 해서 치와와란 놈을 기른 적이 있었지. 석 달인가 함께 했는데...제기랄! "너나 내나 이놈의 바닥은 그때가 첨이었을 걸. 고입시험 보러 왔을 때 말이다. 그때, 그런 일만 없었어두 멱국은 안 먹었을 거고, 그러고 보면 인생이란 게 참으로 싱겁지 않냐." "그게 다 팔자소관이란 거다. 치와와처럼 하루아침에 주인이 바뀔 수도 있고..." 석배는 잃어버린 치와와를 생각했고, 상국은 17년이나 지난 까마득한 옛날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때 상국의 나이 열여섯.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보기 위해 이곳에 왔었다. 앞산도 첩첩하고 뒷산도 막막한 시골에서 지게목발이나 두들기던 촌놈이었으니 번들거리는 시내는 생소했다. 물론 10년 세월이면 강줄기가 바뀌고 산줄기가 옮겨앉는다는데 물경 17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과는, 도시의 크기로보나 인구의 변동으로보나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왜소했을 것이다. 그러나 상국이 보기엔 당시의 이곳은 난생 처음 대하는 도시였으니, 요지경 속을 헤매는 기분이었다. 다행히 그의 아버지가 보호자로 따라왔었는데, 그의 보호관찰 속에 있던 학생은 상국 자신 말고도 둘이 더 있었다. 같은 동네 살던 완식이와 지금 이렇게 만나고 있는 석배 놈이었다. "여기는 다른 곳하군 틀려서 한번 길이 갈리면 찾을 수가 없니라. 뒷간 갈 일 말고는 다른 사무가 없을 일인게 꼭 백혀 있어야 헌다 잉? " "아부지넌? " "이 애비는 근너펜에다 방 따루 정해놨니라. 목도 컬컬하고 내 시내 한바꾸 돌고 올팅께 문단속 잘허고 일찍들 자그라. 낼이 시험잉께." 공부방이랍시고 얻어준 방은 어찌나 솔았던지 장정 둘이 들어앉기도 비좁을 듯했다. 세 명이 포개 엎드리니 그런 대로 견딜만 했다. 도배를 한다고 하긴 했는가 본데 10년이 되었는지 20년이 되었는지 완전히 검으칙칙하게 변색되어 있었다. 도배지의 문양이 모란이거나 장미였는데 아주 노랗게 찌들어서 건드리기만 하면 폭삭 허물어질 것 같았고, 거기에 천정은 쥐새끼들의 놀이방인 듯하여 쥐오줌으로 얼룩져 있었다. 20. 도배지 색깔이야 어떻든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눈을 감으면 세상은 어차피 흑묵으로 통일될 것이고, 또 도배지를 감상할 만큼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전병학 씨는 일찍 눈을 붙이라고 했지만 잠이 올 턱이 없었다. 모든 게 생소했고 주눅들게 만들었으며, 더구나 내일이 시험이라는 생각이 들자 불안하기까지 하였다. '최선을 다하는 자만이 최상에 도달할 수 있다'는 영어숙어를 외우고 있었는데, 앞에 것도 'best'였고 뒤에 단어도 `best'여서 사전을 찾아보았더니 말풀이가 반쪽이나 차지하고 있었다. 그렇게 딴에는 최선을 다한다고 책장을 뒤적이고 있자니 까까머리 석배란 놈이 벽체에 코를 박고는 키득키득 웃고 있는 게 아닌가. "돌배 너 조용히 못혀! 낼이 시험인디..." 상국이 엉덩이를 내질렀으나 석배란 놈은 여전히 키득거리고 있었다. "얌마, 너 증말 미쳤냐. 뭔데...?" 석배를 밀쳐내며 상국이 대신 코를 박았다. 벽에는 작은 구멍이 뚫려있었는데, 그 구멍에 눈알을 들이밀던 상국이 노중에 뱀을 만난 듯, 소스라치게 놀랐다. 작은 구멍을 통해 드러난 옆방의 광경이란 너무도 놀라운 것이어서 상국은 차라리 눈을 질끈 감아야 했다. 뽀얀 알전구 밑으로 드러난 방안엔, 한쌍의 젊은 남녀가 뒤엉켜 있었는데, 둘 다 벌거벗은 채로였다. 밑에 깔려서는 가랑이를 쩍 벌리고 있는 여자는 껌을 짝짝 씹고 있었고, 무얼 빨리 끝내라는 투로 귀엣말로 속닥거렸다. 계집의 말을 듣는지 마는지 그 위에 올라탄 사내놈은 오뉴월 개처럼 헐떡거리고 있는데 그 해대는 동작이 해괴망측했다. 상국이 감았던 눈을 살며시 뜨고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눈알을 디밀고 있는 상국의 곁으로 석배가 다가왔다. "어뗘, 희한하지. 그쟈? 나두 좀 보자 히히..." "쉬이...조용히 혀 임마.들킴 어쩌려구..." "새끼는...닌 마 공부한다매." "쬐끔만, 쬐끔만 더 보자." 상국이 자리를 비켜줄 기색이 아니자, 석배 놈이 구멍에다 손가락을 디밀고는 갈짝거려댔다. 합판 부스러기가 후두둑 하더니 구멍은 쉽게 커졌다. 방과 방 사이의 칸막이는 판자벽으로 되어 있었고, 그 위에다 그냥 도배지만 바른 상태였다. 21. 두 놈이 대가리를 맞대고는 서로 보겠다고 아웅거리는데, 그 또한 볼만한 구경거리라. 상국이 놈은 눈알이 벌개 가지고 연방 침을 꼴깍거리는데 그 거동을 좀 보소.어허...팔을 비틀고 다리를 꽈대는 게 영락없는 논다니의 깔딱수라 그냥 지나치기 아깝고. 그 옆에 있는 석배란 녀석을 볼작시면 이건 거기에 한술 더하여 제놈이 아예 기호지세로 타고 앉아 헐떡거리고 있었으니. 엉덩이까지 들썩거리는 게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형국이로구나. 서로 보겠다는 대가리 싸움에 판자벽이 너풀거리고 석배 녀석이 헤헤닥거리고 완식이란 놈은 세상 모르고 코를 골아대고... 두번째 판이 벌어질려는 찰나, 석배 녀석이 어찌나 크게 웃어꼈켰던지, 이번엔 계집의 밑구녕으로 기어들던 사내 놈이 벌떡 일어나더니, 알전구의 스위치를 딸깍 끊는 게 아닌가. 참으로 아쉽고 섭섭한 일이었으나 불 좀 다시 켜 달라고는 못할 일. 제자리에 돌아와 눕기는 하였으나, 공부가 될 리 없고 잠 또한 올 리 없지 않은가. 옆방에서 조그만 소리가 들려도 온 신경이 그리로 쏠리고, 그 이상하고도 괴망스런 짓거리가 밤이 새도록 상국의 뇌리에서 벗어나질 않았다. 한밤을 고스란히 뽀얗게 새워버린 상국이 아침에 일어났을 땐 세상이 온통 휘청거려 보였다. 머리 속에는 뽀얀 회분만 가득 날아다니는 것 같았고, 두통이 아주 심했다. 첫애를 밴 임부처럼 헛구역질을 해대자 전병학 씨가 걱정이 되었던지, "우째 쟈 완식인 쌩쌩한디, 느그덜 둘은 얼굴빛이 그모냥이냐. 내 일찍들 자두라고 그만큼 일렀건만 밤을 홀딱 새웠냐? 미련헌 눔덜 하군. 아무래도 토사인갑다. 내 휘딱 지사제 한알 사 올팅께 쪼까만 참아라 잉." 하면서도 저리도 열심히 공부한 아들이 아주 대견스러웠던지 흐믓이 웃었다. "아부지넌...밸 일 아니라께..." "아니긴 이눔아 뭐시 아녀. 대가리 속에 공자님 맹자 선상이 들었음 뭣하냐. 필끝에서 안 놀아줌 말짱 헛일인겨." 결과는 둘 다 낙방이었다. 고등학교 입학시험에 붙은 건, 초장부터 잠에 골아떨어졌던 완식이 놈뿐이었다. 역전골목 여인숙이라면 아주 이를 갈게 된 것도 다 그런 내력이 있은 다음부터였다. "크흣...그때 그치들 여즉 살아 있을라? 색에 골아 갔어두 벌써 갔을기라. 그챠 잉?" 상국이 쓰게 웃으며 석배를 내려다 봤다. 그러나 도로 건너편에다 눈을 박고 있는 석배의 대답은 엉뚱했다. 22. "그런 놈은 뒤져두 고이 못 뒤졌을 기다. 개값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소행이 괘씸혀서 그런다." "넌 또 그 팔마구리만한 치와와 생각이냐. 건 임마 잘 잃어버린 겨. 두고두고 싸제킬 개똥인디...진작에 잃어버렸어야 하는 것이고. 내 얘긴 그게 아니고, 앞길이 구만리 같은 젊은 놈들의 싹수를 무지막지하게 꺾어버린, 고때 그 두 년눔 말이다." "상국이 너야 고등학교 못 들어간 게 억울할 지 모르지만 난 아니다. 완식 갸 짝 날 바에야 첨부텀 미역국 먹는 게 백배 낫지. 그거야말로 입학시험도 보기 전에 떨어졌어야 하는 것이다." 상국이 다시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더니 의자에서 내려왔다. 잘 생각이 아닌가 보았다. "돌배야, 전화 한 통화만 걸자." "왜? 느 지수 씨한테 중간보고라두 할라냐." "샛ㄱ... 우쨋 건 딱 한 통화만 빌리자." 말릴 겨를도 없이 상국이 의자에서 내려서더니 전화통을 움켜잡았다. 다이얼을 눌러가는데, 어렵쇼 이건 서울특별시내 전화 번호도 그렇게는 길지 않을 일이었다. "너어... 이제보니 장거리전화 뚜드리는 거 아니냐? 안 돼, 임마! 깔딱깔딱하면 다 돈이여." 그러나 발신음은 벌써 착신지로 건너가 있었고, 상국이 꽥 소리를 지러댔다. "야아...! 너 어물거리지 말고 얼릉 아부지 바꿔. 뭐여...? 남의 일 나갔다고? 그럼 저녁참에 집이루 전화하라구 해. 알었지? 야야, 참 그리구," "야참이고 새참이고 깔딱깔딱한다니께." "알았어 임마. 한마디면 되. 허고, 야 항국아...!" 그새 전화가 끊어졌는지 상국이 육두문자를 섞어가며 들어보라는 식으로 훈계를 하는데, 이건 누가 형이고 누가 동생인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더니 저도 미안은 했던지, 내 갈란다. 낼모래 약속 알었지? 틀어짐 개망신인겨, 하면서 휑 하니 가버리는 게 아닌가. 석배의 시선이 상국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포도와 그 포도 위를 달리는 차량, 건물벽에 내걸린 유리문과 알루미늄 샷시...반짝일 수 있는 모든 것들이 반짝이면서 빛을 거부했다. 지상으로부터 배척당한 빛살이 다시 천상으로 향했다. 그러나 한번 떨어져 내린 빛은, 또 그렇게 떨어져 내리는 빛과 뒤엉켜 마치 저승을 찾아나선 중음신과도 같이 끝임없는 부침을 반복하고 있었다. 석배가 눈살을 찌푸렸다. 바람도 없는 허공에 떠도는 빛의 잔광이 유리벽 저 너머로 아스라이 멀어져가고 있었다. 솜털처럼 보드라운 어둠이 밀려오고...상국의 다그침이 귀에 쟁쟁했다. 절교라느니, 상종을 안하겠다느니 하는 원색적인 비난을 거침없이 쏟아부으며, 그래도 사정 한번 봐달라고 밤낮으로 조르는데 앞뒷발 다 든 석배였다. 23. 시계를 들여다본다. 약속 시간이었다. 거울 속의 안녕하심을 확인하면서도 달뜬 얼굴. 성전에 임하는 로마군병처럼 제법 심각해 보였다. 구둣솔, 털이개, 머리빗... 문을 걸어잠궜고, 시계추는 여전히 더위에 지친 몸으로 흐느적거렸다. 침침한 실내 공간에 샹들리에 하나. 석배가 찾아간 곳은 지하1층에 위치한 '카페 환타지아'였다. 물컵을 집어든 석배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눈을 감으며 기지개를 켜더니 부르르 진저리를 친다.전광판의 디지탈시계가 빠른 속도로 시간을 읽어내고 있었다.감은 눈을 세차게 감으며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한다. 시냇물처럼 잔잔히 흐르던 깽깽이협주곡이 낭떠러지기로 떨어져내린다. 문이 열리고, 웨이타의 우렁우렁한 안내가 귓전에 맴돈다. 그의 앞에 다소곳이 앉는 여인, 주연실 양이었다. "지금...이렇게 이른 시간에...괜찮겠어?"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고, 볼우물이 패여 있었다. "그래도...영업에 지장 있는 건...아녀?" 연실이 메뉴판을 훑어보며 그냥 웃기만 했다. 곁에 서 있던 웨이터가 따라 웃으며 무얼로 주문하실 거냐고 묻자,석배가 '아무거나'했는데 그녀는 그런 그를 빤히 쳐다보더니 '라이스'하면서 둘째와 셋째 손가락을 펼쳐보였다. 웨이터가 굽실했고, 그 굽실하는 쪽은 연실을 향해서였다. "사실은..." "...?" "아냐, 그냥 보고 싶더라구. 그 왜, 있잖아. 귀중한 보물을 자기만이 아는 은밀한 곳에 숨겨놓았을 때, 뻔히 그게 안전하리라는 걸 알면서도 눈으로 꼭 확인을 해야만 마음이 놓이는...그냥 그래볼 때도 있거든." "...그래서요." "그래서는 무슨. 그냥 그럴 때도 있단 말이지." "제 얘긴, 두 눈으로 확인해보고 난 지금 기분이 어떠시냐구요." 그녀가 강냉이튀김 한 알을 입에 넣으며 눈을 가늘게 흘겼다. 그녀의 입술이 잘 익은 자두처럼 오무라들었다. 석배가 침을 꼴깍 삼켰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도 그래. 아마 늘 그럴 거란 기분이 들어." 완전무결허게 내 껄로 맹글기 전엔, 하려던 말을 재빨리 삼키긴 했으나 미처 넘어가지 못한 말이 침으로 튀겨졌다. 24. "어떤...확실한...그래, 그려 우리 약속 하나 하자. 여기다..." 무슨 말인가 머뭇거리던 석배가 얼굴을 붉히며 새끼손가락을 세워왔다. 이번엔 연실이 머뭇거렸고, 잘게잘게 떨며 서 있는 석배의 손가락과 샹들리에 불빛에 반사된 석배의 얼굴을, 분명 둘 중에 하나는 가짜일 거라고 믿었던지 의아스런 눈빛을 해 가지곤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자아, 걸어. 쉽다면 쉽고 어렵다고 해도 쉬운 일이야. 요는 주양..." "또..." "연실이 마음먹기 달린 일이야. 말 한마디면 되거던. 얼릉 걸어." 그녀가 테이블에 이마를 박으며 까르르 웃어댔다. 어깨까지 들썩이던 그녀가 손바닥으로 눈자위를 훔치더니 석배 앞으로 새끼손가락을 세워왔다.석배가 재빠른 동작으로 그녀의 손가락에 자신의 손가락을 걸었다. 그리고 나선 엄지손가락을 까닥거려보이자 연실이 발그레한 볼우물을 만들며 자신의 무인을 찍어갔다. 그러한 일련의 과정을 정리해보건데, 방금 전 그의 손놀림은 상국의 수법처럼 날쌔지는 못 했지만, 어쨌건 그녀의 손가락을 나꿔채기로는 수리매가 병든 병아리 채 듯, 신속하고 다급한 것은 꼭 같았다. "됐어요? 이러면...?" "됐어. 한마디만 하면. 그러니까, 주양이," "또오..." 석배가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조금은 어눌한 투로 그러나 미리 준비되었던 듯 또박또박 이어갔다. "연실이, 어떠한 경우를 당하더라도 이 김석배만을 생각하며 또...다른 어떤 남자와도 관계치 않겠다고, 그렇게 약속하면 돼." "좋아요. 다른 건 다 좋은데, 근데 직업이 차배달인데 어떻데 다른 남자와 관계를 안 하죠. 하루에도 수십 명씩 상대를 해야 되는데.그렇다고 이짓을 그만둘 수도 없고." "그 정도야 할 수 없지. 단지 내가 얘기하는 관계란 업무상 만나는...그 뭐냐, 일상적인 관계가 아니라...그렇지 애정관계 말야." 그녀가 또 까르르 웃더니 약간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런 약속이라면. 그럼... 석배 씨는 뭐죠? 저의 기둥서방? 아님 후견인이나 대리인?" "천박하게 기둥서방은. 후견인이나 대리인은 나이든 노인네들이나 하는 짓이고." 그녀는 줄곧 웃고 있었고, 그 어느 때보다 즐거워 보였다. 그런 그녀를 쳐다보는 석배 또한 마냥 즐거운 표정이었다. 25. "그럼, 우리 관계는 뭐죠?" "그야...그거야 당연히..." 석배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그 눈빛은 캄캄한 밤중에 그어댄 성냥불 같은 것이어서, 빤히 쳐다보고 있던 연실이 자신도 모르게 흠칫 놀라며 고개를 숙였다. 기회는 요때다 생각했던지, 석배가 재빨리 성냥개비 하나를 더 그어대며, "그야 물어보나 마나 아니겠어. 특별한 관계. 새루 말하자면...애인..." 석배가 물컵을 집어들더니 홀짝 비워냈다. 텅 빈 물컵에 물을 따랐다. 주전자 뚜껑이 딸랑했다. 물이 아니라 기름이었다. 불길만 만나도 폭발해버리는 가연성 인화물 같은 것. 한 모금의 물이 부어진 가슴이 새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혓바닥으로 입술을 핥자 바삭바삭 소리가 났다. 다시 물컵을 집어들더니 벌컥벌컥 들이켰다. 사실 석배가 그녀를 만나자고 한 이유는 상국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상국의 앞에 서기만 하면 괜히 무슨 손해나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고, 별 이유도 없이 왜소해지고 주눅이 들게 되는 석배였으나, 어쨌건 그는 불알이 빨갈 때부터 사귄 친구였고 국민학교 졸업에서부터 고등학교 입학시험에 낙방할 때까지 겪어온 동창생이었으며, 정부미가 어떻고 여주이천 쌀이 어떻고 떠들어봐야 별수없이 산골출신인 촌놈들이었다. 다른 부탁은 다 몰라도 이번 약속은 지켜줄 생각이었다. 연실이라면 자신의 부탁을 들어줄 것 같았고, 그것이 설령 어렵고 힘든 맞선이라는 연극 토막이라도 기꺼이 연출해 주리라 믿었다. 또한 그 대상자가 한국이라면 뒤탈 있을 리 없었고 딴 맘 먹지 못할 위인임을 잘 알았다. 그런데 그녀가 누구인가. 연실이었다. 남들이야 차 배달이나 하고 손님 시중이나 드는, 그래서 무주공산(無主空山)이요, 창만허주(滄灣虛舟)일쯤으로 생각할지 모르나, 석배에겐 그렇게 쉬운 여자가 아니었다. 상국과의 약속도 중요하지만 그 전에 확실하고도 견고한 언질을 받아두어야만 될 것 같았다. 그것이 순서이고 도리라 믿었다.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상국과의 약속을 지키겠다고 그녀를 한국과 대면시킨다는 건 스스로를 기만하는 일이요, 이율배반이란 생각이었다. 이제, 그녀에게서 다짐을 받아냄으로써 가슴 한가운데 도사리고 있던 불안감은 어느 정도 해소되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런데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의 기분이 너무 좋아 있는 것도 말 건네기가 어려운 이유 중에 하나였다 26. 오갈병에 시들던 콩이파리 비 오자 말라죽더라고, 물을 마셔도 목구멍은 모래알처럼 따갑기만했고 가슴 저 밑바닥에서부터 치솟아오르는 불길로 숨이 턱턱 막혔다. 머틀거리는 눈을 질끈 감으며 석배가 입을 딱 벌렸다. "어디...몸이라도 불편하세요. 신색이 아주 안 좋아보여요." 단무지를 포크로 찍으며 연실이 걱정스레 물었다. "아냐, 그냥. 신열이 좀...직업 탓일 거야. 오후에 받은 손님 머리가, 아마 한 일주일쯤은 처박아 놓았던지. 머리때에 땀냄새에 비듬에...먼지는 뽀얗게 뒤집어 써 가지고. 집이 이발관 근처만 아니었어도 그냥 돌려보내려 했는데...그치뿐만 아니라 다 그래. 다른 땐 머리도 자주 감고 면도도 하다가 이발할 때쯤 되면 머리에 구더기가 끓어도 씻지를 않으니... 무슨 큰 손해라도 본다고 생각하는가 봐. 심뽀들 하군..." 석배가 열적게 웃어보였다.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던 가슴 속이 조금은 가라앉는 듯했다. 그녀가 밥알을 오물거리며 고개를 까닥했다. "식사를 왜에...그만하실 거예요?" "많이 먹었어. 속도 안 좋고. 또...오무라이스는 들척지근한 게 값만 다구지게 비싸고, 별로야." 연실이 살포시 웃었다. 볼우물이 보기좋게 패였고, 짧게 자른 단발머리가 청초했다. "나가요. 그럼 우리." 그녀가 줄달린 핸드백을 어깨에다 걸며 뜬금없이 재촉했다. 석배가 마지막 남은 불씨를, 한모금 냉수로 비벼끄며 그런 그녀를 멀겋게 쳐다본다.녀석의 얼굴이 보기좋게 일그러졌다. "벌써? 그 뭐시기냐, 디저트란 것도 안 먹고?" "이 좋은 밤에 나가서 마시자 이거죠. 숨 떨어지면 평생 있을 곳이 지하실인데 무슨 미련으로 대구 앉아 있어요.밤바람에 별이라도 줍지." 석배가 영 믿기지 않는다는 듯, 일그러진 콧등을 손바닥으로 비벼대는데, 이놈이 이거 도깨비에 홀려도 단단히 홀린 기분이었나 보다. "증말이여? 밖으로 나가자는 게...어디구 같이 가자 이 말이지?" 그녀가 허리를 꼬며 까르르 웃었다. 이거야말로 상국이 놈의 말을 빌리자면 타작마당에 마마밥솥 들이는 격 아닌가. 그래도 의심쩍었던지, "그래도 괜찮겠어? 누가 그러더라...무단이석이나 결근하면 고 시간만큼 돈으루 물어줘야 한다고. 거기다 마담 낮짝 보아하니 밥풀 한알 붙을 자리도 없던데..." 하고는, 아주 심각한 얼굴이 되어버리자 연실이 또 까르르 웃으며 계산대 앞으로 다가가는 게 아닌가. 27. 석배란 놈, 어쩔 수 없이 일어서야 했고, 그녀의 곁에 다가섰을 땐 이미 셈을 치룬 뒤여서 머쓱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그는, 그 지하 카페 '환타지아'를 나오면서, 또 택시 안에서, 그리고 지금 이렇게 버드내유원지를 거닐면서 줄곧 한 가지 생각에 골몰하고 있었으니, 그것은 곧 그녀에 대한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 여늬 다방에서 일하는 아가씨들은 보통이 한달이고 기껏해야 두 달인데, 그녀는 어째서 달을 두 번씩이나 넘겨도 주인이 싫은 내색을 안 할까. 지금 시간으로 봐서, 또 앞으로 지낼 시간을 따져 아무래도 몇만 원은 카운터에 물어박질러야 될텐데, 너무 짐을 지우는 건 아닌가. 주인마담이 그녀를 대하는 태도를 볼작시면, 이건 업주와 종업원의 상하관계라기보다는 차라리 뒤바뀐 듯한 감도 없지 않았고. 이것 저것 물어볼 게 많았지만 그럴 때마다 좀스럽게 생각되고 천박하게도 보여 꾹 눌러참고 있는데, 그녀가 먼저 물어왔다. "석배 씬 석배 씨 자신을 생각해보신 적 있으세요? 이를테면 출생이라든가 사망에 관한 짤막한 느낌 같은 거." 석배가 발부리에 걸린 돌맹이를 힘없이 걷어찼다. 돌은 데르르 굴러 물 속에 퐁 빠졌고, 가늘게 떨리는 잔물결이 좀 전에 지나간 뱃물결을 타고올랐다. 물결이 물결을 타고 넘다니... "내가 나를...? 김석배가 김석배를 생각한다...? 글쎄...다른 사람을 생각해본 적은 많어두...더구나 나란 놈, 워낙이 천출내기라." 하면서 물그림자로 일렁이고 서 있는 연실 곁으로 추적추적 걸어갔다. 호수가에는 길다란 벤치가 놓여 있었고, 누구랄 것도 없이 나란히 앉았다. 시간으로 보아 오늘밤엔 저 물결이 뱃길의 마지막 흔적이리라. 석배가 돌맹이 두 개를 호수 한복판으로 집어 던졌다.물결과 물결이 일었고, 물결에 실린 수은등 불빛이 달빛처럼 고왔다. 그러나 그 물결과 물빛은 너무도 허망하게 스러져갔다. 물결이 물결을 만나면 아예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경우는 또 뭣이고... "난, 나란 놈은 솔직히 말하자면 근본도 까마득해. 다섯 살 때던가 여섯 살 때던가 입양이 뭔지도 몰랐지...죽 대신 밥을 먹는다니까 그게 그렇게도 고맙고 기쁘더니만, 낸지랄...생각하믄 뭣이여, 생부모를 꽁보리밥 한 그릇하고 맞바꾼택이지..." 이런 얘기는 하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그는 무엇에 홀린 듯, 먹빛 물속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희미하게 번져오는 자신의 물그림자를 기어코 건져올리겠다는 심사인가 보았다. 28. "양모가 죽은 게 잘못이지. 그보다 더 큰 잘못은 양부가 재취를 맞은 것이고...누가 그 자리에 들어앉든 의모일 수밖에 없었겠지만, 그 여잔...질레같이 살았다면 아마 그냥두지 않았을 거야. 살인죄로 쇠고랑을 차느니 가출해 버리자는 결심이었지. 양부에겐 미안했지만, 나말고 다른 누구라도 같은 생각이었을 거야." "양모가 죽은 게 언제였는데요?" "중학교 2학년 때였을 거야. 고 다음 해에 여기와서 고입시험을 봤으니까." 상국이 푸념처럼 주절거리던, 그 입학시험 전날 밤의 해괴하고도 망칙스럽던 정사장면이 떠올랐고, 석배 역시 씁쓰레 웃었다. "새로 들인 여자가 아주 못되먹은 사람이었던가보죠? 살기를 느꼈을 정도였다면." "아냐. 성질이 포악하다든가 막되먹은 여자였다면 늙어서 골골하는 양부가 안쓰러워서도 배겨냈을 거야. 근데 이 여잔 너무 잘해줘서 탈이었지. 어느 정도인가 하면...그래 관두지." "이해가 안 되네요. 잘해주는 것두 탈이라니." "속 모르는 사람들이야 다들 그렇게 생각하겠지. 하지만...생각하기도 끔찍해. 아부지가 있건 말건, 이건 민망하고 낯 뜨거워서 도저히 배겨낼 장사 있어야지. 오늘 같은 밤에 등목 가자고 부추기는 건 예사고, 잠이 좀 들만 하면 언제 들어왔던지, 방이 춥지는 않느냐 엊그제 사다준 잠옷이 왜 맞지 않아서 그러냐, 샐샐 웃으며 날젖을 드러내놓고는 대놓고 추근덕거리는데...어머니고 지랄이고 칼이 있었으면 푹 쑤셨을 거야." 석배가 눈을 질끈 감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한숨에는 무어라 꼬집어내기 힘든 비애와 우수 같은,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회한 같은 감정이 실려있는 듯했다. "그 여자도 이상하네요. 들어오기 전에 다 알고 왔을 거 아녜요. 석배 씨 아버님 연세가 얼만지..." "죽일 년이여...가랭이를 찢어 쥑일...지금만 같았어두 가만 안 있었을 겨. 돈 많겠다 자식이래봐야 양자라고 하나 있겠다, 나이 든 노인네가 살아봐야 몇 년을 살겠느냐 이런 계산이었겠지. 여우 같은 년...나한테 그렇게 꼬리를 쳐댄 것도 다 그런 흉계였던 것을...이 돌대가리가 걸 알았어야지." 어지간히도 후덥지근했다. 그러나 아직 아홉 개의 하늘 중 가장 뜨겁다는 염천을 맞이하자면 그 사이에다 우천을 넣어야 했다. 며칠이고 내리쬐는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건만 일기예보의 비 올 확률은 늘 30%를 넘지 못하고 있었다. 하늘은 그저 찌푸려 있었고 휘적휘적 걸어가는 구름발 사이로 별이 손을 내밀어 그나마 감질게 흐르는 바람줄기를 나꿔채갔다. 29. 버드내유원지는 밤풍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했다. 저 멀리 태백을 모악(母岳)으로 삼아 내달리던 산맥이 까치재를 넘어 한 점 옥동자를 점지했으니, 이름하여 두타산이라 불렀다. 그 두타산에서 흘러내리는 옥계(玉溪)가 사계를 긋치지 않으니 바로 버드내였다. 시가지의 한복판을 관류하는 이 물줄기는, 도시의 젖줄인 셈이었다. 아주 오래전, 선대들은 후일을 기약하여 두타산 바로 밑, 그러니까 도시의 북서쪽에 제방을 축조하였는데 그 규모가 워낙 커서 저수지라기보다는 호수에 가까웠다. 원래는 농업용수를 목적으로 준설(竣設)된 것이나 도시가 들어서고 사람들이 꼬이기 시작하면서,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바뀌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시 당국에서도 아예 이 지역을 공원지역으로 묶어 관리하고 있었다. 가없이 펼쳐진 호수와, 섬처럼 다가서는 제방. 그 제방을 돌아가며 서 있는 버드나무. 여기 저기 벤치가 보이고 나비떼처럼 앉아있는 쌍쌍의 연인들... 누군가를 태우고 물길을 떠난다는 설레임으로 아침을 기다리는 유람선. 학처럼 거북처럼 그렇게 흔들리노니, 어느 젊은이 있어 이 한적한 밤에 몰이배를 몰고 꿈을 낚을 것인가. 누군가의 싯귀를 떠올리며, 연실이 먹빛 수면 위에다 별가루를 뿌리고 있었다. 하들거리는 버드나무 가지처럼 떨고 있는 석배가 측은해 보였고, 그래서 그랬던지 평소와는 달리 아주 작고 왜소해 보였다. "집을 뛰쳐나왔다면...그럼, 고향과의 인연은 완전히 끊으신 거예요? " "그런셈이지. 한번 찾아가봐야지 했을 땐 양부마저 죽었다는 소문에, 그녀러 여편네가 어찌나 우기던지 지관도 못쓰고 화장을 했다니...제사 가 돌아와도 물 한 그릇 못 얻어 먹을 구신인데 묘는 무신 놈의 묘냐고. 낸지랄...그럼 지년이라도 분향제례를 올렸어야 할 거 아녀. 막은골 무논까지 톡톡 팔아 가는 년이." "유언이라도 있었을 거 아녜요.설마 그 여자 앞으로만 다 맡겼을 리도 없고." "유언두 살어서 유언이고, 죽고 나서야 산 사람 처분이지. 꼬라지하군...! 다 운명의 장난인거지 뭐. 꽁보리밥 세 그릇에 팔려온 놈이...시작부터가 뒤틀렸응께. 결과적으루 부모 잃고 밥도 못 얻어먹고. 니기미, 죽 쏟고 개한테 물리고, 나란 놈 원래가 그런 놈이여." 석배가 호수를 바라다 보았다. 조금 전 연실이 뿌려놓은 별가루가 수은등 불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연실이 석배를 바라보면서, 까페에서의 그 멜로드라마 같은 손가락걸기가 아니더라도 이 남자와는 쉽게 헤어질 수 없으리라는 막연한, 그러면서도 조금은 불안한 느낌이 맥박처럼 뛰고 있었다. 30. "우리 그만 가요." "이런...미안, 미안하게 됐는데. 그 잘난 신세타령을, 혼자만 떠들어댔으니." "아녜요. 재미있었다면 거짓말일 거고. 하지만 지루하지는 않았어요. 초록은 동색이라고 제 얘길 듣는 기분이었으니까요." "그럼...연실이도?" "꼭 같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저 역시..." 이 남자에게 모든 걸 말해버릴까 하다간 참기로 했다.언젠가는 모든 게 밝혀지겠지만 그때까지만이라도 비밀로 해 두자는 계산이었다. 석배 역시 그녀의 그러한 대답이 궁금하지 않은 건 아니었으나, 자신의 암울하고 굴절된 과거를 다 털어놓은 마당에, 다시 그녀의 과거까지 캐물을 용기가 없었다. 어쨌건 석배로선 후련했다. 그녀를 대할 때면 어떤 멍에 같은 게 자신을 짖누르는 듯했는데, 그렇게 다 말해버리고 나니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하긴, 다라고는 했지만 전부 다는 아니었다. 아무 것도 모르던 철부지였다기로, 양모와의 그 마지막날 밤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밤바람이 제법 산들거렸고, 석배가 무의식적으로 머리를 쓸어넘겼다. 허전했다. 잡혀지는 머리숱에선 아무런 감각도 느낄 수 없었다. 석배가 지긋이 눈을 감는다. 이적지 살아오면서 있어야 할 곳에 한번이라도 있어본 적이 있던가. 아무리 따져봐도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아마 상국이란 놈도 마찬가지일 것이고 이렇게 만나고 있는 연실 역시도 그럴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왠지 곁에 있는 그녀가 핏줄처럼 여겨지고, 아주 먼 옛날 어디서던가 꼭 한번 이렇게 만났으리라는, 친숙하고도 다감한 느낌이 들었다. 석배가 모든 걸 털어내려는 듯 도리질을 해댔고, 그 곁으로 연실이 따라 걸었다. 약간 추운 기색으로 그녀 역시 잘게 떨어보였다. 길게 늘어진 줄가방이 맥없이 흔들렸다. 석배의 손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을 감싸쥐었다. 연실이 살짝 빼는 시늉이었으나 완강하지는 않았다. 석배가 연실의 손을 더욱 꼬옥 쥐었다. 파리하게 떨리던 그녀의 손이 점차 따뜻해지면서 솜사탕처럼 풀려지고 있었다. 석배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연실이..." "...?" "이젠, 하루라도 안 보고는 못 살 것 같어. 증말이여..." 감싸쥐고 있던 그녀의 손을 스르르 푸는가 했는데, 석배가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그녀가 몸을 뺄려고 바둥거릴수록 우람하고 널찍한 석배의 가슴 속으로 파고드는 꼴이었다. 그가 그녀의 허리를 으스러져라 끌어당겼다. "사랑해...하루라도 안 보군 못 살것 같어..." "저두...저두 그래요." 그들의 뜨겁고도 긴 입맞춤이 끝났을 때, 잔잔한 호수의 수면 위론 하늘의 별자리와는 정반대로 뒤바뀐 별들이 은분처럼 떠돌고 있었다. 2. 세상 밖으로 1. 그날은 한국이 맞선 보기로 되어 있는 날이었다. 물론 그 사이 벌어진 일들로 말하면, 실로 웃지 못할 사건의 연속이어서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을 지경이었고, 얘기를 들려준다 해도 곧이들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국이 택시를 타고 역전 근처까지는 왔으되, 그 골목이 그 골목이었던지라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한나절 내내 기웃거리다 막상 상국이 전화를 받았을 땐, 파출소였는데 그 파출소 순경이 하는 말, "참으로 대단한 분을 형으로 모셨소. 본받을 만합디다. 동생이 뭐하는 분이냐 물었더니 건축회사 사장님이라고 말씀은 하는데 이름이 뭐냐고 해도 꿀 먹은 벙어리요, 전화번호가 몇 번이냐 해도 묵비권이라 하도 답답해서 그럼 여긴 뭣하거 찾아오셨느냐 했더니...크흐흐, 저기 저 물건을 좀 맞기러 왔다잖겠소. 여기가 무슨 양계장인줄 아느냐고 호통을 쳤더니, 내 원 하도 기가 막혀...소장실 문을 열더니 저눔을 탁 풀어놓는 게 아니겠소. 말두 말두 마슈. 내 평생에 장닭이란 놈이 그렇게 잘 날아다니는 줄은 오늘 이 시간이 첨이요, 첨." 어지간했던가 보았다. 마흔 중간쯤으로 보이는 그 순경의 계급장은 이파리 세 개였는데, 그 꼴이 말이 아니었다. 풀어진 허리띠를 손으로 붙잡고 있기는 했는데 엉덩이의 속살이 염치없이도 비적비적 튀어나왔고, 윗도리 단추는 그나마 다 떨어져나가 선풍기 바람이 쏘여질 때마다 하늘색 제복이 너풀거려, 마치 들판의 허수아비를 연상케 했다. 눈알만 퀭하니 드러난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빤한 틈이 없었다. 사무실 역시 난장판이긴 마찬가지여서, 결재판이고 서류철이고 제멋대로 나뒹굴어 산란스럽기 그만이었다. 질서와 규범을 유도한다는 대한민국의 경찰이 근무하는 사무실이라고 하기조차 민망할 지경이었다. 하얗게 뒤집어쓴 닭털을 툴툴 털어내며, 그래도 그는 성깔 한번 부리지 않고 히죽 웃어보였다. 웃지 못할 상국이었다. 그저 죄송스럽고 창피스럽고 낯 뜨거워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었다. "무어라 사과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정말 죄송하게 됐습니다." "크하핫, 아닙니다. 아니예요. 저야말로 진짜 감복했습니다. 하안 눔의 장닭, 내 그렇게 잘 날 줄은..." 상국이 무안스레 얼굴을 붉히며 주위를 두리번거리자니 구석퉁이에 웅숭그리고 앉은 한국이 걷어들렸다. 아주 반갑다는 듯 씨익 웃고 있었는데, 예의 그 장닭이 꼭꼭거리며 그의 품에 안겨져 있었다. 2. 잔뜩 겁을 집어먹은 듯 눈알을 대록거리며 품에 안겨 있는 장닭이나, 그런 장닭을 품에 안고 있는 한국이나, 한치 기울거나 틀리지도 않는, 그놈이 그놈이었다. 그러고보니 경찰관 나리께서 무얼 두고 감복했다고 하는지 그제야 알 만했다. 이러한 일로부터 시작해서, '아차 이거 얘기해 준다는 게 깜빡 잊었다'는 석배 녀석을, 진땀이 나도록 구슬리고 닥달했던 일. 난데없는 침입자에게 방을 빼앗겨버린 미선이 년의 뿌루퉁한 항거를 누그러뜨리느라 한 달치 용돈은 물론이고, 가능성도 없는 공약까지 남발해야 했던 일이며, 거기에 한술 더 떠, 등신도 급수가 있다더니 그 말이 꼭 맞는다며, 세상에 그래 맞선보러 온다는 작자가 속내의 하나 갈아입지 않고 오느냐고, 손발톱 소지까지 해줘야 할 판이니, 나는 이 집에 무슨 식모나 하년 줄 아느냐고 날뛰는 아내에게 침이 마르도록 공치사를 늘어놓아야 했던 일이며... 그야말로 일일이 열거하기조차 힘든 사건의 연속이었다. 어쨌건 이젠 다 지나간 일로 맞선 보는 일만 남아 있었다. 아니, 그 사이 한가지 또 해야 할 일이 있었으니 한국에게 이발을 시켜야 했다. "항국이 너두 어지간 하지 임마.속옷이야 빨래해주는 식구가 없으니 그렇다 해도 대가린 밀구 왔어야 할 거 아녀." "히히...알구 있었어. 알구는 있었는데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깜빡했지뭐. 정신이 있었어야지. 히히... 어디 그럴싸한 데 ㅇ어? 돈은 충분할겨. 아부지가 농사자금 대출까지 내줬거등." "십만 원은 따루 준비해 놔야 한다니까. 그 뭣이냐 고스톱으로 말하면 고리돈인 겨, 고리. 일봐주고 띵궈먹는 거. 항국이 너두 알지? 어...?" "알어. 나두야 둬 번 해봤는걸. 디게 재미있드라 야. 돈이 줌 히퍼서 그렇지." "야야, 헛소리 집어치우고 알았음 됐어. 십만 원은 지수한테 주고 따라와. 시간ㅇ어 임마. 어리어리 하다보면 열두시야." "그건 석배 갸 품값이라구 안 핸..." "일이 잘 성사됨 어디 그것 같구 될 것 같어. 양복이라도 한벌 맞춰줘야지. 뒷일은 내가 다 알아서 할팅께. 항국이 넌 준비나 잘 혐마." 한국을 따라붙인 상국이 이발소 문을 열자 석배가 칼을 갈며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을 앞에 앉힌 석배란 놈, 이발할 생각은 않고 엉뚱한 얘기만 씹어벌리고 있었으니, "야야 한국이 너 그때 그 지집년이 튀는 걸 봤다 이 말이지 너어?" "긍께...칠흑 같은 밤이었다고 안핸. 갈걷이 다 끝내고 시방처럼 대낯이었을 걸." "차아...그 전에 논이고 밭이고 다 팔아묵고? 너두 그렇지 임마 걸 봤다면 다리몽둥이 분질러뿌리던지 할 일이지 비영신 겉은 눔덜..." 3. 이건 어디 이발소 주인이 아니라 흥신소 사무장 같은 소리만 해대는 데, 저 어름어름한 한국이 놈이야 세월이 어떻게 가는지 누가 새신랑감이고 누가 들러리인지 애초에 분별없는 놈이니 그렇다 치고. 곁에서 보고 있는 상국으로선 복장이 터지고 울화가 치밀어서 더는 두고볼 일이 아니었다. "야 임마...! 너어 돌배 너. 얼릉 대가리 안 밀겨! 시간ㅇ어 임마. 열두시라고 니 입으루 안 그랬어." "뭐여...? 열두시? 누가 운제!" 까무러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럼 아니란 말여, 열두시가? 니 입으루 말하는 걸 내 귀루 딱 소리나게 들었는데?" 펄펄 뛰는 상국과는 달리 석배는 아주 태연했다. 기지개까지 늘어지게 펴고는, 장닭처럼 눈만 멀뚱거리고 있는 한국을 여유롭게 건너다봤다. "츰에야 그랬지. 그랬다가 오후 세시라고 안했냐. 근무시간 바쁘다고." "뭐어야! 개애눔의 샛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오늘이 아니고 내일이라고 안 하는 것만도 다행이었다. 사실 상국이 부랴부랴 열두시로 잡은 건, 한시라도 빨리 일을 추리고 일찌감치 돌려보내려는 심사였다. 하룻밤을 재우는데도 그렇게 난리법석을 피우는 미선이 년이고 마누라쟁인데 오늘 밤까지 재운다는 건 무리였고 가당치도 않은 일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석배 역시 꿍꿍이 속이긴 마찬가지였다. 점심시간에 맞춰주면 저희들끼리 점심식사라도 하자며 밀회를 즐길지도 모를 일, 아무리 고것이 등신 머저리 같은 한국이라 할지라도 그 꼴이야 차마 볼 수 있겠는가 싶었고, 그래서 일부러 연실에게 세시라고 못박았던 것이다. "허니 어디가서 즘심이나 먹구 오자. 한국이 너 즘심값도 없는 거 아니냐. 그럼 곤란한데. 이발료야 내가 사장이니 디스카운트해준다고 해도..." "새앳긔 하군. 가 임마. 내가 살게. 항국이 얀 임마 어디 물 팔아 농사짓는 줄 아냐." "어얼씨구 그래두 꼴에 지 형이라구." "근데 이 자식이 요...꼴같잖은 다방냄비 하나 같고는..." 상국이 말하다 말고 아차 했다. 부아김에 내뱉은 말인데, 하고 보니 할 말이 아니었다. 석배 역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했지만 한국이 있는 한 참는 도리밖에 없었다. 분위기가 께름칙해지자 뭘 모르는 한국이 나섰다. "아녀, 있어야. 즘심값 없을 감니. 석배 동상이 앞장서. 그럴싸한 데 ㅇ어? 나 땜에 고생 많다든데. 다 들어 알구 있구먼." 석배의 얼굴이 가지껏 일그러졌다. 뭐여? 석배 동상...? 낸지랄...천하에 형할 놈이 없어 너 겉은 등신 중에도 상등신을 형으로 모시냐...! 4.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성질대로야 쥐어박아도 그냥 쥐어박을 게 아니라, 절구통에 찹쌀가루 이겨넣듯 다듬돌에 옥양목 소청 다림질하듯, 그렇게 짖이기고 패댄다 해도 속이 풀릴까 말까한 지경에, 차마 그리도 못할 일. 치미는 울화통을 억지로 내려앉히자니 그 속인들 오죽답답하고 뒤틀리겠는가. 언제고 한번은 제대로 걸려들 때가 있을 것이니, 그때 가서 네놈 입으로 성님 한번만 봐달란 소리가 반드시 나오게 되리라 벼르며, 놈의 말마따나 좀 그럴싸한 식당을 찾아가는 길인데, 추적추적 뒤따라오던 한국이란 놈 한다는 말이, "야아 석배 느그 집터가 시기는 원체 셨어. 느 어무이 그렇게 갔제 느그 아부지 뼈추림도 못했제 너까증 이러고 있응께 삼살방에 묻힌 꼴아녀. 석배 동상두 이잔 색시감 들여야 할 거 아니겄어." 였으니, 이거야말로 초상집에 들러 개 잡는 격이요 남의 귀한 집 초례청 앞에서 씨돼지 불알 까는 격이라. 차마 귓구멍이 열려 있으니 듣기는 했지만 숨이 턱턱 막혀 대답은 고사하고 쳐다볼 정나미마저 뚝 떨어지는 석배였다. 어디로 가노라는 말 한마디 없이 어금니를 욱신 깨문 채, 석배는 내처 걷고만 있었다. 어지간히 무더운 여름 한낮이었다. 시커먼 콜타르가 용암처럼 흘러내리는 도로 위에선 발목까지 빠진 차량들이 허우적거리며 매연과 경적을 신경질적으로 내뱉고 있었고, 호박잎처럼 어깨선이 축 늘어진 행인들은, 끌려가는 사도 바울을 전송이라도 하듯 땅바닥만을 고집스럽게 쳐다보고 있었다. 길게 늘어진 전신주의 전선이, 가닥 없는 외마디로 누군가를 애타게 부르짖고 있었으나, 그 부르는 소리는, 달 밝은 밤 개 짖는 소리보다도 못한 것이어서, 누구 하나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아주 지겹고 무더웠으며, 그 지루함과 무더위를 한 점 그늘도 없이 고스란히 받아든 성당의 첨탑이 오히려 무섭게 떨고 있는 한여름의 대낮이었다. 그늘로만 피해 숨던 석배가 딱 멈추어 선 곳은, 그 성당의 첨탑만이 빼꼼히 쳐다 보이는 외진 골목의 초입이었다. "됐다. 여기 암 데서나 한술 뜨고 가자." "뭐여...여ㄱ 밥집이 아니라 술집이 아니냐?" "밥집이고 술집이고 순대만 채우면 되는 것 아니 것어. 들어와. 한국이 쟈 말대루 그럴싸한 곳이니께." 그들이 막 도착한 곳은, 닭갈비집으로 석배의 말로는 춘천닭갈비의 원조라 했다. 해서 그런지 4면의 벽은 온통 '닥'자 항렬의 메뉴들로 너덜거리고 있었으니. 5. 닥갈비. 닥튀김. 닥도리탕. 닥똥집. 닥내장... 메뉴판을 읽어가던 상국이, 한마리 닭으로 저렇게나 많은 가짓수의 요리를 만들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던지 그저 입만 딱 벌리고 있었고, 그러한 상국의 뒤를 밟아가던 한국이 저도 뭘 좀 알겠다는 듯, 상국이 벌리고 있는 입의 두 배쯤 크기로 입을 헤 벌리고 있었으니, "히야... 일, 십, 백, 천...히야라...! 최소한 5천 원이구나. 저걸 다 하자믄 양계장 거덜나겠다, 응?" "그나저나 또 닭이냐?" 한국의 말엔 대꾸도 않은 채, 상국이 혼잣소리로 투덜거렸다. "왬마. 닭이 우때서. 내사 맛만 좋드라만." "말두 마라 닭이라면 있는 대로 닥닥 긁어서 쟈, 한국이 아가리에 디밀고 싶은 심정이다." 퉁퉁 부어오른 얼굴로 툴툴거리는 상국의 말을 거짓없이 보태면 이러했으니, 배를 잡고 널을 뛰어도 다 웃지 못할 일인 듯했다. "바로 어제다. 쟈 오던 날. 토실토실 살이 오를 대로 오른 토종닭이라 모가지를 비틀긴 좀 아깝긴 했지만, 놓아 기를 곳은 커녕 가둬둘 어리 한 채 ㅇ고보니 어쩌겠냐 쟈 입에다 다 디밀구 말 건 줄 뻔히 알면서두 잡었지.아니다. 잡을려고 했었지. 누군 누가 임마. 너두 알다시피 내가 잡겠냐 그렇다고 고매하신 느 형수님께서 닭모가지를 비틀겠냐. 쟈한테 ㅁ긴 게 실수였지. 뭐가 퍼드득! 하더니 소리가 좀 크냐. 생쑈를 했다. 생다지 쑈였어. 장닭이 그래 잘 나는 건, 야아 나두 첨이드라. 첨이여...! 이건 내집도 아니고 옆집 용마루 위에 척 올라서서 울어쌌는데, 하이고...민방공훈련 때 오종소리는 유도 아니여...구경꾼은 오죽이나 많았겠냐. 이건 입장료두 ㅇ는 쑈다 허니께 조막만한 애새끼부터 기동도 못하고 벌벌거리든 박씨네 안늙은이까지, 챙피 챙피 그런 챙피는 머리에 털나고 첨이다. 첨. 니눔 머리통이야 빠질 대로 빠져놔서 모르겠지만, 내 세상에... 닭털을 다 벗기고 나니 머리가 띵하고 허한게 내 머리털이 죄 다 빠진 느낌이드라." 허풍 빼어내고 거짓말 추려내고, 열 마디 중 한두 마디나 진담으로 주워담을까 말까 한 놈의 입심이긴 했지만, 어지간하긴 어지간했던가 보았다. "그래서...? 먹겠다는 거냐 뱉어 내겠다는 거냐. 시방." "새앳긔하군. 그렇단 얘기지. 고생만 죽실나게 하고 챙피만 톡톡하게 뒤집어썼지 처잡숫는 건 저분이 다 하셨다. 시켜! 암 거나. 승질 나는데 빼갈 한 병하구." "예앰병할 눔. 닭괴기 잡숫고 개트림하고 앉었네. 승질나는 걸루 말하면 나야말루 통닭이 아니라 달걀째 쟈 입에다 처넣고 싶은 심정이다. 넨 지랄..." 6. 그러나 듣고 있는 사람은 한국이었고, 둘이 무슨 말로 짖고 까불던 애시당초 번사(煩事)에 초연한 그였으니, "야야. 구만들 떠들고, 그럴싸헌 걸루 시켜 묵자. 시장들 하겠다 잉. 나두 야, 미리 나가 있어야 예의 아니겄어. 암케도 이발하자믄 기본시간은 가져야 할 기고." 석배와 상국이 하도 어이가 없던지 마주보고는 멋쩍게 씨익 웃었다. 곧이어 주문된 닭갈비와 소주 한 병이 그들 앞에 놓여졌다. "괜잖겠냐? 근무시간에." "짜식, 걱정은...요고 같군 까닥ㅇ다. 남이사 알콜을 마시든 알콜스톱을 마시든 운전을 하니까 음주운전이지. 나두 깍사질만 안함 밸일 ㅇ응께." "쟈 한국이 머린 어뜩하고?" "그 자슥? 꼴에 걱정은...따르기나 혀 임마. 뭔 지랄이 있어두 시간내 대령시켜 놓을 팅께." 술이 몇 순배 돌고 거나하게 취해갈 무렵, 갑자기 창밖이 소란스러워지더니 서넛의 무리가 점령군처럼 들이닥쳤다. 사내 하나에 계집이 셋이었다. 사내의 나이는 한 사십 조금 넘었을까. 부옇게 살이 오른 희멀건 허우대를 볼작시면, 닭갈비를 아예 제 앞에 갖다놓고는 게걸스럽게 뜯고 있는 한국을 빼어닮았는데, 마치 밑도 끝도 없이 딱 잘라진 채, 수반 위에 세워진 행운목을 연상케 했다. 그 뒤로 애완용 강아지 날뛰듯 촐랑거리며 따라붙고 있는 여자들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꽃이 하나, 한여름 장대비가 아니라 천둥. 번개. 낙뢰가 열흘에 열흘을 쏟아부어도 끄덕 않을 호박꽃이 또 하나, 맨뒤로 낯선 사람이라면 죄다 물어뜯을 기세로 독을 물고 있는 미모사꽃이 하나. 그렇게 뭉뚱그려 네 명이었으니, 요사이 유행하는 영화제목을 빌리자면 원 플러스 쓰리라고나 할까. "미스 장도 입장을 바꿔놓고 한번 따져보라고. 이건 징수가 아니라 몰수여 몰수...! 이 나라가 무슨 나라여. 사유재산을 바탕으로하여 자유경쟁에 기초한 시장경제의 원리가 지배하는 자본주의국가가 아니냐고. 정정당당히 경쟁한 끝에 얻은 과실을 기껏 한다는 게, 뭐여...부당이득? 이득이면 그냥 이득인 거여. 부당은 무신 얼어죽을...부당 이득금은 일백프로 국고환수라고? 좋다, 좋다고. 그럼 지눔들은 뭐냐 이 말이지. 우리네 겉은 장사꾼이야 부당이득인지 뭔지를 해도 발바닥에 털 날세라 뛰어다니기라도 했지 지놈들은 뭐냔 말이여. 펜대 하나 까딱 안하고 말 한마디로 억억 했잖여. 손바닥 한번 탁 치니까 억, 하드라고? 오죽이나 무서웠으면 몇만도 아니고 억, 소릴 내질렀을라고." 사내는 자리에 앉자마자 입에 침을 튀기고 있었다. "관 둡시다. 회장님이야 치고 뚜드릴 가슴이라도 있지. 우리네 같은 쫄띠기야 억장이 무너져내린 지가 석삼년은 지났을 거유. 사정이라고 안합디까. 사정." 7. "히잉. 사아정? 한여사도 그 모르는 소리. 아, 막말로 사정이야 기분 좋을 때면 누구나 다 하는 것이고. 내 말이 거짓말이나 대원군을 위시하여 쭈욱 따져 보시라고. 이날 이때껏 정권 바뀌고 사정 안 한 때가 있었나. 요는 사정이 잘못됐다는 얘기가 아니라, 그 서슬 퍼런 칼날에 맞아죽어야 할 놈들은 쌩쌩하고 우리네 같이 빽 없고 힘 없는 놈들 모가지나 죄이고 앉았으니 그게 통탄하다는 말씀이지. 보드라고 지금. 높은 곳에 앉았던 놈들은 꿀꺽꿀꺽한 돈이 몇백억 몇천억이래도 세금추징이 고작이고 그것두 귀찮으면 붕 띄워내보내곤 본인이 없는 고로 기소유예...이렇게 안합디까. 우리네 같은 놈들? 몇억이 아니라 단돈 몇만 원만 잘못 했어도 당장 구속입디다. 구속..." "글쎄, 그만 하시자니까요. 회장님은. 그런 걸 없앤다고 안합디요. 그러고 위에 있는 저들도 성인군자 아닌 담에야 성질 낼 만도 하더구만요. 정부수립 이래 무슨 청장이 구속되기는 처음이라느니, 또 하룻밤 새 떨어진 별만도 일곱 개니 여덟 개니 하던데...윗물부터 맑게 한다니 말갛게 되면 제 낯짝 제가 쳐다볼 날이 오겠지요." "쯧쯧...언니두 어지간히 순진하시구랴. 그걸 그래 고대루 다 믿다니...지들 윗대가리 모가지 몇 개 날아갔다구 화풀이 할 데가 없어 우리 겉은 영세민을 잡아족치우? 아무리 3년은 안 지냈다고는 해두 집 한채 있던 거, 크는 아이들에 노인네에 참다참다 못해 구멍가게라도 낼까하여 판 걸, 세무서 직원 뭐라는지 압디까. 전매차익이랍디다. 2천5백에 세금이 자그만치 7백이라우 7백... 밤낮으루 시멘트가루 퍼마시고 번, 다른 사람 밥 먹는다고 따라서 밥 먹으면 어느 세월에 내 집 장만하겠냐고 하면서...즘심을 라면으로 때우지 않았소, 우리 그 양반. 빈 속에 막걸리 한잔 마시고 현장에 나갔다 로다에 치어 허우적거리면서도 내 집 내 집하던, 그게 무슨 돈인 줄 아시우? 그 양반 목심값이우 목심값. 그래 거기다 전매차익이라고 칼질을 해대는 인간들이...세상 아무리 말개지면 뭘하우. 우리네 같은 송사린 차라리 흙탕물이 있어야 살 수 있는 거유." 이쑤시개 끝에 휴지를 말아가지곤 귀를 쑤시고 있던 상국이 석배를 쳐다봤다. "저치들 저거 무슨 소리냐? 부당이득이 어떻고 전매차익이 어떻고 씨부려대는데 뭔 말이냐?" "모르겠다 나두. 세금 얘긴가 본데 내봤어야 알지." "접때는 많다고 엄부렁 안 썼냐." "건 임마, 수도세니 전기세니 하는 없는 놈일수록 많이 나오는 거고. 저기 으르신네들 얘기하는 세금은 임마, 우리 겉은 놈은 내구 싶어두 못 내는 거여. 세금 낸기 칠백이라고 안허냐. 칠백만 원!" 8. 상국이 고개를 끄덕였고, 소주잔을 달싹거리던 석배가 눈을 질끈 감으며 홀짝 비워냈다. 상국이 그들을 슬쩍 건너다보았다. 그 눈빛은 아주 야멸스럽고도 표독스러워서 건드리기만 하면 당장이라도 물어뜯을 기세였다. 그러한 상국을 향해 석배가 턱짓으로 한국을 가리켰다. 시간 없으니 일어서자는 뜻이었다. 석배가 먼저 일어섰고, 한국이 뒤따랐다. 그들이 일어서는 것을 보면서 상국이 나란히 놓여진 겹잔을 거푸 들이켰다. 창자가 배배 뒤틀리는지 쓰리고 따가웠다. 닭갈비 한짝을 휴지로 말아들면서 상국이 다시 그들을 째려본다. 하들거리는 갈꽃의 눈길을 재빨리 피하며, 상국이 끙, 하는 신음소리를 뱉으며 일어섰다. 계산대 앞으로 걸어간 한국이 3만 원이란 말에 귀머거리인 양 '얼마유?'를 반복하고 있었고, 뒤에 서 있는 석배는 그런 한국을 고소하다는 듯 쳐다보고 있었으며, 막 구두 뒷굽을 사리고 있는 상국은 연신 컥컥거리고 있었다. 그럴 때였다. 회장이라고 불리우던 그 사내가 육중한 몸을 일으키더니, 그들 세 사람 앞에 떡 버티고 서는 게 아닌가. 아주 거만하고 음충스러웠으며, 교활하고 노회한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데서 이렇게 귀하신 분들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사회복지사업에 관여하고 있는 종합물산 대양주식회사 대표겸 대양복지원 원장입니다. 선생님들의 고명하신 지도편달을 바랍니다. 또한 어려운 사정에 처하셨을 땐 주저치 말고 찾아주십시오. 견마의 노를 다하겠습니다." 하면서 거만스럽게 악수를 청했는데, 맨앞에 서 있던 한국이 허리를 굽실거리며 황감하다는 듯 감히 마주 쳐다보지도 못하고 두 손을 내밀었다. 다시 그 사내는 손을 내밀려 했으나, 석배의 눈쌀이 위로 꼬였고 상국은 아예 독을 물고 있었으므로, 그는 내밀려던 손을 윗주머니 포켓으로 가져갔는데, 그 손짓이 아주 자연스러웠다. 밖으로 나온 그들의 손엔 각기 한 장씩의 딱지가 쥐어져 있었고, 그것들이 손바닥 위에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금박으로 된 명함이었다. 거기엔 유태중이라는 한자로 된 이름이 눈이 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상국이 쳐다보지도 않고 쪽쪽 찢어선 아무렇게나 뿌려댔다. 석배 역시 꼬깃꼬깃 접어서는 길바닥에 태기를 쳤는데, 한국만이 무슨 보증수표라도 되는 냥 바지 깊숙이 찔러 넣었다. 낮술에 취한 석배와 상국이 비틀거렸다. 상국이 석배의 허리를 잡고, 그보다 조금 큰 석배가 상국의 어깨를 걸치고 알아듣지도 못할 가락을 육자배기로 흥청거리며 길바닥을 헤집고 있었다. 9. 멀리 건너다 뵈는 성당의 첨탑만이 그런 그들을 고즈너기 바라다볼 뿐, 길 가는 행인들은 멀찌감치 떨어져 걷거나 비켜 지나갔다. "술이 과헌 것 같은디...괜잖것어?" 석배가 시퍼런 면도날을 들이대자 한국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눈을 질끈 감더니 부르르 진저리를 쳐댔다. "걱정마라 마. 이래 뵈도 이 바닥에서 잔뼈가 굵은 놈이다. 설마하니 오늘같이 경사스러운 날, 니 얼굴에 포야 뜨것냐. 아무 걱정말고 잠 한숨 푹 자고 있으면 깨워 줄팅께." 그러나 코까지 딩딩 골며 잠에 떨어진 상국이 오히려 야속했다. 이럴 때 곁에 있다가 한마디 거들어주면 얼마나 큰 힘이 될 것인가. 느물느물 웃으며 다가서는 석배의 입에선 술냄새가 풀풀 풍겨나오고 있었다. 참으로 난감했으나 그렇다고 일어날 수도 없는 일. "믿어...믿는다 야...다른 사람이면 몰러두...살살 잘 혀야 헌다.잠깐 실수하면...사알살 혀어." 한국의 목소리가 벌벌 떨렸다. 애처롭기까지 했지만, 그게 더 신이난 석배였다. 얼굴에 비누솔이 닿자 한여름이었음에도 소름이 돋는 듯했다. 아주 차갑고 서늘했으며 불쾌했다. "가만 있어 임마. 숨을 코루 쉬지 아가리루 쉬냐. 넨지랄...! 고만 푸푸거리고 어금니 깨무르라니까." 석배가 면도날을 들이대려다 말고 한국의 머리통을 쥐어박았다. 그러잖아도 손이 떨리는 석배였다. 술기운 탓도 있겠지만 이놈이 바로 자신의 애인과 맞선 볼 놈이라 생각하니 가슴이 떨리고 부아가 치밀었던 것이다. 거기다, 눈을 씻고 봐도 봐줄 곳이란 한군데도 없는 낮짝인데 주둥이를 당나발로 해가지곤 푸푸거리고 있었으니, 빨래하던 홀애비 개 뭐하는 꼴 보는 격이라 빨래방망이가 온전히 붙어날 리 없지 않은가. "알었응께. 살살혀어...살살." "살살이고 지랄이고 내가 알아서 한다니까 마! 어금니나 욱신 물고 있어." 석배가 소리를 빽, 지르자 한국이 움찔했고 그게 화근이었다. 얼굴을 찡그리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엉겁결에 눈을 떳던 것이다. 매움하니 쓰리고 아팠다. 눈꺼풀을 움적거릴수록 그 쓰라림은 더하여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래도 참아보자고 미련을 떨며 이리 꼬물거리고 저리 뒤채이다 비눗물이 콧구멍에까지 들어가고 말았으니, 비 맞은 과객 개울창에 빠진 격이라, 한마디로 죽을 지경이었다. 때는 바야흐로 석배의 면도날이 한국의 눈두덩위를 고속으로 주행 중이었다. "에엣취...! 엣취...!" 10. 어금니를 욱신 물고 있던 한국이 기어이 참지 못하고 재채기를 해댔다. 놀란 석배가 급브레이크를 걸긴 걸었으되, 어허야 이 일을 어찌할 것이냐. 한국이 무언가 따끔하다는 것을 느꼈을 때, 그리고 석배가 아차 하며 손을 떼었을 때, 그때는 이미 일이 벌어진 다음이어서, 한국의 눈꼬리에선 붉은 선혈이 지렁이처럼 꼬물거리며 배어나오고 있었다. "야야...한국이 너어...그만큼 가만 있어라 안 했냐. 누구 유치장 가는 꼴 볼려구 이러냐 시방." 석배가 면도기를 집어던지자, 영문도 모르는 한국은 그저 잘못했다고 비는 시늉이었다. "미안혀 야. 콧구녕에 거품이 들어가는 바람에...해두 그렇지 야. 면도는 혀야 되잖여." "면도오...? 거울이나 쳐다봐라 마. 그얼굴에 면도하게 생겼나. 꼬올 좋게 됐다. 다 니 탓인께 누구 원망할 거 ㅇ고, 꾹 누루고 있어. 휘딱 가서 반창고 사갖고 올팅께." 석배가 나가고 난 다음, 얼굴에 칙칙하니 묻어나는 게 아무래도 비누거품만은 아닌 듯하여 거울을 쳐다보는 한국, 어렵쇼. 이게 어찌된 일인가. 오른쪽 눈두덩이 보기좋게 베어져 있었고, 아무리 훌륭하신 의사 선생님께 소견을 물어도 전치 2주의 진단서는 거뜬히 끊을 자상이었으니. 참으로 실망스럽고 놀란 나머지 고만 울상이 되어 서 있는데, 흉칙하기로 말하면 호박벌이 왔다가도 날라갈 판이라. 북채를 잡고 쾡과리를 친들 흥이 날 리 있겠으며, 이화춘풍(梨花春風) 아래 두견주를 대령한들 살 맛이 나겠는가. 낙담천만하여 상국을 깨우니 그래도 피붙이라고 역성을 드는데, 포졸나리 증인 심문하는 격이더라. "그자식은 이래 놓군 어딜루 튕겨? 너두 그렇지 이 지경으루 맨들드룩 날 처잡수 하고 모가질 디밀고 있었냐, 그래. 전한국이 미련한 거야 진작에 알었지만, 김석배 이 자식이야 요...시간이 없네 업무가 바쁘네, 요 핑계 저 핑계 둘러대며 빼구댕이 치는 게 수상쩍더라 했더니...어딜루 튄다고 애기두 않더냐? 이게 뺑소니까지 쳤어." "튀긴 야. 반창고 사루 간댔어. 곧 올겨. 히히, 우떠냐 이 정도면 날씬허지. 석배 동상이 그래도 재주꾼은 재주꾼이여. 잠깐 새 이렇게 이발하는 걸 보문." 휴지를 둘둘 말아 눈두덩을 찍어누르고 있던 한국이 그래도 대견스럽다는 듯, 흐믓이 웃는데 저것두 형이라 생각하니 복장이 터질 노릇이었다. "재주? 고 따위루 깎을라면 눈 감고 백 명이라두 밀겠다. 우째 넌 애가 떨어져두 그렇게 떨어졌냐. 그게 어디 사람 대가리냐, 말대가리를 손질해도 그 작품은 더 나오겠다. 내 이 자식을 그냥...얼릉 야, 피나 닦어라. 그게 어디 그냥 피냐, 순전히 닭괴기만 먹구 맹글어진 알짜배기 핀겨. 우리 겉은 놈 평생에 한번 만들지 말지 한 거여 마. 내 이자식을 요..." 11. 그때 석배가 헐레벌떡 뛰어들었다. 혀를 빼물고 오뉴월 개처럼 헐떡이는 꼴이라니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다. 소파에 털썩 주저 앉아 눈알을 허옇게 치뜨고 있는 게 아무래도 지은 죄 때문만은 아닌 듯도 했다. "야 임마, 너 약 먹었냐. 쥐약을 먹으면 눈알부터 돌아가고, 제초제를 마시면 손발부터 틀어진다는데, 흐흣...그러고 보니 한꺼번에 다 들이켰는가 보구나. 잘 빠졌다 임마. 반창코는?" 석배란 놈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손만 훼훼 내젓고 있었으니. "새앳긔넌, 물 갖다주랴?" 상국이 턱을 고이며 그 앞에 쪼그려 앉자, 임종하는 늙은이 유언하듯 띄엄띄엄 해대는 말, "죽었댜...주, 죽었다는 겨..." "죽어? ...누가?" "엊그제 왜...칼국수집 안 있드나. 죽, 었다는 겨..." "내원. 복장이 터져서...글쎄 누가?" "쥔이...칼을 맞았는데 살 가망이 없다구." "그럼 살인이라 이 말이냐?" 석배가 허옇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상국은 별 재미 없다는 듯, "야, 임마 그래도 그렇지. 그 여자 죽은 거 하고 쟈 한국이 얼굴에 금 간 거 하고 어뜬 게 급하냐. 쟈는 당장에 선 보러 가야 돼 임아, 선! 상주보다 복재기가 더 슬피 운다는 말두 있긴 있드라만, 건 임마 초상집 얘기고 여긴 혼사집인겨 혼사. 니눔은 시방 외댕마치 나오는데 축문 읽는 것두 모자라 만가 부르고 있는겨. 허이구야, 그래두 이 자슥이 여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헐떡거리며 주저물러 앉아있는 석배였다. 놈을 아무리 닥달한다 해도 묘안이 있을 리는 없고, 해서 상국은 한국을 데리고 약속장소로 향했다. 근처 약방에 들러야 한다는 사실은 누구보다 한국이 먼저 챙겼다. 한국의 눈두덩이에 반창고를 찍어 바르며 상국이 큭큭거렸다. 아무리 위계된 맞선이라 해도 맞선은 맞선이었다. 그런데 새신랑이란 작자의 차림새를 두루두루 뜯어볼양이면, 웃지 않고는 배겨날 장사 없었으니, 가히 볼만 했다. 구두라고 신기는 신었으되 10년 전에 유행하던 뾰족 구두로 발에 맞지도 않았던지 걸을 때마다 삐그덕거렸고, 꼴에 바지는 유행을 좀 따르느라고 통바지를 걸쳤는데 워낙 맷집이 좋아 그런지 여자로 치면 판탈롱이 되어버렸고, 헐렁한 남방셔츠는 그런대로 볼만 했으나 단추구멍과 솔기에서 땟국물이 졸졸 흘러내렸다. 그러잖아도 웃어젖히면 영락없는 말대가리 저리 가라 할 판인데 이발이라고 한 것이 처삼촌 벌초하기 식이요, 그것도 모자라 눈언저리에 손바닥만한 반창고를 떠억 붙여놨으니, 갈데없는 화물칸의 짐짝이요, 그 짐짝도 그냥 짐짝이 아니라 에멜무지로 뒹숭그려 묶어놓은 감자포대에 광목으로 된 꼬리표를 붙여놓은 꼴이구나. 12. 그늘진 곳으로 슬슬 피해가던 한국이란 놈, 주제파악이 뭔지도 모를 일. 일껏 한다는 말 또한 가관이었으니, "석배 동상네 집이 신문쪼가리 많던데. 쪼매 갖고 올 걸 잘못했다 잉." "뭐여? 신문? 국문이면 몰라두 건 죄다 한문 투백이던데 니가 걸 어쩌게." "아녀 야. 읽을라고 하는 게 아니라. 그거라도 받쳐들면 쫌 들 탈 거 아녀. 어쪄 내 얼굴 새까맣쟈?" 이젠 웃음도 바닥이 났다. 그보다는, 쥐인지 양인지 하는 아가씨를 만날 일이 난감했다. 초면치레라고는 한 바이나, 참으로 볼썽사납게 헤어졌으니...하긴 그 바람에 점수 딴 건 석배 녀석이었고. 언감생심 미쁘게 봐준다는 것이 큰소리만 치고 나왔었으니. 무슨 말로 전 죄의 용서를 구한다...? 석배가 일러준 곳은 4거리 번화가였다. 영어로 워터밀이라고 씌어진 곳인데, 넌 영어가 짧으니 고개만 바짝 쳐들고 있다가 물레방아 그림만 나오면 뛰어들라고 했었다. 2층이라서 고개가 조금 아프긴 했지만 번화가 치고는 목이 좋은 곳이라 그런지 찾기는 수월했다. 상국이 조금 밝은 곳을 택해 앉았고, 한국이 그 곁에 단단히 붙었다. 잔뜩 주눅이 든 표정으로 눈알을 대록거리며 뻣뻣하게 앉아 있는 게, 5일장에 잡혀나왔던 촌닭 다음 장에 또 끌려나온 그런 격이었다. "왔다 그냥 가신 건 아니냐." "몇신데...? 딴 소린. 딱 맞구만. 세시 증각." "그래두 야. 최소헌 10분 전엔 와 있어야 하는 것인디. 그게 예의라며." "그, 쓸...잠자코 있기나 하라니까. 그보다두 너 명심해야 헌다. 무슨 일이 있어두 고분고분해야 할 것. 그리구...요 담이 중요헌겨. 오늘만 날인 것두 아니구. 거 뭣이냐. 원대한 장래, 그래 당장 오늘 일이 성사 안 된다구 낙담하거나 실망할 건 ㅇ는겨. 그리구 끝나면 곧바로 집이루 가는 거 잊지 말어. 젤루 궁금한 건 아부지 아니것냐." "명심허구 있어. 조기...문 앞으루 가 있을까.여긴 새까매서 들어오시두 모르겄다 야." 한국이 시계를 쳐다보았고, 덩달아 불안해지는 상국이었다. 나오기만 나오면 - 안 나오면 개망신 떠는 거지만 - 양은냄비에 죽이 끓든, 가마솥에 밥이 타든 인사치레만 시키곤 튀어나올 판이었다. 평일이라 그런지 실내는 한산했다. 신문지를 집어들던 상국이 저만치 휙 집어던졌다. 13. 잡놈의 새끼들... 집어든다는 게 사회면이었고, 거긴 아내를 살해하고 자식을 유기한, 천하에 개백장만도 못한 놈의 얼굴이 눈가림도 없이 박혀져 있었으니. 상국이 버릇처럼 가래침을 컥 울궈냈으나 뱉을 곳이 없었다. 죽은 시신에야 칼질을 하던 아무렇게나 내버리던 그야 대수인가. 명이 다하여 숨이 떨어지면 나무토막만도 못한 것. 하지만 산 목숨은 그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말 그대로 산 목숨이었다. 배가 고프다고, 보기가 싫다고, 아니면 귀찮다거나 자신에게 해를 끼친다고 해서 벌떡벌떡 살아 있는 것을 죽여도 된다면,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살아남을 것이 과연 몇이나 될까. 석가님이나 예수님이라 해도 나찰이나 마귀의 손에서 벗어나질 못할 것이니. 상국이 눈알을 부라리며 진저리를 쳤다. 저런 것들이 인간의 탈을 쓰다니... 세상이 아무리 공평하다 해도 이건 너무한 처사가 아닌가 말이다. 도저히 믿기지 않았고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째서 저러한 자들이 감히 내 얼굴과 같으며, 내가 왜 저놈들과 같아야 한단 말인가. 수박밭에 개똥참외도 제 얼굴을 달리 하는데 이건 무어냐 말이다. 그렇다면 나 역시도 저런 패륜을 저지를 가능성이 있으며, 참혹 잔인해질 수 있는 소질이 다분하다는 말 아닌가. 잔잔히 흐르는 음악이 제법 차분하고 분위기도 있었으나, 발장단을 맞춰가며 감상할 만큼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교양을 갖추지도 못했다. 그저 화딱지 나는 대로 냉수만 들이키고 있자니, 10분인가 지나서 문이 빼꼼히 열렸고, 바로 그녀였다. 상국이 한국의 허리를 쿡 찌르자 불 맞은 곰처럼 벌떡 일어나선 머리를 조아리는데 곁에서 보기에도 민망할 지경이었다. 상국이 따라 일어섰고, 자리를 권하기도 전에 그녀가 먼저 아는 체를 하며 인사를 건네왔다. "석배씨한테 부탁 받았습니다.형님 되신다구요." 상국이 머리를 긁적거리며 쓰게 웃었다. 그놈이 무슨 말로 이죽거렸을지는 보지 않아도 알만한 일, 구차하게 자리를 지키고 앉아 익지도 않을 떡시루에 선불이나 지피느니 그냥 일어서버릴까 하다간, 구치소에 영치된 놈마냥 퍼렇게 질려있는 한국의 눈빛과, 노부의 가랑가랑한 음성이 들리는 듯도 하여 내처 있기로 했다. "지난번엔...결례가 말이 아니었습니다. 승질이 워낙 기름종이라놔서...어쨌건 사과드리겠습니다." 상국이 지어보일 수 있는 예의는 다 차리고 나왔다. "아시다시피 이쪽은...석배 그친구 말대로입니다. 잘봐주십시오." 14. 상국이 물컵 속의 얼음을 우물거리며 다시 고개를 숙였고, 그녀는 그런 그가 무안스러웠던지 슬며시 외면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무엇이 그리 우습던지 줄창 웃음꽃을 달고 있었다. 한참 후에야 그것이 한국의 눈썹 위에 붙어있는 반창고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윷으로 가면 걸로 뛴다고 석배 그놈이 그러할 바엔, 이참에 녀석을 싸잡아 성토할까 하다간 차마 그리는 못 하고 씁쓰레 따라 웃는 상국이었다. 그렁그렁 앉아있을 뿐, 더 할 말도 없었다. 결말은 정해져 있었다. 1차시험을 버리면 2차시험이 기다리고 있는 수학능력시험도 아니었고, 2차시험마저 낭패를 봤다면 눈치작전이라도 있는, 그런 대학입학시험이 아니었다. 제반의 모든 상황은 조작되고 통제되어 있었다. 시뮬레이터 속에 갇혀있는 한국이었고, 어떠한 독립변수가 매개된다 하더라도 그 결과는 주어진 범위를 벗어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지질이도 못난놈. 그래, 못난것이야 어쩔 수 없다손 그렇게도 복이 없고 운이 없다니.따귀를 맞아도 가락지 낀 손에 맞을 일이고, 이왕이면 금가락지라 했거늘, 그 많고 많은 여자들을 놔두고 하필 다방아가씨에게 딱지를 맞아야 하다니... 그렇게 만든 장본인이 상국 자신이라고 생각하니 조금은 미안했고 죄책감이 없는 것도 아니었으나 어쩌겠는가, 노친네는 하루가 멀게 성화고 말미도 없이 찾아온 한국이었으니. 잘해보라고, 아무의 도움없이 그녀가 이곳에 왔듯이 너 또한 이곳을, 아무런 두려움이나 미련없이 멋지게 떠나가 보라고, 그리하여 세상은 혼자서도 너끈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깨우쳐보라고. 한국에게는 왼쪽눈을 찡긋해 보이며, 또 연실에게는 세 번째로 고개를 숙이며, 상국은 2층의 어둑신한 까페문을 나서고 있었다. 하늘은 여전히 푸르렀고 훅훅 찌는 더위는 그 기세를 숙일 줄 몰랐다. 상국이 걷고 있는 길은 아주 오래 전부터 트여있었던 듯, 보도블럭은 반질반질하게 닳아서 원래의 문양은 찾아볼 수도 없었고, 군데군데 깨지고 패여진 곳도 많아 자칫 잘못하면 실족할 법도 하건만 누구 하나 발을 헛디디거나 걸음새가 뒤틀리는 사람은 없었다. 다들 이곳에 오래도록 살아왔거나 이러한 길에 익숙한 듯 보였다. 그리고 그들은, 해가 넘어가자면 아직도 많은 시간이 남아 있건만 주변을 돌아보거나 옆사람의 동정을 살피는 따위의 곁눈질은 아예 없었고,시간 약속을 해놓고 그 시간을 놓친 사람들처럼 어디론가 부지런히들 걷고 있었다. 15. 건물 벽에 몸을 착 붙이고 선 상국이 주위를 둘러본다. 아주 낯설고 서먹서먹하고 불안하기조차 했으며, 왠지 모르게 자신이 자꾸만 졸아드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디든 가야 한다고. 그래서 무엇이든 해야 한다고. 그러나 갈 곳이 없었다. 집이라고 있었으나 귀가하기엔 이른 시간이었고, 아무데고 걸어가기엔 태양볕이 너무 따가왔으며 사람들이 귀찮았다. 할일이 없다는 것이 지루했고, 또 어디고 갈곳이 없다는 게 막막하긴 했지만 그보다 그를 견딜 수 없게 만드는 것은, 하루해가 턱없이 길다는 것이었고, 그 길고도 긴 그림자를 끌고가는 사람들이 지쳐 있기는 커녕 촌각이 아쉽다는 듯 다들 부지런히 그리고 생기가 넘쳐있는 모습으로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한 사실들을 확인하는 순간, 그는 모든 것들이 생소했고 그는 영원히 그래야 할 것처럼 더욱더 벽 가까이에 기대 섰다. 그렇게 멍청하게, 또는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상국의 앞으로 대여섯 명의 학생인 듯한 여자애들이 내달리고 있었는데, 마치 새떼를 연상케 했다. 그러고 보니 여름이었고, 방학 중일 거라 생각하니 자신도 저러한 때가 있기는 있었던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한동안 또 그렇게 서있어 보았으나 눈에 띄는 거라곤 여전히 서먹서먹하고 생소하기만한 것들 뿐이었다. 실개천이 흐르고 갯버들이 휘늘어진 고향. 너울거리는 산들바람만 불어도 어디론가 금방 날아가버릴 것만 같던, 실낱같이 흐르던 고향의 그 길을 따라갈 수 있을까. 따라가서, 지금은 남의집 애기엄마가 된 연순이도 만나고 종옥이도 만날 수 있을까... 용이 날아올라갔다는 냉미뜰. 지금은 타작마당이 되어버린 성황당. 앞산의 밀짚가리, 뒷산의 너구리집...손만 닿으면 그때의 그 웃음소리가 들려올 것도 같고 묻어둔 눈물이 작달비처럼 쏟아질 것도 같은, 고향... 우리 모두의 고향이 아니던가. 그런데도 저들은 저리도 바쁜 걸음걸이고 곁눈질 한번 없으니. 한국인 지금쯤 무슨 꼴로 있을까. 그는 어쩌면 고향을 지키는 이시대의 마지막 파수꾼인지도 모른다. 도와줄 일이 없다니. 날아올라갔다는 냉미뜰 그 용은 어디 있는 걸까. 비라도 내린다면 번개불의 저쪽 끝을 자세히 들여다 볼 것이라고. 천둥소리를 좀더 똑똑히 들어볼 참이라고, 상국은 그렇게 다짐하며 걷기 싫은 길이지만 안 걸을 수도 없어 남들처럼 그냥 걷기 시작했다. 그 걸음걸이는 너무도 맥이 없어, 마치 물살이 휩쓸리는 대로 기우뚱거리는 종이배와 같았다. 16. 시장은 언제나처럼 붐비고 있었다. 쌓아놓은 매물 앞에서 이것 저것 만져보기도 하고 고양이가 생선가게 훔쳐보듯 기웃거리기도 하고, 앞사람이 서있던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는 아무런 눈치나 표정도 없이 누군가 다가와서 그자리를 내놓으라고 할 때까지 하냥 기다리는 사람도 있었고...주인은 주인대로 손님은 손님대로 시장은 늘 그렇고 그런 사람들로 부비적거리고 있었으니. 어제도 그랬고 그제도 그랬고, 내일 역시도 그러할 것이다. 산이 있어 산에 간다는 사람들. 그들 또한 장이 있으니 장에 나온 사람들이었다. 무엇인가를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판다는 얘기였고, 무엇인가를 팔고 산다는 것에서의 그 무엇이란 바로 매력에 다름 아닐 것이고 보면 산이 있어 산에 오르는 사람들이나 장이 있어 장에 나온 사람들이나 같은내기가 아니겠는가. 그렇게 붐비는 시장터에서 조금 떨어진 길모퉁이에 이상스런 노인이 앉아 있었다. 머리가 하얗게 센 난쟁이였는데 백발만 아니라면 중학생 소년이라고 해도 곧이들을 정도로 몸집이 왜소했다. 돗자리를 깔고 목괴에 의지해 있는 노인은, 책을 읽고 있는지 아니면 졸고 있는지 상체를 연신 좌우로 일렁이고 있었다. 그 일렁이는 몸짓이 너무도 규칙적이어서 분수대에 놓인 방울시계를 연상케 했다. 목괴 위에는 불그죽죽하니 빛바랜 고서 몇 권이 놓여져 있고, 어찌나 손때가 묻었던지 위편을 세 번씩이나 갈아끼웠다는 공부자도 무색하리만큼 가느란 바람에도 갈피갈피 너풀거렸다. 그가 자리잡고 있는 곳은 우체국과, 이 지방 유일의 지방은행인 C은행이 마주하는 곳으로 늘상 사람들이 붐벼, 무엇인가를 팔기엔 아주 적당한 곳이었다. "허어...욕보십니다그려." 50은 넘었겠고 그렇다고 60으로 치자니 좀 뭣한 사내가 목괴 위에 놓여진 수정만세력을 흘끔거리며 돗자리 한쪽 끝을 자르고 들었다. 그러나 난쟁이 노인은 아예 관심도 없다는 듯 묵연히 눈을 감은 채 상체만 일렁이고 있었다. "장허십니다. 선풍도골이시오. 선자께서 어찌 자질구레한 세상잡사를 일일이 논하리요만, 불을 보고도 뜨거운 줄 모르는 몽매한이니 신수점 한수 봐주시구료." 사내가 코밑에까지 턱을 걸며 채근댔으나 난쟁이 노인은 감은 눈을 뜰 기색이 아니었다. "복채를 안 놓아 그러시는 모냥인데 전례를 따르리다. 얼마면 되겠소이까." 사내가 뒷주머니를 추석이자 그제서야 노인이 손을 내저었다. 17. "분복을 아는 자 길흉화복이 두 하늘에 실려있지 않음을 알고, 분수를 아는 자 부귀빈천이 다른 가지에 열려 있지 않음을 알거든. 추길피흉(趨吉避凶)을 따르고자 하나 너무 늦었네." 난쟁이 노인의 말이었고, 역시 눈은 감은 채로였다. "늦다니...어째서요?" "이미 태어났거든." "크흠..." "내생과 후손을 기약하여 장풍득수(藏風得水)의 장법(葬法)을 지켜 오덕구(五德丘)의 진혈(眞穴)에 묻히고자 하나 그 또한 늦었고." "어째서...?" "이미 죽었거든." "뭐요...!" 사내의 눈썹이 꿈틀 했다. "쯧쯔...썩돌을 수레에 실어 명당에 묻어본들 어찌 그것이 옥돌로 바뀌겠나. 명당을 바라기 전에 한줌의 선업을 쌓을 일이며, 한줌의 선을 쌓고자 하기 전에 한줌의 악업을 덜어낼 일이야. 한치만 높아도 산이요 한춤만 낮아도 물인, 일호의 어긋남도 없는 게 바로 세상의 이법이니...선종선과(善種善果) 사필귀정인 게야." "넨장할...행색이 범상치 않다 싶어 추켜줬더니 이거야 어디 원. 반귀머거리 귀동냥으로 사람 잡는 요설이나 나불거리고... 그럼 내가 썩돌이란 말이오!" "돌아 가시게. 썩돌도 그만 하면 축대바침은 될만하이. 정히나 원이라면 파자 정도야 짚어볼 일이." 순간 사내가 벌떡 일어섰다. 험상궂게 일그러진 얼굴이 당장이라도 대들 기세였다. "뭐여! 이늙은이가 듣자듣자 하니. 파자...? 그래 내가 성명 삼자나 뜯어발릴 그런 놈으로 보인단 말이오." 분을 못이겨 식식거리고 서있는 사내와는 달리 난쟁이 노인은 여전 눈을 감고 있었으며, 넉살좋게도 빙그레 웃기까지 하는 게 아닌가. 노인의, 그런 얼굴을 본 사내가 종주먹을 내두르며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나 노인은 실성한 듯 파안대소를 해대는 게 아닌가. "크허헛...! 썩돌은 썩돌이야, 불만 보면 폭삭 무너지는 썩돌...으허헛..." "에라잇! 잡놈의 난쟁이...! 털빠진 쥐새끼 같으니라고!" 사내가 더 이상은 못 참겠다는 듯, 개거품을 토해내며 냅다 오른발을 치켜 들었다. 주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말리고 어쩌고 할 새도 없었다. 사내의 발길이 막 목괴 위로 날아드는 순간이었다. 곧이어 콰당탕! 하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고, 사람들이 진저리를 치며 눈을 떴을 때, 그들은 그들의 눈을 의심하며 또 한번 소스라치게 놀라고 있었다. 18. 도저히 믿지 못할 일이 벌어지고 있었으니, 걷어차였어야 할 노인은 무슨 일이 있기라도 했었냐는 듯 태연히 앉아 있고, 오히려 기세 등등하던 사내가 수채구멍에 코를 박은 채 허우적거리고 있는 게 아닌가. 사람들이 귀신에 홀린 듯 눈을 부비고 있을 때, 이번엔 엉뚱한 웃음소리가 엉뚱한 곳에서 울려왔다. "흐흐흐, 꼴 좋수다. 이게 바로 밤새 안녕이란 거요. 댁의 발에 댁이 넘어진 것이니 원망할 것두 ㅇ고." 상국이었다. 그는 어느새 사내의 곁에 와 있었고, 한참을 비아냥거리듯 선웃음을 치고나더니 손에 들고 있던 나일론줄을 휙 집어던졌다. 사람들이 휴우,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비로소 사건의 대강이 짐작되었던 것이다. 난쟁이 노인이 앉아 있는 곳은 은행과 우체국의 중간쯤으로, 스포츠용품 매점이 자리잡고 있었다. 때가 때인지라 선전용 텐트를 쳐놓고 있었는데, 텐트도 그냥 텐트가 아니라 '최신형 방갈로식'이라는 선전문구가 새겨진 처마와, 베란다는 아니지만 어쨌건 그런 흉내를 낸 깔판이 달린, 보기 드물게 큰 대형 텐트였다. 상국이 넘어진 텐트의 지주대를 세우자니 사내가 일어났고, 그제서야 노인이 눈을 떳다. 노인은 다름아닌 이백이니 이로니, 또는 이호니 하며 여러 이름으로 불리어지고 있는, 백발동안의 난쟁이 노인이었다. 노인의 눈빛이 형형히 빛났다. 벌레 씹은 얼굴로 상국을 노려보던 사내가 이로의 눈빛과 딱 맞닥뜨리자 지레 흠칫했다. 그러나 그런 수모를 당하고 가만 있을 사내가 아니었다. 상국을 위아래 쓰윽 훑어보더니, "이제보니 이것들 협잡배 아녀. 도대체 당신이 뭔데 남의일에 참견이야 어! 저 쥐새끼대신 한번 해보겠다 이거지 으! 좋아 좋다고, 어디..." 하면서 다짜고짜 싸움부터 걸어왔다. 맥없이 나가떨어진 분풀이도 있었겠지만, 상국이 워낙 왜소했고, 한방이면 거뜬히 날려보낼 성싶었던가 보았다. 하지만 호락호락 당할 상국이 아니었다. 이유없이 독이 올라 있는 그였다. 방금 전만 해도 그랬다. 사실 그와는 무관한 일이었고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결코 무방비상태로 당하고 있는 노인이 안쓰러워서가 아니었다. 완전한 사회 - 누군가의 말처럼 공포와 기아와 전쟁과 그리고 모든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운, 그런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선각도 아니었다. 단지 그는, 사내처럼 어느놈에겐가 한방 얻어맞은 기분이었고, 그게 다였다. 대상이 누구건, 싸워서 이기건 지건 그런 게 문제가 아니었다. 당장에 칼을 들이댄다 해도 외눈하나 까닥 않을 뱃심이었다. 19. 천부적인 싸움꾼이래서도 배포가 커서도 아니었다. 그의 기분이 잔뜩 뒤틀려져 있다는 것. 무엇이고 박살이 나도록 부셔져야 한다는 것. 그게 전부였고,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랬다. 한국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 때부터, 허리에서 뚝 소리가 났을 때부터, 아니 그 이전, 출신이 탐탁치 않다는 이유만으로 아내와의 결혼을 반대하던 아버지와 한바탕 싸우고 난 뒤부터, 아니다 그보다 더 그 이전, 고입시험 불합격이라는 것이 고작 값싼 여인숙 방때문이었다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사실을 알았을 때부터, 어쩌면 그보다 더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겠다. 어쨌건 벙어리 냉가슴 앓듯 꾹꾹 눌러오던 화증이었는데, 속도 모르고 덤벼드는 사내놈을 대하고 나자 분통부터 터졌고, 화전닭이 지내 잡아먹 듯 도야지 멱을 따듯, 시비곡직 가릴 것도 없이 요절을 내려는 상국이었다. 종주먹을 내두르며 달려오는 사내와, 입에 거품을 문 채 '개애 샛긔!' 소리를 연발하며 오기만 오라고 투그리고 있는 상국이 막 맞닥뜨려 일대 난투극이 벌어지려는 순간, 어디선가 쩌렁쩌렁한 호령 소리가 터져나오는 게 아닌가. "관들 두시게! 금수도 맹으로는 다투지 않는 법이어늘... 본좌의 불찰이 자심하이. 선객께서는 봉욕이라 생각지 마시고 액땜했다고 치시게. 크허헛...!" 난데없는 광소에 그들은 멈칫했고, 곧이어 그것이 난쟁이 이로라는 것을 알자, 마치 입이라도 맞춘 듯, "예엠병할 놈의 늙은이...!" "어얼씨구, 밸눔의 개뼉다귀가..." 하면서 둘이 동시에 노인을 꼬나보았다. "한 치도 찌울도 틀도 않는 푸석돌이야...쯧쯧..." 이로가 그들을 향해 오라는 손짓을 했고, 그러잖아도 뭔 수를 내려던 그들이었던지라 서슴없이 다가 갔다. "들을 지어다. 쟁기로 땅을 갈아엎고 제방으로 물길을 막고 물로써 불을 끄되, 불이 있어야만 도가니를 달구어 금을 녹이고, 또 도끼도 만들고 낫도 만들고 하여 나무를 다듬질하는 것은 우리네 인간들의 용사니, 이를 일러 이기라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은 인간의 탐욕에서 비롯된 것으로 역행이야...말세의 단초에 불과할 뿐." "미친 늙은이 객소리하군." 주문을 외우듯 주절거리는 이백의 말에 상국이 가래침을 컥 뱉어냈고, "볼지어다. 태초에 물이 있어 숲이 우거지고 숲이 우거지다 보니 불이 일어나는 것이니, 어찌 그뿐이랴. 탄 것은 재가 되어 흙을 생하니, 바로 대지라. 토는 금을 생하고 금, 수생하니, 상생의 이법이라." 20. "미쳐두 단단히 미쳤군. 넨 지랄...저런 미친 늙은이에게 뭐를 봐달라고 한 내 눈이 삐었지. 헤이잉...!" 따지고 물을 가치도 못된다는 듯, 사내가 휑하니 자리를 떳다. "일월이 궤를 달리하여 음양을 세우고 탐랑, 거문, 녹존이니 하는 구성(九星)이 열두신궁을 보우하여 팔문(八門)을 지킨다 함은 천도(天道)요, 일년을 이분사립(二分四立)하니,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오고...어찌 한치의 차이가 남이며 일호의 어긋남이 있겠는가, 오행이라 하고 이를 일러 지도(地道)라 하니 참으로 오묘할사 그 헤아림을 뉘라서 측량하리오." "시방 뭐하는 거유? 내야 원래가 가방끈이 짧은 놈이니 쥐켜 줘도 뭐가 뭔지 모르긴 마찬가지겠으나. 해도 그렇지 이건, 설법도 아니고 염불도 아니고, 장단이나 맞으면 노랫가락이라고나 한다지만 그도 아니고. 뭐하시우 시방...?" 상국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여차직하면 늙은이고 난쟁이고 볼 것 없다는 투였다. 그러나 난쟁이 이로는 멀어져가는 사내의 뒷모습을 아주 득의롭게 쳐다볼 뿐 상국에겐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였다. "물이 물을 만나면 그 세가 도도해지고 불이 불을 만나면 밝기 또한 궁궁(弓弓)해지는 것이 상도일세. 헌데도 젊은인 어찌하여 사람 대하기를 뱀 보듯 하시는가. 쯔읏...고약한 버릇일래. 고치지 못하면 화를 당할 사. 동남으로 가보시게." "뭐요? 동남...?" "그리하이. 무심히 던진 돌팔매에 담장을 넘보던 승냥이를 쫓았거든. 노공(努功)일세. 빈좌를 후히 봐준 덕이고." "동남? 동남이라...대체 동남이 뭐유?" 상국이 누그러졌고, 이호가 백발이 너풀거리도록 또 웃어제켰다. "발길 닿는 대로 동남방으로 가보면 아실 일이. 크허헛...!" "미이친...이 뜨거운 땡볕에 노인장이나 가보슈! 내원." "너무 멀리는 가지 마시게. 그나마 신시를 놓치면 다시 얻기 어려울 일. 다음에 올 땐 말 한마리 데리고 와야 할 게야...크허헛...!" 상국이 좀 전의 사내처럼 휘적휘적 자리를 떳다. 눈이 있으면 보라는 듯이 이로 노인의 면전을 지나쳐 왔는데, 동남쪽과는 정반대인 자신의 집을 향해서였다. 난쟁이 이로 앞을 호기롭게 지나오긴 했으나, 길은 멀었고 뜻은 없었다. 지나온 길을 뒷굽으로 사리며 다잡아보았으나 길은 여전히 끝간데를 몰랐다.이 길이 시작된 곳은 어디일까. 이길을 따라 곧장 간다면 어디가 나올까. 21. 뒤를 돌아다 본다. 없다. 방약무인하고 호기탕탕하던 백발 난쟁이. 역시 없다. 푸독사처럼 고개를 곧추 세우고 달겨들던 사내도 운집해 있던 행인들도, 다들 어디로 갔는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래... 상국이 발길을 돌렸다. 그들은 여전히 거기 있을 것이다. 그들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상국 자신이 걸어왔고, 그만큼 그들과 멀어진 것이다. 모퉁이를 돌아서 난쟁이 노인이 앉아있는, 그러니까 우체국 출입계단이 불쑥 튀어나온 곳까지 되밟아 가던 상국이 흠칫 몸을 움츠리더니, 블럭과 블럭 틈새로 졸빗이 뚫린 곁길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 그리곤 넋이 나간 듯,얼마 동안을 무춤히 서있는 게 아닌가. 그는 난쟁이 이로의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동남방. 그래 분명 동남방이라고 했었다. 이제 길은 세 가닥으로 좁혀져 있었다. 백발 난쟁이에게 다시 가느냐, 집으로 가느냐, 아니면 그자의 말마따나 동남방으로 가느냐. 집으로 가자니 되돌아올 정도로 딱히 할일도 없고 너무나 이른 시간이다. 그렇다고 늙은이에게 다시 가자니 자존심이 허락치 않는다. 그렇다면, 그래. 상국이 고개를 들더니 별자리를 가늠했다. 별은 눈에 띄지 않았으나, 별자리는 쟁쟁했다. 그가 발걸음을 휘적거렸고, 동남방이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물론 길을 나설 때는 몰랐다. 그는 그저 이쪽으로 가면 동남쪽이겠거니 하며 길을 걷고 있었는데, 미리 그가 올 것을 알고나 있었던 듯,판자울 하나 손수레 한대까지 그의 길을 비켜서고 있었다. 이쯤 가면 길이 막혔겠지 싶다가도 고만한 길이 또 뚫려 있었고, 변두리의 자드락길인데도 영락없이 동남쪽으로 내리뻗히고 있었다. 방향잡기가 애매한 갈림길이 없는 것도 아니었으나 어림잡아 걷다보면 종당엔 외길이 나타났고, 신기하게도 동남방이었다. 지겹게도 무더운 한여름 오후. 상국은, 낙타처럼 그저 걷기만 했다. 땀이 비 오듯 한다는 말은 너무 흔한 말이어서 실감이 나지 않을지 모르나, 어쨌던 그는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었고, 당장에 주저물러 앉을 듯 비칠거리면서도 꾸역꾸역 걷고 있었다. 처음엔 이상스런 난쟁이의 말때문에 걷게 되었고, 걷다보니 난쟁이의 말이 정말로 이상해졌고, 그 이상한 분위기가 길 전체로 번지면서 어렴풋하고도 모호한, 그러나 쉽사리 떨쳐낼 수 없는 어떤 믿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22. 그러한 믿음은 누구에게나 다 있고, 하루에도 몇 번씩 잡힐 듯 말 듯했던 것이어서 상국으로선 생소하거나 어색하지도 않았고, 당혹스럽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 믿음, 다시말해서 어렴풋하지만 분명히 손아귀에 잡혀들 것 같은 그것은, 너무나 포근하고 부드러워서 숨겨진 어머니의 품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마음을 편하게 해 주었고, 그래서 그는 걷기를 그치지 않았다. 철로와 도로가 엇갈리는 곳까지 왔을 때, 상국은 거대한 경이를 발견했다. 그것은 너무도 오랫만에 만나는 희열이어서, 줄줄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닦아낼 생각도 않고 등신처럼 멀겋게 턱을 놓고 서 있어야 했다. 아! 얼마만에 만나보는 땀냄새인가. 그냥 걷기만 하면 얻을 수 있는 땀방울이 아니었다. 끌방망이가 탕탕거리고 허튼톱날이 통나무와 맞물려 요란하게 긍성거린다. 다림추를 올려다 보면서 '10전(센티미터)이요, 20전이요!' 하면서 외치는 소리가 듣기에도 낭낭했다. 무병을 앓던 박수무당이 굿판에 들어섰을 때처럼 상국의 어깨가 저절로 흥청거려졌다. 그의 앞에는 거대하고도 웅장한 건축공사장이 놓여져 있었는데, 마치 커다란 거북등을 연상케 했다. 행운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었으니, 거북이란 짐승이 십장생이라고 하는 영물이라서 그랬다던가. 용왕님의 승(丞)이요 부(傅)라서 그렇다던가. 어쨌건 그가 거북등처럼 생긴 실내운동장의 건축공사장에 들어섰을 때, 당신이 오기를 오래 전부터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현장감독쯤으로 보이는 사내가 어슬렁거리며 나오더니 어떻게 왔느냐고 물었고, 그는 그냥 당신이 새와(반장)냐고 묻자 그는 그렇다고 대답하면서, 어떻게 왔느냐고 다시 물었고, 상국이 이번에는 좀 진지한 표정으로 목공일자리 한군데를 구한다고 하자, 그 사내가 펄쩍 뛸듯이 좋아하면서 그러잖아도 당신 같은 사람을 진작부터 구하는 중이었노라고 하는 게 아닌가. 날일도 좋고 모작도 좋으니 하는 데까지 나와서 일 해보라는, 서울 본사에서 내려왔다는 반장의 말을 챙겨넣고 나니, 일하던 인부들이 우르르 몰려나오며 신고주라며 주발을 돌리는 게 아닌가. 목도 컬컬하겠다 그늘도 졌겠다, 거기에다 일자리까지 구했으니 기분은 한껏 좋아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상국이 무슨 노래인가 계속 흥얼거렸는데, 그 노래는 그가 군대 들어가기 며칠 전에 배운 노래로 '당신에게선 꽃냄새가 나네요. 잠자는 나를 깨우고 가네요...'하는 식의 노랫말로 불려지던 유행가였다. 그 노래가 유행하덛 것이 20여 년 전이건만 그에겐 아직도 유행가로 남아 있었다. 머리 나쁜 중이 나무애비타불이나 외우고, 되먹지 못한 전도목 할래누나야나 외친다고 전상국이 꼭 그짝이었으니, 술만 거나하게 취했다 하면 그 노래였는데 당신이 등신으로 바뀌거나 빙신으로 바뀌는 것은 그렇다치고, 꽃냄새가 분냄새 분냄새 하다가 기어이 분(糞)냄새로 넘어가곤 했으니. 23. 지금도 막 '당신에게선...'을 이목룡이 심청이를 부르듯 또 로미오가 줄리엣을 부르듯, 아주 애타는 심정으로 대여섯 번을 복창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 다음 말이 꽃냄새인지 분냄새인지 헷갈려 고만 '분냄새가 나네요오...!'하고는 장닭처럼 울어대는데 다른 곳도 아니고 바로 제집 마당의 대문간이었으니. "여보옷...! 당신...당신 지금 뭐라 그랬어요?!" 눈을 지그시 감고는 하량없이 흐느적거리던 상국이 퍼뜩 정신을 차렸을 땐, 아뿔싸 이 일을 어찌한다? 가물가물한 정신을 수습하여 고개를 바짝 쳐들고 보니 고매하시고 지엄하신 내자께서 떠억 버티고 계신 것 아닌가. 입 안에 가득한 똥냄새를 뱉어내지도 삼켜버리지도 못하고 그냥 우물거리며, "어이쿠, 이런. 미선이 모친께서 나와 계신 줄도 모르고...크허...화가 나셔도 단단히 나셨겠는 걸." 하며 넉넉한 웃음까지 곁들여 가며 능청을 떨긴 했으나, "하이구야 기가 막혀...당신 입으루 누구한테서 뭔 냄새가 난다고 동네방네 떠들구 다녔잖아욧! 지그음!" 얼굴색이 푸르죽죽 죽어 있는 걸로 보아 쉽사리 걷혀질 분위기가 아니었다. "거 좀 트집 줌 잡지 말어. 막걸리 한사발 얻어 마신 김에 기분도 삼삼하겠다 노래 한 곡 부른 걸 가지고. 그것까지 당신 허락 맡으란 말여 뭐여." 상국이 전조를 싹 무시하며 뒤집기 작전으로 나오는데, 은근한 것 같으면서도 말 속엔 사뭇 가시가 돋혀 있었다. 하지만 그 정도에 녹녹히 물러날 은숙이 아닌 성 싶었다. "뭐예요? 기분? 남은 허파가 뒤집어져 말이 안 나올 지경인데 기분이 좋다구요! 그렇게 좋은 기분이면 아예 술독에 들어앉아 있지 냄새 나는 집구석까지 뭘하루 찾아와요." "근데 이 여자가 요오...! 긋두 시방 말이라고 떠벌리는 거여 뭐여. 엉! 술 한잔 먹은 김에 생각없이 불러본 거라고 그만큼 얘길 해도." 여차직하면 주먹이라도 휘두를 판국이었다. 그러나 은숙 역시도 이참에 아주 끝을 볼 셈인가 보았다. "분냄샌지 뭔 냄샌지 하는 유행가 땜에 이러는 줄 알아요 지금. 그 잘나신 당신 형님이란 분...,그래 잘 하셨수. 삼삼한 기분인 줄 진작에 몰라드려 낙심천만이겠구랴. 이젠 두구두구 모시게 됐으니 어지간히 좋으시겠수." "뭐여...! 형? 낸지랄...!" 상국이 입에 물고 있던 똥냄새를 기어이 푸우푸우 토해내고 있겠다. 24. "시방 뭐라 그랬어? 한국이... 한국이, 그 아가 우떻다고?" "하이고, 아잔 쑈오도 잘 하셔. 내 눈이 멀었지. 뭔 복에 십만 원씩이나 되는 목돈이 처억 굴러 들어오더라니. 흐응! 그래 놓군 뭐어? 수고 했응께 가용에 보태 쓰라고." "니기미. 내원, 복장 터져서...뭔 말이냐니까 시방. 한국이 그 자슥이 뭘 어쨌다고? 말을 해야 할 거 아녀 말을!" 상국이 더는 못 참겠던지 소리를 벽력같이 꽥 내지르자, 선무당 귀신 잡는데 어릿간에 망아지만 놀래 자빠지더라고, 정작 겁을 먹어야 할 은숙은 말짱한데 엉뚱하게도 문틈으로 엿보고 있던 세무서 총각이 화들짝 문을 닫아걸고 있었다. 미리 다 짜놓고 다 알면서 뭘 그러느냐는, 꼭 메기 낚시에 걸린 피래미처럼 날뛰는 은숙의 말은 너무도 엉뚱하고 기가 막혀 아무리 믿을래야 믿을 수가 없었다. "설마...말 같지두 않은 소리... 잘못 들은 거겠지. 집이루 간다는 걸 이리루 온다는 걸루," "관둬요. 관둬! 여적지 물레방아간인가 떡방아간인가에 붙어 있다가 까펜지 또랑인지로 간다고 합디다. 그래두 내 말이 그짓말루 들린담 한번 찾아가 보시구랴. 재주 좋고 수단 좋은 형님이시니 장하시겠수." "근데 거어! 말끝마다 형님, 형님! 고만 집어치울 수 없어! 그 자식이야 천지를 모르니 그렇다치고. 그년두 그렇지 그래. 이적지 붙잡고 앉아 뭘 어쩌겠다는 거야. 내, 돌배 이 자식을 요오..." 술기운이 싹 가시는 상국이었다. 아귀가 맞지 않아도 이건 터무니없었다. 만만한 게 홍어 뭐라고 석배를 들먹이긴 했지만 석배 저놈이야 요강깨고 오물 뒤집어쓰는 격이니 탓할 일도 못되고. "방앗간에 가서 떡쌀을 일구든 또랑에 앉아서 가재를 잡든, 한번 나갔으면 고만이지. 온다간다 인사까지 다하고...단칸방에 세들어 사는 거 뻔히 알면서." 듣고보니 은숙을 나무랄 일만도 아닌 듯했다. 석배에게 전화라도 걸어볼까 하는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냥 있기로 했다. 이 너른 시내바닥에 카페나 레스토랑이 한두 개가 있는 것도 아니요, 맞선이라고 붙여줄 때는 언제고 이제와서 뭘 어쩌겠느냐 말이다. 내일부터 일하러 나가게 됐다는 말은 꺼내보지도 못하고 애ㄲ은 담배개비만 축내고 있자니 난데없는 전화였다. "자요! 그 잘나신 형님이신 모양이유." 은숙이 뿌리듯 휙 집어던지는 수화기를 감아쥔 상국이 또한 편할 리 있겠는가. "야아! 너, 한국이냐? 얼릉 집이 안 가구...너 거긔 무신 또랑이라매." 25. "얌마 난데. 도대체가 어떻게 된 거야! 한국이 내 이 자식 걷어들리기만 하면...너두 그렇지 임마! 다 알구 있으면서 전화 한통 없었냐. 나쁜 자식!" 전화를 걸어온 건 한국이 아니라 석배였다. 하긴 궁금하고 답답한 걸로 따지면 그보다 더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니. "난 또 누구라구. 돌배 너냐? 너 그러잖아두 잘 됐다. 그 인간들 어디 있다는 거냐? 집이 가자마자 전화한다는 놈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전화는 커녕..." "얼씨구...그 나물에 그 밥이라더니. 너 임마, 솔직히 말 못혀! 어디 레스토랑에 있다며? 빨리 대 임마! 내 이 자식을 붙잡기만 해봐라. 상국이 니 입으루 방금 어디라 안 했냐." 석배의 말소리가 거칠어지자 상국이 시침을 딱 떼고 나왔다. "짜아식 승질하군. 몰러 임마. 나두 하두 답답해서 해본 소리다. 갔겠지, 설마 여적지 있겠냐. 돌배 니눔한테야 뜯어먹을 게 있으니 따라붙지, 한국이 갸한테야 쌍방울 두 쪽이 가진데 곁눈질이라도 주겠냐. 내가 걱정하는 건 그 잘난 니 애인이 아니라 한국이 갸가 집이루 가는 차나 바루 탔는지 그게 걱정이다. 끊어 임마. 나두 누루실루 전화 걸어봐야 돼. 별일 있으면 연락 넣을팅께 너두 쥐인지 고양인지나 잘 챙겨봐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참으로 난감했다. 뱁새눈으로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아내의 눈길을 슬그머니 돌려놓은 채 상국이 벌렁 드러누웠으나 딱히 손을 써볼 도리가 없었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고, 갈바람에 나부끼는 고추잠자리는 잡을 수 있어도 북통만한 여자 허리채는 잡을 수 없다더니, 이건 도대체가 말이나 되는가 말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말도 되지 않는 말이 버젓이 횡행하고 믿지 못할 일들이 너무도 비일비재하여 범인의 눈으로는 도대체가 예단할 수 없는 게 작금의 현실 아니던가. 누르실로 전화를 넣어봤지만 노인이 받았고, 그 말은 석배와 다를 게 없었다. 잘 있느냐는 말에 잘 있다고 하자 노인은, 농사일이랑 걱정 말고 요령있고 신중허니 거동혀서 이번 일만은 실패없이 하라는 당부였다. 기다리다 못한 상국이 박씨를 찾았고 둘이 권커니 자커니 하고 있을 때, 세무서 총각이 가세했다. 박씨네가 담궈놓은 앵두술이 바닥이 났고, 그만 마시자는 박씨를 말려가며 청주 한씨 32대손이라고 하는 세무서 총각이 구멍가게를 찾아나서려고 할 때였다. 그래, 까짓놈의 세상. 울어도 한세상, 웃어도 한세상인데 기왕이면 웃어나 보자고 꼬부라진 혀로 흐흐덕거리고 있자니, 언제 와 있던지 어둑신한 마당 한복판에 장승처럼 버티고 서 있는 사람이 있지 않은가. 26. 취기가 좀 덜 오른 박씨가 '뉘기여 누구!'를 연발했지만 그자는 장승처럼 서 있기만 했다. 참다 못한 박씨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선 댓돌로 내려서려 하자 그제서야, "동상...동상, 여그 있는겨. 한참을 찾았구만." 하는 게 아닌가. 자세히 쳐다볼 것도 없이, 눈썹 위에 허연 반창고를 떠억 붙이고 있는, 바로 한국이었다. "얌마... 한국이 너어...! 집이루 곧장 가라구 안 했냐. 시방 아부지가 울매나 노심초사허시는 줄 알기나 하고." "알구 있어야." "안다는 놈이 그 모양이냐. 가자 어쨌건, 집이루 가서 얘기허자. 집이루." 그들이 방안으로 들어서자 방바닥에 엎드려 있던 미선이 일어났다. 베갯머리엔 책이 놓여져 있었는데, 만화책이었다. '너 이년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맨날 요따우 만화책만 들여다볼 것이냐'고 호통이라도 칠까 하다간 따라 들어서는 한국이 있었고, 무엇보다 오늘 밤엔 또 미선의 방을 빌려야 할 입장이므로 참기로 했다. 저도 그걸 아는지 만화책을 거두는 손놀림이 태연했고, 아주 못마땅한 얼굴로 한국을 흘끔거렸다. 얼굴이 그러하듯, 성격도 지 애미를 닮아가는 모양이다. "니 엄마는 어디 갔냐?" "몰르겠어요. 그냥 잠깐 다녀 온다구..." "알었다. 넌 니방에 가 있고. 한국이 너 저녁은?" "먹었어. 크다만 장떡 겉은 게 디게 맛있드라 야." 상국이 같잖다는 듯,한국을 꼬나 보았다. 한국이 흐물거리며 웃었고, 기분이 썩 좋아 보였다. "그럼 너어... 느 지수가 한 말, 거 참말이냐? 여즉 그 여자와 같이 있었다는 게." 한국이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외려 그런 질문을 하는 상국이 이상하다는 표정이었다. "그 분 말이 내가 편하대. 츰엔 겁두 나구 떨리기두 하구 해서 저녁은 요 담에 먹자구 했는데두 대구 가자는 거여. 자기가 산다면서. 따라 가길 잘 했어. 분위기 있드라야." "분위기? 넨지랄...뭘 좀 알구나 덤벙거려라. 장떡인지 개피떡인지가 문제가 아니라, 요는 그 여자가 널 증말로 좋아하느냐가 중요한 겨. 저녁 한끼가 문제가 아니라 안허냐. 등 긁어주는 척하며 간 내먹는 게 요즘 여자들인 겨." "그럴 거 같지는 않드라. 이담에 또 만날 수 있느냐구 물었드니." "물었더니?" "다음에 또 연락 주겠다고, 기다리래. 자기도 내가 좋다며. 히히...어뗘, 이만함 성공이쟈?" 상국이 눈을 질끈 감더니 한숨을 푹 쉬었다. 27. 알 만했다. 측은한 눈으로 한국을 쳐다보다 그것도 지겨워 술이라도 한잔 할랴느냐고 물었더니, 한국이 손을 훼훼 내저으며, 그녀가 젤루 싫어하는 사람이 술먹고 주정부리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나. 그 정도였으니, 더는 얘기해봐야 씨도 안 먹힐 것이고, 내일부터는 공사장에도 나가봐야 할 것이고 해서, 한국을 미선의 방으로 올려보내고 나니 어딘가 허전했다. 아내가 없음이었다. 그녀는 며칠 전부터 밤 외출이 부쩍 늘었고, 화장기가 날이 갈수록 짙어져갔다. 들어오기만 들어오면 다리몽둥일 분질러 놓던지 혼쭐이 나도록 따져야겠다고 벼르다가도 막상 대하고 나면 허리통증이 심한 것 같았고, 색색거리고 드러눕는 그녀를 면목없이 따돌리고 마는 상국이었다. 잠이 오지 않았다. 덜 떨어진, 어쩐지 찜찜하기만 한 한국의 맞선이 그렇고, 아내의 외출이 신경 쓰였고, 무엇보다 한국이 맞선 본 대상자가 석배의 애인이라는 데 이르자 무언가 불길한 예감이 가슴을 짖눌러왔다. 세밀하게 처신하지 못한 자신이 후회됐으나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러나 그를 더욱 잠못들게 하는 것이 있었으니 한국의 잠버릇이었다. 잠이 좀 들 만하면 한국은 부시시 일어나선 화장실을 찾았고, 그러길 하룻밤 새 한두 번도 아니었다. 잠이 들어선 가위 눌린 놈마냥 아이구구! 하며 단말마의 비명을 질러댔으니. 상국이 저야 어떻게든 참아보겠는데 미선이나 아내는 그게 아니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내일이라도 당장 집으로 돌려보내는 수밖엔 별 도리 없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다방 여종업원이기 이전에 석배의 애인인 주연실 양을 생각하고 있었다. 세대차이일까, 상국 자신으로선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해가 되지 않을수록 가슴 깊이 어혈처럼 굳어지는 응어리가 있었고, 그것은 그녀에 대한 아주 좋지 못한 감정이었다. 다시 말해서, 한국을 놀림감으로 만들었다는, 분노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 분노는 한국에 대한 쓸쓸한 연민으로 바뀌어지고 있었다. 멀리서 열차의 기적이 어렴풋이 들려왔다. 그는 어느새 꿈을 꾸고 있었다. 기찻간이었는데, 석배와 연실은 신랑 각시로 앉아있고 한국은 그들의 신혼여행가방을 가복처럼 들고 있었다. 난쟁이 이로의 얼굴도 보였고, 그의 눈이 유난히 빛났다. 무슨 말인가 지껄이고 있었는데, 해득은 할 수 없었지만, 아주 또렷하고 똑똑했다. 신새벽의 댓바람처럼 시원하면서도 선들거렸다. 끝간데없이 길고 긴 평행선의 철길이, 거뭇이 흐르는 강줄기로 변할 때쯤, 고동소리인지 기적소리인지 분간키 어려운 굉음에 상국이 놀래 깨었고, 벌써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3. 그림자 도시 1. "비서실장, 자넨 어떻게 생각하나." 회전의자에 깊숙이 몸을 파묻은 채, 눈을 지그시 감고 있던 사내가 턱짓으로 신문광고란을 가리켰다. "제 생각으론...사견입니다만, 인수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저쪽에서도 더 이상 물러설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한번 정도는 목줄을 더 죄어볼 수는 있습니다만, 자칫하다간 아주 죽일 지도 모르고..." "안 되지. 암, 입때껏 들인 공이 얼마고 투자한 자금이 얼만돼. 죽은 놈을 인수하다니.말도 안 되는 소리. 크흠...방실장 자네가 알아서 처리하게." 회전의자에 앉아 있는 사내가 득의의 미소를 흘리며 신문광고를 다시 집어들었다. 신문에 가려져 있던 책상 위에 놓여진,'회장 유태중'이라고 씌어진 자개명패가 눈이 부시도록 빛났다. "알겠습니다. 회장님. 상황추이를 보아가며 유리한 쪽으로 처리하겠습니다." "음. 다소간의 출혈이 있더라도 신도인수만큼은 차질없도록. 그리고...그 애한텐, 별일 없겠지?" 지금까지의 여유있고 느긋하던 태도와는 달리, 유태중의 얼굴이 몹시 일그러졌다. 곁에 서 있던 사내 역시 안색이 굳어졌다. "여전하십니다. 헌데..." "말해보게." "확실한 정보는 아닙니다만. 좋지 않은 소문이..." 비서실장이란 사내가 의식적으로 결재판을 뒤적이자 별로 달갑지 않다는 듯, 유태중이 손을 내저었다. "또 그 소문인가. 자넨 사업수완은 뛰어난데 사람 다루는 재주가 없어. 그래 같고야 어디, 그 애 마음을 돌리겠나. 쯧쯧..." "죄송합니다. 좀더 연구해보겠습니다." "됐네. 그게 어디 연구해서 될 일인가. 교회 인수나 마무리 짓고 차근차근 생각해보도록 하지. 그만 나가보게." 무슨 큰 죄나 지은 듯 황급히 회장실을 빠져나가는 비서실장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유태중이 다시 눈을 지그시 감았다. 급매. 남산 극락교회. 신도수 1,500명. 대지 350평. 건평 470평. 시내중심가에 위치. 신문을 밀치면서 그가 인터폰을 들었다. 곧이어 출입문이 뺄쭘히 열리더니 해사하게 야들거리는, 아가씨가 들어섰다. 생머리로 어깨까지 길게 늘어뜨렸는데, 한여름인데도 더워 보이지가 않았다. 조신히 걸어들어오는 그녀의 손엔 물컵이 들려져 있었다. 2. "으음...이게 뭔가. 꿀차로구먼." "네. 날도 덥고해서 인삼보다는 꿀이 나을 것 같아서..." "좋아요, 좋아. 아암. 삼복엔 뭐니 뭐니 해도 꿀이 최고지." "감사합니다. 회장님." 그녀가 살짝 웃어보이며 고개를 숙이자 가지런히 늘여져있던 머리숱이 앞으로 쏠렸고, 진하면서도 결코 천박하지 않은 쟈스민향이 은은히 번졌다. 가슴 속이 짜르르 해오는 것을 느끼면서 유태중이 그녀를 쳐다보았는데, 늘 그랬던 것처럼 음충스러워보였다. "그래, 한여사한테선 무슨 다른 연락 없었나?" 유태중이 그녀를 쳐다보았는데, 이번에는 그의 눈길이 금시라도 비집고 나올 것처럼 풍만한 그녀의 젖무덤을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유태중의 시선을 피하거나 외면하려들기는커녕 오히려 야릇한 자태로 허리를 꼬면서 한 발자욱 다가섰다. "없었습니다. 대신 박여사님한테서 저녁 일곱시쯤에 만나뵈었으면 한다는 전화가 왔었습니다. 다른 스케쥴 없으시다면 '나목'에서 기다리겠다고." 유태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알았다는 표시였고, 이젠 나가봐도 좋다는 신호였다. 그녀가 막 돌아나가려 할 때, 무슨 생각이었던지 유태중이 그녀를 불러세웠다. "아 참, 미스장! 그러고보니 내 깜박 잊은 게 있구먼. 올 휴가계획은 어떻게 세워놨나? 요즈음은 그렇게 바쁜 사무도 없고하니 일주일은 몰라도 다믄 며칠이라도 쉬도록 하지." "감사합니다만...이냥 회장님 곁에 있겠습니다." 그녀가 긴 머리카락을 쓸어올렸고, 살짝 가려져있던 얼굴이 그제사 훤히 드러났다. 갸름한 얼굴에 이목구비가 뚜렷한, 미인이라기보다는 개성이 강한 타입의 얼굴이었다. 그녀의 말이 싫지는 않았으나, 짐짓 딴청을 부려보는 유태중이었다. "허허...과년한 처녀가 그래 갖고야 시집인들 가시겠나. 애인이라도 만나볼 겸 다음주쯤엔 갔다오도록 하지. 자금이 딸린다면야, 경리과에 부탁하라고. 얼마든지 대출해줄 용의가 있으니까 말야." "어머, 회장님두. 한번 속지 두번 속을 줄 아세요. 지난번에두 대출이라 하시군 제 지갑째 다 갖고 가시곤." "저런, 그랬던가. 그날은 워낙 취해놔서. 하지만 용케도 피해가지 않았나. 빌려준 돈 이자는 커녕 스란히 떼이고, 나만 발목지뢰에 걷어들려 아직까지 삐그덕거리고 있으니. 나야말로 그쪽 사업엔 손방이야. 어쨌건 올 휴가는 반납하시겠다?" 유태중이 겸연쩍게 콧등을 문질렀고, 그녀가 개인비서답지 않은 태도로 왼쪽눈을 찡긋해보였다. 당돌해 보였지만, 늘 그러해서 그런지 어색하지가 않았다. 3. "제 애인은 회장님 한 분으로도 감당하기 힘든걸요. 반납이 아니라 감시병으로 남겠습니다." "크흐, 넨장할...미스장의 감시에서 벗어날 날이 없겠군. 나야말로 회장자릴 내놓던지, 지루하고 따분한 여름이야." 장난기 서린 목례를 건네고 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훑어보면서, 유태중이 호쾌한 웃음을 웃어젖히더니, 무슨 생각이었던지 이내 시무룩해졌다. 그는 비서실 장지연을 대할 때마다 그의 딸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에게도 꼭 저만한 딸이 있었다. 훤칠한 키에 이목구비 또렷한 것하며, 서글서글하니 티없이 날뛰는 것까지도 빼닮았었다. 살짝 웃기만 해도 옴폭 패여지는 보조개는 언제고 그의 눈앞에 어른거렸고, 무엇보다 자비희사(慈悲喜捨)하는 마음이 깊었다. 주옥정이란 여자로부터 딸애를 처음 데려왔을 때, 그때는 거짓없이, 저 애가 정말 내 딸일까 하는 회의를 느끼게 했었다. 딸애의 나이 열한 살로 국민학교 3학년 때였으니, 10년도 훨씬 지난 옛날 얘기였다. 양육권은 물론 친권까지도 포기한 주옥정이, 무슨 속내였던지 딸애의 성(姓)만큼은 바꿀 수 없노라고 못을 박아왔다. 지금까지 길러온 정표겠거니 했다. 자신의 혈점을 이처럼 대견스레 길러온 것만도 고마운데 그것마저 아니 된다고는 못할 일이었다. 어쨌건 데려다놓고 보자는 심정으로 들이고 나니 그게 아니었다. 눈을 씻고 봐도 어디 한군데 닮은 곳이 없었다. 사내아이라면 하다못해 툭 불거진 광대뼈라도 닮았거니 자위해 보겠는데, 이건 귓부리에서부터 발가락에 이르기까지, 생판 다른 것은 그렇다치고, 마음 씀씀이 하나 생각하는 요량까지 자신과는 아주 동떨어진 곳에 있었다. 믿을 것이라곤 갈데없이 제 어미를 빼꽂았다는 것이었고, 그것이 그녀와의 유일한 줄대기였다. 그럼에도 그는 쏟을 수 있는 모든 애정을 딸애한테 쏟아부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그래서 낳은정보다는 기른정이라고 하는지 몰랐다. 그랬던 것이, 하루이틀 살다보니 정이 들었고, 정이 들다보니 옷 모양새, 성격까지도 닮아갔고 닮아졌다. 피가 물보다 진한 것인지 아닌지는 알 바 아니로되, 인정은 물과 같아서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어렵다는 말만은 확실한 듯했다. 사실 그는 그녀를 키워오면서, 이 애가 내딸이겠거니 어렴풋이 믿어왔을 뿐, 어떤 확고한 믿음과 부단한 애정이 있어 하늘이 두 쪽으로 갈라질지언정 이 애는 내딸이다라는 직신(直信)은 없었다. 이 애가 내 딸이지 하면서도 정말 내 딸일까 하는 - 어쩌면 그들 두 부녀에게 더없는 비극이 될지도 모를 그녀의 가출을 있게한 - 참으로 어처구니없고 실없는 의문은, 그녀가 당신은 내 친부가 될 수 없노라고 선언한 후 집을 뛰쳐나간 뒤에야 뒤늦게 깨달은 바 있었으니, 부녀의 성씨가 다르다는 데서 비롯되었다. 4. 그러나 딸애가 가출하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안 사실이었지만, 성씨란 것이 그렇게 하잘것없고 간단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씨족이라는 집단의 상징이었고 심벌이었다. 자기암시일 수도 있으며 동일성과 주체성을 불어넣는 가장 강력하면서도 자연스러운 씨붙임이었다. 주옥정이라는 여자는 그것을 알았고, 유태중은 그것을 몰랐다. 비극이 운명의 동일선상에 놓인다는 전제가 참인 한에 있어서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지 않겠느냐고 변명할 수도 있겠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결과론적인 자기 합리화의 방편일 뿐이요 변명에 지나지 않을 일이고보면, 아무래도 후회는 있게 마련일 것이고, 유태중 역시도 그 당시 자신의 결정에 좀 더 신중을 기하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가슴에 결렸다. 타성받이 아버지도 있을 수 있으리라고 믿었던 자신이 너무나 어리석게 생각되었다. 이제 그녀는 그의 곁을 떠나갔고, 유일하게 불러주던 '아부지'란 이름도 더는 들을 수 없게 되었다. 비안개처럼 피어오르는, 그것이 자식에 대한 자애라면 그의 가슴엔 늘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그러한 말 못 할 심경을 알고 있는 자는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그는 언제나 무표정했으며 누구에게나 무뚝뚝했다. 인간에게는 과거를 미화시키는 유별난 재주가 있다고 했다. 고통이 클수록 아픔 또한 깊겠지만 그 아픔이 시간여행의 저쪽 뒤로 밀리게 되면 더없이 아름다운 보석으로 빛나 보이는 게 인지상정이었다. 나이가 들수록 인생이 값져 보이는 것은 그만큼 보석이 많아지고 빛이 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유태중에 있어서도 그러한 비극은, 잊을 수야 없겠지만 치유될 수는 있으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게 마음처럼 그렇게 쉽지가 않았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그래도 피붙이라고 정을 쏟은 건 그녀 하나뿐이었다. 얼마 후,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때는 본래 그의 얼굴로 되돌아와 있었다. 그가 콧수염을 후비며 창가로 다가갔다. 조금 떨어진 곳의 교회에서 차임벨소리가 들려왔다. 어제까지만 해도 별 감흥없이 들리던 차임벨소리였는데, 저것이 내 것이라 생각하니 싫지가 않았고 우쭐한 기분까지 드는 유태중이었다. 그렇게 도도하고 고상하게만 보이던 목사나 전도사들을 부하직원으로 두다니. 천당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입구의 열쇠를 이 유태중이 갖게 되다니. 생각할수록 흐믓하고 기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세상이 밝아졌네, 사람들이 너무 약아졌네 해도 어느 시대 어디이건 눈먼 돈은 있기 마련이었다. 그는 눈먼 돈을 볼 줄 아는 눈을 가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큰 도둑이길 원했다. 5. 가난한 자의 쌀되박이나 축내는 놈은 좀도둑일 것이고, 소문난 부자의 금고를 통째로 들어오는 놈은 그래도 좀 낫다 하여 대도라 일러줄 것인데 어느 놈이나 도둑이긴 마찬가지여서 유치장의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러나 세 치 혀를 부려 한 고을을 말아 먹는 자는 위대한 정치가로 칭송을 받으며, 세 명의 세작(細作)을 부려 한 나라를 넘겨받은 자는 불후의 영웅으로 만세에 추앙을 받으며, 세 치의 혀와 세 명의 세작을 한꺼번에 부려 일세의 인류 위에 군림하는 자는 만만세에 기리어지니 성인이라 하고 현자라 하지 않던가. 전자는 남의 재물을 탐한 자요, 후자는 남의 마음을 빼앗은 자라, 똑같이 남의 것을 훔치긴 마찬가지인데 누구는 쇠창살 안에 가두어져야 하고 누구는 만인대중에게 칭송과 추앙을 받는 것이니, 유태중 그는 천부적으로 타고난 소질이 있어 누구보다도 이를 잘 갈파하고 있었다. 이적지 남의 것을 그렇게 많이 집어삼켰어도 뒷탈 하나 없었고 잡음 한번 일지 않았었다. 그는 부자의 금고를 넘보기 전에 가난한 자의 마음을 사들였으며, 그것이 부자들의 담을 넘기 위한 경비보다 훨씬 싸게 먹힌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또한 세상은 하도 공평한 것이어서 철옹처럼 단단하고 빈틈없게 보이는 부자들의 금고문이 가난한 자들의 마음 앞에선 지창보다도 못하게 맥없이 열려진다는 사실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일찍이 복지사업에 손을 댄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고, 기업과는 무관해 보이는 교회를 매수하려는 의도 역시 거기 있었다. 그랬던 것인데, 이젠 교회의 교주라고 생각하니 스스로가 무슨 목자나 된 기분이었고, 감히 성직의 반열에 들기라도 한 듯 기고만장해졌다. 부려볼 수 있는 위엄을 다 부리고는, 아주 거만스럽고 위세에 찬 표정으로 거들먹거리며, 유태중이 느릿느릿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그 자리는 좀 전에 앉아 있던, '회장 유태중'이라는 명패가 놓여진 회전의자가 아니라, 봉황과 창룡(蒼龍)이 어우러진 중역회의 때만 쓰이는 주석이었다. 유태중이 빈 자리를 쓰윽 훑어본다. 거기엔 교회 장로도 있을 것이고 담임목사도 있을 것이고, 신도회 회장도 앉아 있을 것이다. 그들을 계하에 꿇리울 것을 생각하니 자신이 무슨 절대자라도 된 듯 호기만발해지는 유태중이었다. 거듭, 교회사업에 손 대길 백번 잘한 처사라고 속으로 흐뭇해 하며, 그가 회장실 문을 나오고 있었다. 그를 태운 검은색 승용차가 반짝이는 햇빛을 받으며 어디론가 미끄러져 갔다. 차 안에선 빠른 랩뮤직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6. 종이가방을 오른손에 든 한국이, 스치듯 지나가는 까만 승용차를 부러운 듯, 무한히 우러러 보다간, 절름발이처럼 절뚝거리고 있었다. 아마 어지간히도 걷기 싫은 걸음걸이인가 보았다. 빨간 불이 켜진 신호등 앞에서 한국이 또 뒤를 돌아다 본다. 우람한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그의 모습은 어딘가 허전하고 비어있는 듯 했다. 그의 손이 자꾸만 눈자위로 갔다. 서 있던 사람들이 건너편 쪽으로 우르르 몰려간 다음에서야 한국이 자신도 저쪽편으로 건너가야겠다고 황급히 서둘렀지만, 깜박거리는 파란불은 그를 완강히 거부하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한국은, 체념한 듯 얼굴을 푹 수그리곤 했다. 그러길 몇 번인가 반복하고 나서야 겨우 건너편 쪽으로 건너갈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의 발걸음은 여전히 무디었고, 앞으로 나아가는 시간보다 뒤를 돌아보는 시간이 더 많았다. 그가 골목길로 들어섰다. 시내버스나 시외버스 정류장과는 동떨어진 길이었다. 기차역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한국은 자신도 알 수 없는 길을 무작정 걷고 있는 중이었다. 터미널만 나오지 않는다면 그는, 어떤 길이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이 도시가 얼마나 큰지는 모른다. 또 어느 길로 가면 어디가 나오리라는 예상도 해본 바 없다. 가다보면 그녀를 만날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기대뿐이었다. 막연하긴 했지만, 막연함에도 불구하고 상국의 집을 떠나왔다. 불안하게 기다리느니 마음 편하게 찾아나서자는 배포였다. "아주버닌 연락이 오리라고 믿으세요?" 아침나절이었다. 그러니까 한국이 맞선을 본 지도 그렁저렁 이틀이 지났다. 그 이틀 동안은, 한국으로선 너무나 지겹고 지루한 나날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대놓고 쪼아대는 상국이나, 은근한 눈총으로 구박하는 상국의 아내는 그렇다치고, 한국 자신이 조바심이 일어 단 한시도 궁둥이를 방바닥에 붙여놓지 못했다. 전화벨만 울려도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고, 마당에 신발 끄는 소리만 들려도 온 신경이 그리로 쏠렸다. 두런거리는 말소리가 주연실 양의 목소리로 들렸고, 걸려진 액자의 먼빛 초상이, 남녀를 가릴 것 없이 그녀의 모습으로 뒤바뀌어졌다. 따지고 보면 반나절도 못되는 시간. 그것도, 어둑신한 카페와, 굴 속 같은 레스토랑에서 그녀를 만난 것을 빼고, 밝은 볕발 아래서 그녀를 똑똑히 본 것은 단지 몇 분. 그러나 그에겐 너무나 또렷하고도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었으니. 7. 단정하게 손질된 머리결이며 우수 같은 비애를 띠고 있으나 결코 우울하지 않은 눈매며, 쉽게 웃으면서도 단연코 가볍게 보이지 않는 격조가 있었고, 무엇보다, 웃지 않아도 웃어 보이는 보조개와, 보는이의 영혼을 송두리째 빨아들일 것 같은, 아주 깊고도 뜨거운 눈동자가 두고두고 한국의 가슴 복판에서 요동치고 있었다. 그는 그 이틀 동안을 오직 그녀를 연상하고 기다리는 일로 보냈었다. 열 시의 서울행 새마을호 기차가 출차경적을 울리며 역사를 막 빠져나가려는 참이었다. 상국은 출근을 했고, 조카 미선인 웅변학원엘 나가고 난 뒤여서 집안엔 상국의 아내 은숙과 한국 둘뿐이었다. 한국이 전화통 옆에서 미선이가 보던 만화책의 페이지를 맞추고 있을 때,은숙이 뛰어들었다. "이런 얘긴 안 드릴려고 했는데, 어차피 아시게 될 거 말씀 드리죠. 대신 제가 얘기했다는 말은 비밀로 해 두세요. 사실 이번 일은, 누구의 잘잘못을 따질 것도 없이 애초부터 성사되기 힘들 거라는 건 아주버니나 아버님도 짐작하셨을 거고, 이런 말 뭣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래요 사실. 미선이 아빠도 계획에 없었고, 이발소 김사장도 본의 아니게 우리집 그이가 막무가내로 조르니까 뜻도 모르고 응낙한 것이었고..." 한마디로 딱 잘라서 이런 것이다 해도 알아들을지 말지 한 한국으로선, 왼새끼처럼 배배 꼬인 은숙의 말은, 아무리 꿰 맞추려해도 연결되지 않는 시리우스의 알파성에서 온 무적함대의 행로처럼, 도시 종잡을 수가 없었다. 한국이 만화책의 첫페이지부터 다시 시작하려 하자, 은숙이 답답했던지 선풍기 모가지를 삐그덕 소리가 나도록 태기를 쳤는데, 그바람에 죄없는 전화통의 코드까지 뽑혀져 나갔으니, "제 말은, 그러니까 소식 있을 자리가 아니라는, 일테면 그 아가씨는 일찌감치 단념하는 게 우리집 그이나 김 사장은 물론 두 당자들을 위해서도 편할 거라는 말이죠. 질레같이 살지 못할 거 괜히 시간낭비 마음고생 사서 할 필요는 없는 일 아니겠어요." 떨어져 나간 페이지의 그림은 어떠했을까. 아무리 채워넣으려 해도 연상되지 않았다. 면경 속에 비쳐진 자신의 얼굴을 확인하며, 한국이 눈두덩이를 만졌다. 반창고가 손에 잡혔고, 그것은 분명한 현실이었다. 그것을 무시하라니. 한국이 일어섰다. 무슨 말인가 해야 할 것도 같았으나, 그에겐 무슨 말인가 했으면 하는 그 '무슨 말'을 지어낼 만한 재주나 요령이 없었다. 일어서긴 일어섰으되 나가야 할지 그냥 있어야 할지 몰라 엉거주춤한 자세로 누렇게 빛 바랜 결혼기념사진을 훑어보고 있는데, 양가 가족이 합동으로 서 있는 사진으로 단출하기 그만이었다. 상국의 양옆으로는 그의 아버지와 전옥희 여사가 서 있는데, 그녀는 그의 배다른 누이, 그러니까 전병학 씨의 전처소생으로 상국의 어머니를 대신하는 셈이었다. 그 곁으로 서 있는 인척들 역시 몇명 안 되기는 마찬가지여서, 웃고 있는 은숙의 표정과는 달리 어딘가 허전해 보였다. 8. "그 여자가 다방종업원이래서가 아니라, 만나보지는 않았지만 말만 들어봐두 뻔한 거 아니겠어요. 다방이다 술집이다 그런 데 있는 여자들, 갖구 놀기 좋으니까 남자들한테 인기도 있고 유세도 떠는거지 지들이 델고 살 여자들 것애봐요. 같은 여자로서 이런 말 하기는 좀 뭣하기만 화류계에 있는 여자들, 결손가정 아니면 집안이 불우하거나 지 멋대로 큰 여자들로 갈데까지 간 사람들 아니겠어요. 요즘같이 좋은 세상에 저만 암팡져봐요. 왜 그런 곳에 있겠나. 공장에 나가자니 일이 귀찮고, 펜대 굴릴 정도의 재주도 없겠지만 설혹 있다해도 사장님 호주머니가 내 호주머니라는 식으로 펑펑 써대던 씀씀이론 월급 몇 푼이 눈에나 차겠어요. 맨날 앉아서 하는 일이 지지고 볶고 다듬고 하니 겉으로 보기에야 얼굴도 반반하고 기름져 보이겠지만, 벗겨놓고 보면 속속들이 썩어있는 것들이 그런 데 있는 여자들로, 자꾸 이런 얘기하면 뭣하지만, 썩고 구린내나는 속을 지탱하자니 한둘씩의 기둥서방은 있게 마련이고, 그래 관둡시다. 더구나 그 여자, 다방에 있는 것만도 그런데, 꼴에... 아주버니도 그렇지요, 그래. 한두 살 먹은 어린앱니까. 처량하게 앉아 있는 걸 보자니 하두 딱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하면서 그녀는 정히 못 믿겠으면 어디 확인해보라는 듯, 한국이 들고 있는 만화책을 빼뜨려 북 찢어내더니 그 위에다 무엇인가를 써 주는데, 받아보니 다방이름과 전화번호와, 그리고 그녀의 이름이 뱀꼬리처럼 한 줄로 적혀 있었다. 한국은 여전 액자 속의 인물처럼 흑백으로 서 있었고, 그것이 더욱 분했던지 은숙이 '아주버니이' 하고 한국을 쏘아보는 게 아닌가. 그 눈초리가 어찌나 매섭고 독기가 흘렀던지 한국이 흠칫 놀라며 방문을 열어젖혔다. 한국이 이 집에서 마음대로 갈 수 있는 곳은 화장실뿐이었다. 볼일도 없이 화장실로 들어간 그가 코를 키잉 풀고는 허리띠도 풀르지 않고 쪼그려 앉아 있자니 오만가지 별 잡생각이 다 들었다. 망할 지집년. 누군들 속이 ㅇ어 밸을 누르고 참아지냈는 줄 아는 감. 히, 지년이야말루 화장독으로 폭삭하니 썩어들어가드라만. 무어, 미쓰 주를 화류계에 몸 담고 있는 갈 데까지 간 여자라고. 끄응. 오살할... 지년이나 몸 간수 잘 하라지. 상국이 갸 텃세만 아니었음 가만둘 줄 알었등감. 힝, 아부지한테 다 일러바치고 말걸. 끄응... 곱상허니 가만치 있는 미쓰 주는 왜, 중상모략을 해도 유분수지 밸...할 말이 궁하니까 내가 딱하게 보여서 그런다고. 끄응. 망할 지집년. 9. 그가 화장실을 나와보니 상국의 처는 어디 갔는지 없었다. 상국이한테는 좀 미안했지만 허드레 같은 입성들을 주섬주섬 챙겨들고는 아무도 모르게 나와버린 것이다. 줄곧 낭패한 얼굴로 걷고 있던 한국이 버릇처럼 또 뒤를 돌아다 본다. 그녀가 적어준 메모지를 빠뜨려놓고 오다니. 한국이, 상국의 집을 나와 첫번째 공중전화를 발견했을 때, 그는 자신도 모르게 동전을 움켜쥐고 뛰었다. 100원짜리 동전을 집어넣고, 그게 또 미심쩍어 100원짜리 동전을 하나 더 집어넣고, 뚜우 하는 발신음을 확인하고 난 한국이, 은숙이 적 적어준 메모지를 찾았으나 이를 어찌한다? 온 몸을 이 잡듯 샅샅이 뒤졌지만 종이쪼가리는 흔적도 없었다. 물색없이 서두른 게 잘못이었다. 되돌아가서 가져올까 말까 망설이고 있을 때, 손에 잡혀오는 종이딱지가 있었다. 금박으로 된 명함이었는데, 눈이 부시도록 빛났다. 전혀 기억에 없었다. 버릴까 하다간 도로 집어넣었다. 어쩐지 그냥 버리기엔 좀 아까워보였다. 그렇건만 그에겐 그런게 문제가 아니었다. 은숙이 넘겨준 메모지만 믿고 뛰쳐나온 한국이었는데, 그걸 놓고 오다니. 장가를 가겠다는 놈이 거시기를 떼놓고 신부를 맞이하는 꼴 아닌가. 마음 같아서야 상국의 처가 있거나 말거나 당장이라도 되돌아갔으면 하다가도 미적미적 걸었다. 어느만큼 걷다보니 이젠 돌아가기도 틀려먹었다. 한국으로선 생판 처음 들어선 이 골목을 곧대로 되돌아갈 재간이 없었다. 골목을 빠져나오자 교회건물과 마주쳤다. 어디서 본 듯한 건물이었다. 지그시 올려다본다. 첨탑 위에 걸려 있는 십자가. 그 십자가 위에 한여름 특유의 뭉게구름이 꽂혀 있다. 놈은 양떼도 되었다가 사슴도 되었다가 코끼리도 되었다가 하더니, 유유히 서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구름떼가 와서는 그렇게 머뭇거렸고, 또 그렇게 유유히, 아주 무애롭게 그 십자가를 떠나가고 있었다. 밸 눔의 사람들. 조골 믿다니. 찬찬히 훑어보던 그가 다시 교회의 첨탑을 올려다 보았고, 사위를 일별해 갔다. 그러더니 무언가 생각 난다는 듯, 발을 한번 땅 구르는 게 아닌가. 그래, 바로 그곳이었다. 지나온 곳은 아니지만 저쪽으로 꺾어들면 닭집이 나올 것이다. 그러고보니 금박으로 된 명함의 출처를 알 것도 같았다. 무슨 종합물산의 회장이라면서 어려울 땐 어려워 말고 찾아오라던 사내의 말이, 그제서야 어렴풋이 떠올랐다. 10. 한국이 걸었고, 반듯반듯한 건물이 내다보이는 번화가를 향해서였다. 그녀를 만났던 곳이 번질번질 윤기 흐르던 도심이었으니, 그리로 가다보면 그녀가 있는 곳을 알아낼 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 때문이었다. 얼마를 그렇게 걸었을까. 한국이 고개를 갸웃하며 멀겋게 섰다. 달팽이가 큼직하게 그려진, 상가의 초입이었는데, 유리벽 전체를 광고판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식용달팽이 특별 대 분양'이라고 씌어 있긴 했으되, 아무리 따져봐도 '식용'이란 말과 '달팽이'라는 말이 같이 붙어있다는 게 이상했고, 아파트라든지 택지라면 또 모를까 달팽이분양이라니 이게 무슨 가당키나 한 수작인가 하여, 낮도깨비에 홀린 듯 서 있는 그였다. 거기다 약효라고 써붙인 것을 볼작시면, 산삼 녹용 해구신이 무색할 것인데, 이만하면 가히 불로불사의 연단이래도 이에는 비견치 못할 터, 약리(藥利)만을 간단히 읽어본다면, 정혈. 이뇨. 해독. 보간. 조압. 강장. 강정. 소염. 면역. 진정. 진통. 감당. 보혈. 해소... 그야말로 천하명약이 따로 없구나 싶었다. "생각이 있으시면 청해 보시우. 여니 탈평이가 아니구 식용이란디." 아낙이었고, 끌신을 도록거리는 게 어지간히도 할 일이 없는가 보았다. 한국 역시 딱히 갈 곳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물어물어 간다면야 직행버스 터미널도 찾을 수 있겠고 시내버스 정류장도 만날 수 있겠으나 내키지 않았다. 그녀를 만나기 전엔 돌아가지 않으리란 작정이었다. "달팽이를 먹어유? 달팽이를 먹는 짐승두 있대유?" "즘잖은 양반이 농담도. 쭈욱 읽어보시면서 그란 소릴 하시우. 짐승이 아니라 사람이라 칸." "설마. 칠면조나 타조라면 또." "덤덤하니 맛은 별로래도 약이라 안 하우. 증력에 좋다구. 아무. 불개미나 지렁이, 도룡뇽 알보다야 약발이 시두 훨씬 실기구. 아무. 사람이 키운 식용이란디." 갱년기도 지난 쪼골쪼골한 얼굴이, 그래도 '증력'이란 말에 가선 홍조가 지폈다. 한국이 뭔 말인지 몰라 시무룩하자, 아무리 볼 일이 없기로 니눔하구야 상대하랴 싶었던지, 아낙은 휑하니 지나쳤다. 유태중이 대양복지원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일과시간이 마감된 상태였다. 말이 좋아 일과시간이지 별도로 짜여진 시간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긴, '오늘의 일과표'라고 해서 그럴싸하게 붙여진 시간표가 있긴 있었으되, 이것은 외부인사를 위해 편성된 전시용일 뿐으로, 표대로 지켜진 적은 단 하루도 없었다. 11. 그날의 과업은 그날 지시되었고, 지도과장의 구두에 의해서였다. 레크레이션이나 환경미화 같은 가벼운 시간이 더러 있기도 했으나, 이러한 시간이 원생들에게 주어지는 경우란 악천후 때이거나 감사기관의 직원이 방문할 때 뿐이었다. 했으니, 대양복지원의 원생들은 거의 매일을 사업장으로 내몰려야 했고, 노역에 강제당해야 했다. 하지만 복지원의 이러한 가혹한 처분에 대해 불평하거나 불만을 토로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그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했고, 주면 주는 대로 먹고 입고 했다. 2,3년 전이던가. 신입원생 중에 아주 똑똑한 척 하던 치가 있었다. 그치는 들어오자 마자 이런 곳에 들어왔다는 사실 자체가 아주 못마땅하고 억울하다는 듯, 분개한 표정으로 지도과장이나 서무과장은 말할 것도 없고, 감히 입에도 담기 송구스러운 원장 아버님까지 싸잡아 매도를 하는데, 그 기세가 가히청죽에 앉은 적매 솔새를 나무라는 형국이어서 아주 볼만했고 시원시원하기까지 하면서도 어쩐지 불안스러운 감을 떨칠 수 없었다. "중이 고기맛을 알면 빈대가 안 남아 난다고, 권좌에 앉아 있는 놈들 누구랄 것도 없이 똑같다 이겁니다. 고기맛을 봤다 이겁니다. 본직을 걸고 독재를 몰아내겠다고 하는 놈 으떤지 아십니까, 독재를 몰아내겠다는 명분을 앞세워 독재를 자행한다 이겁니다. 목이 잘리는 한이 있어도 부패만큼은 추방하겠다는 놈 그놈은 또 으떤지 아십니까, 사직서 뒤에는 지 배때지 채울 거 다 챙겨놓고 으름장만 놓는다 이겁니다. 부조리와 범죄를 소탕하는 일이라면 한판 전쟁도 불사하겠다고요? 아뿔싸, 우리네 같은 무지몽매한 그 말이 그렇게도 고맙고 감지덕지하더니만, 뒤늦게 알고보니 그놈의 자식새끼 오렌지족에 휩쓸리기는 뭣했던지 낑깡족들과 놀아나드라 이겁니다. 더블섹스, 트리오랄, 펜타 어쩌구 하더니 요센 아주 그룹으루 놀더라 이겁니다. 그룹. 정치도 그룹이 있어야 하고 아그들 훈육하는데도 거시기가 필요한지 선상님들까지 그룹을 맨들고, 독야청청하다는 글쟁이들까지 그룹을 쪄야 행세를 하고, 하다못해 동네 어귀 슈퍼마켓을 내도 무슨 그룹의 분점이다 이겁니다. 그라믄 여기 이 복지원은 으떤지 아십니까. 인맥으로 따지면 TS계열이오, 지분으로 가르면 목성그룹이니, 이거야말로 탄탄대로, 한마디로 황영조가 에스컬레이터 타는 격이라 이겁니다." 그러면서 끝에가서 꼭 하는 말이 있었으니, 세상은 바뀌어야 한다고 했다. 바뀌어도 그냥 바뀌어선 안 되고 화냥년 속깝데기 벗기듯 뱀새끼 허물 벗기듯, 홀라당 콱 뒤바뀌어져야 한다고 했다. 12. 이틀인가 있다가 그는 제3요양실로 입실했었는데, 그후에 그를 본 어떤 사람의 말에 따르면, 아주 조용하고 양순하더라는 거였다. 퀭하니 뚫린 동공은 초점이 없었고, 헤벌린 입에선 턱받이를 해야 할 만큼 침이 흘러내리더라는 거였다. 아무나 보고 비실비실 웃는 얼굴이 참으로 딱하더라며, 저 또한 침을 흘리며 그는, 혀까지 끌끌 찼었다. 얼마 안 있다 소문이 돌았고, 그 소문의 내용인즉, 똑똑하던 체 하던 그 치가 탈영을 했는데, 그 종적이 묘연하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그것이 그리 될 수 있으리라고 믿는 사람은 없었다. 무슨 무용담이라고 두고두고 얘기하는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 그런 일이 있은 뒤로는, 그자처럼 똑똑한 체 하는 치는 들어오지 않았다. 결단코, 그와 비슷하다거나 닮은놈조차도 입원한 적은 없었다. 원생들게 있어 가장 귀찮고 짜증스런 시간이 바로 하루일과가 끝난 다음이었다. 세면장엘 부지런히 들락거리고는 있었으나, 정작 모가지에 물 칠하는 자도 드물었다. 사실이지 거지 노릇하기도 귀찮아서 들어온 자들이었다. 일이라고는 했지만 서슬퍼런 감독의 눈초리를 어쩌지 못해서였고, 서캐가 허옇게 들끓어도 손하나 까닥 않는 그들이었다. 발에서 고린내가 나든 말든, 눈꼽에 파리가 날아들든 말든 물 칠이라면 죽어라고 싫어했다. 사감의 일석점호만 없다면 세숫비누 하나로 대를 물릴 자들이었다. 농장과, 배식을 기다리고 있는 원생들의 막사와, 그리고 먼 발치로 저무는 노을을 이윽히 바라보던 유태중이, 천천히 관리실로 향했다. 검은색 승용차가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원생들이 그를 보았고, 그 또한 원생들을 보았지만 어느쪽에서도 알는 체를 하지 않았다. 원생들은 귀찮아서였고, 유태중은 무시해서였다. "본원으로선, 원장님의 의사가 그러하시다면 따르는 수밖에 없겠지만, 글쎄요... 지난번에도 보고 올린 바와 같이, 다른 사업이라면 몰라도 교회사업이라면 반대입니다. 방 실장에게도 나름대로의 어떤 복안이 있으니 그런 구상을 했겠지만, 제가 보기엔 그 사람 아무래도 현실보다는 이상이 앞서는 것 같습니다. 수지타산이 맞아야 하는데 교회라는 거, 영리하군 아무래도 거리가 멀지 않습니까. 가사 부차적인 목표를 위장시켜 놓는다 해도 신도들이...복지원 하나면 족한 걸 구태여 손익분기점도 가늠할 수 없는, 그런 목회사업에 손을 댄다는 것 자체가..." "잘 봤네. 변 실장 눈이 역시 명안이야. 바로 그 때문일세." "네에...?" "손익분기점이 없다는 거, 바로 그것일세." 관리실 안에 원장실이 있었다. 처음엔 원장실이 별실로 떨어져 있었으나 무슨 의도에서였던지 유태중의 지시로 이리 되었다. 유태중과 대좌하고 있던 관리실장 변상열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짜웃거렸다. 13. "손익분기점이 없다는 얘기는, 뒤집어놓고 보면, 경영학을 전공한 자네이니 기초상식 같은 말이 되겠지만, 한계비용이 없다는 말 아니겠나. 한계비용, 한계비용이 뭔가?" "그야...상품생산에 있어 단위당 추가되는," "아아, 됐네. 자네의 그 무슨무슨 학이라면, 이 유태중이야말로 이미 학을 뗀 바이고. 내 얘긴 그런 고리타분하고 답답한 원론적인 얘기가 아니라 일반에 통용되는 상식이네, 상식. 변실장 자네는 어째 전공은 대학원인데 상식은 유치원인가. 폐일언허고. 한계비용이 없다는 말은, 무한투자에 유한생산이거나 유한투자에 무한생산이거나, 둘 중에 하나다 이 말 아니겠나." "맞습니다. 까닥 잘못하다간 백사장에 물 대기 식으로, 패망하기 딱 십상입니다. 목회사업이라는 것이." "그으 씰데ㅇ는. 그런 놈이야 당달봉사 아니면 소금밭에 상노일 것이고. 자네 낚시해본 경험 있나?" "네에...! 낚시라면?" 변상열이 찔끔했다. 어리숙한 것 같으면서도 음험하고 교활하기가 외밭에 도슴도치보다도 더한 유태중이었다. 하기 쉬운 대답이라고 생각없이 받아넘기다가 옴치고 뛰지도 못하는 벼랑까지 내몰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게 뭔 줄 아나? 입센노랑인데요. 좋아, 눈썰미 있구만. 이건 또 뭔 줄 아나? 삐에루가루뗑아닙니까. 매섭구만. 아주 날카로워요. 크흠, 그래 그럼 이건 뭔가? 이건...라스꼬떼. 하아, 대단하군. 대단해요. 하다면, 이것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점이 뭔 줄 아나? 이 정도 나오면 영락없이 피라미낚시에 아구리 꿰인 메기마냥 허덕거려야 했으니, 외제라고 하면 내가 씨도 없는 놈인 줄 아느냐고 호령일 터이고, 그렇다고 악어가죽이라고 한다면 내가 무슨 껍줄도 안 남기는 그런 동물학대자인 줄 아느냐고 분통일 것이니, 모기 잡는 게 에프킬라요, 바퀴 잡는데 콤벳트인 줄 뻔히 알면서도 내심 시침부터 뚝 떼고 드는 변상열이었다. "내가 어릴 때 가장 경이롭고 존경스럽게 바라본 곤충이 있었네. 거미였지. 그 놈은 내가 아는 그 어떤 동물보다도 영리했고 치밀했지. 변 실장도 알다시피 거미란 놈, 그놈만큼 병법에 능하고 전기전술에 뛰어난 동물도 없을 것이. 적이 보는 앞에선 어떠한 경우에든 그물을 짜지 않아요. 꼭 밤에만 거미줄을 치거든. 당장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말이지. 뿐인가, 그놈은 아주 용의주도하여, 아무데 아무렇게나 치는 법이라곤 절대 없지. 적이 꼭 거쳐가야만 하는 목진지를 고르되, 한번 걸려들기만 하면 절대 빠져나갈 수 없게시리 치밀하고 견고하게 짜거든. 무엇보다 나를 감동시킨 바는 말일세," 하며 유태중이 눈알을 부라리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아주 호기롭기 그만이었다. 14. "놈에겐 기회를 기다리는 끈기와 인내가 있지. 어떻게 보면 미련하고 게으르고 단순한 것 같지만, 놈을 조금이라도 세밀히 지켜보면 그게 아니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지. 저격수가, 목표물이 사정권 안에 들어오지 않으면 절대 총구을 내보이지 않듯, 그놈 역시 완전하고 완벽한, 그러면서도 자기가 원했던 먹이가 걸려들지 않는 한,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이틀이고 사흘이고 발가락 하나 숨소리 한번 내지 않고 비트를 지키고 있거든. 그러다 원하던 먹이가 걸려들었다 하면, 신속하기는 비온 끝에 날벼락이요, 용맹하기로는 히드라와 대적하는 인류 최초의 용장 헤라클레스 정도는 될 터인 즉, 이보다 영묘하고 영특한 동물이 또 있겠나. 가장 경제적이고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또 가장 현실적인 동물이라고 믿었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네. 경제적이고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현실적일 것 같은 거미의 생리와 생태가 본받을 만은 하지만, 그래서 사람들의 눈엔 '학습과정의 가장 기초적이고 기본적인 모델로서의 지혜로운 동물'로 보여질 지 모르지만, 나 유태중에게는 차선일 뿐이다 이 말이네." "......" "낚시를, 해보진 않았어도 어떤 거라는 거는 알겠지?" "알고는 있습니다만, 말씀하시는 요지가..." "크흠, 사람하군. 낚시엔 두 가지가 있네. 미끼를 낚시바늘에 매달고 하는 것이 있고, 미끼나 떡밥 없이 그냥 낚시바늘만 달랑 매달고 하는 이를테면 피래미낚시가 있지. 자네라면 이 둘 중에 어떤 방법을 택하겠나." "그야 아무래도 미끼를 달아야..." "고기가 물린다?" "아무래도..." "쯔읏. 그래서 하는 말이야." "네에?" "그러고보면 자넨 아직 멀었어. 구시대적이고 고전적이야. 과거로부터 시원한 물은 과거로 되돌아가기 마련이야. 비록 그 물줄기가 현재를 거쳐 미래로 향한다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볼 때, 그 물은 언젠가 다시 그 깊은 산속으로 돌아들기 마련이란 말이지. 이 말은 곧, 발상이 과거라면 결과 역시 과거라는 말. 말장난같이 들릴지 모르나, 과거의 낚시 방법으로는 과거의 습속에 길들여진 물고기만 낚게 된다 이거지. 즉슨, 잡으라는 물고기는 못 잡고 '오, 옛날이여'하는 푸념만 풀어놓다 돌아올 거란 말이지." "무슨 말씀이신지. 저로선..." 15. "쉽게 생각하라구. 이재라는 거, 치부라는 거. 다 상술이고 상식이야. 어려운 학이니, 원론이니 거들먹거릴 필요 없이 낚시야 낚시. 정치는 사람을 낚는 낚시이고, 경제는 돈을 낚는 낚시이고, 문화는 정신을 낚는 낚시이며, 체육은 신기록을 낚는 낚시에 불과할 뿐. 자네가 관리책임지고 있는 이 복지원으로 말하면 낚시바늘에 꿰어진 물고기를 살림망에 가두는 일이야. 얘기가 빗나갔네만, 과거의 낚시방법으로 현재의 물고기를 잡겠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야. 요새 현대 물고기들 어떤지 아나. 떡밥을 던지면 떡밥만 싹 쓸어먹고 정작 낚시바늘에 매달린 미끼는 거들떠 보지도 않아. 떡밥을 깔지 않고 미끼 달린 낚시줄을 띄우면 어떤지 아나. 미끼만 똑 따먹고는 비웃기라도 하듯이 유유히 제 자리로 돌아가는 게 요즘 현대판 물고기야. 뭔 말인 줄 알겠나. 물고기 역사 2백만 년 동안, 속고 속이고, 그래서 이젠 아무리 그럴 듯하고 먹음직스러운 미끼를 던져도 속아넘어가지를 않는다 이 말일세. 다시 말해서, 에덴동산으로 다시 돌아가야 할 때가 되었다 이 말이네. 에덴동산. 어떠한 장식이나 치장도 없이 벌거벗은 알몸뚱이로 상대방에게 다가가지 않는 한, 붕어는 커녕 중타리 한마리 낚지 못하게 될 것이. 미끼 달린 낚시가 구시대적이라면 거미의 끈끈이 그물 치기는 전 근대적이야. 호랭이란 놈 토끼 잡겠다고 아가리 딱 벌리고 으르렁대는 꼴이야 유치하기 그만일 것이고. 명심하게 가장 확실하고 경제적인 낚시방법은 아무 것도 쓰지 않는 민낚시라는 거." 변상열이 머리를 앞으로 끄덕거려 보이는 것 같더니, 그것도 잠시 이내 콧구멍을 후비고 들었다. "알아듣긴 하겠습니다만. 현실이라는 거, 횟집에 고기 토막 내듯기 딱 잘라, 이게 대가리, 이게 꼬랑댕이 할 수도 없지 않습니까. 과거와 현재는 어차피 뒤섞여 있을 수밖에 없고, 그렇다고 쌀되박에 뇌 골라내듯 구습전작(舊習前作)을 일거에 타파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물 흐르듯기 흘러가는 게 세상사 이치임에, 고놈을 콱 틀어막아 수미산으로 물줄기를 돌릴 수는 더더욱 없을 기고." "그래서 우리에겐 부단한 노력이 필요한 것이 아니겠나. 현실을 현대적으로 개조하지 않으면 언제나 낙오를 면치 못해. 현대적이지 않은, 다시 말해서 에덴동산이 아닌 여타의 모든 산을 에덴동산으로 만들어야 하네. 적어도 우리가 낚싯대를 드리울 물줄기만큼은. 이제 내 뜻을 알겠나. 우린 거미줄을 칠 필요도 없고, 낚시바늘에 미끼를 꿰지 않아도 우리가 원하는 먹이가 걸려들고, 우리가 바라는 물고기가 살림망 속으로 기어들게 되어 있네. 또 그렇게 해야 될 거고. 이것이 나의 주관이고, 그렇게 하자니 손익분기점이 없는 사업, 한계비용이 없는 사업장이 필요한 것이네." 이제야 알겠다는 듯, 변상열이 고개를 끄덕였다. 16. "목회사업을 원하시는 이유도 그럼." 털도 안뽑고 드시려고요, 하는 말을 가까스로 참고보니 철면피가 아니라 솥뚜껑 두어 개쯤을 겹으로 내두른 변상열로서도 얼굴이 달아오를 수밖에 없었다. 그의 내심을 읽기라도 한 듯, 유태중이 목줄기에 또박또박 힘을 주고 나섰다. "민낚시를 해볼 만한 사업장은 교회사업뿐이란 결론이 섰네. 어디 그뿐이겠나. 바야흐로 실명 시대이네. 현금은 벌써 이루어졌고, 머지 않아 부동산에까지 파급될 예정이고 보면, 안전한 곳이 사설금고이겠나, 은행이겠나, 그렇다고 공장굴뚝이겠나. 길은 딱 한군데. 교회의 신자들이네. 교회의 신자. 그들이야말로 비밀과 안전이 절대로 보장된, 걸어다는 금고가 아니겠나. 그들은 한번 파놓은 샘물과 같아서, 그들이 내는 헌금은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마르지 않을 것이고, 많이 내면 많이 내는 자일수록 그 믿음은 두터운 것이어서, 결단코 어느 누구에게도 출자금을 밝히지 않을 것이네. 어디 그뿐인가. 믿음이란 것은 소오다나 이스트와 같은 것이어서 무엇인가를 불려내기 좋아 한다네. 그리고 그 믿음은 너무도 확고하여, 허풍도 믿음이 되면 반석처럼 견고해지거든. 그러니 이보다 더 해볼 만한 사업이 또 어디 있겠나." 길고도 지루하며 어쩌면 따분하기까지한, 그러나 확고한 신념과 뚜렷한 의도가 곳곳에 배어 있는, 유태중의 이러한 소신과 철학을, 단 한번의 부주의나 소홀함도 없이 끝까지 다 듣고난 변상열이, "탁견이십니다. 저같이 좁은 소견으로는 감히 발가락 하나도 못 그릴 혜안이십니다." 하면서 무릎을 쳤다. 고자 오줌줄기처럼 쨀쨀거리던 볕발도 완전히 넘어갔고, 그의 창자에선 쪼록 소리가 낭낭했다. 그러나 유태중은 아주 포만감에 찬 표정으로 득의양양했다. "세상이란 말일세. 특히 요즘 세상이란, 운영의 묘가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이 말씀이지. 개 꼬리 삼 년을 묵혀도 황모될 리 없다는 것은 옛말이고. 요즈음은 개꼬리가 아니라 쥐꼬리를 갖고도 황모를 만드는 세상이거던. 녹피에 가로왈자, 장기판에 밭전자 하나 못 쓰는 놈들에게야 진주가 아니라 물방울다이아를 갖다주면 뭘 하겠나. 그야말로 개발에 편자요, 돼지주둥이에 입센노랑이지." 변상열이 꼬집을 듯 무릎을 다시 탁 치면서, 한 손을 얼른 입으로 가져갔다. "이를 말씀이겠습니까." 하면서 그는 기어이 하품 한입을 토해내고 있었다. 유태중 역시도 어지간했던지 막 일어나 나가려는 참이었다. 그때, 시종장처럼 사무실에서 그들 둘을 기다리고 있던 직원 하나가 노크도 없이 뛰어들었다. 그의 손엔 무선전화기가 들려져 있었고, 무슨 진상품인 양 유태중의 턱 밑까지 공손히 받들어 모셨다. 변상열이 얼굴을 찡그렸고, 유태중이 얼떨떨해 했다. 17. "누구란 말도 없이 무작정 원장님을 바꾸어 달랩니다." "용건은? 누구라는 말도 없이?" 짜증스런 목소리로 부하직원을 나무라면서 변상열이 전화기를 나꾸어챘다. "이것 봐요! 내원... 여기가 무슨 걸인구호소인 줄 아시오! 뭐여? 걸인이 뭐냐고? 이 사람 이거 갈수록...글쎄, 그렇다니까. 여관엘 가던지 여인숙을 찾던지. 거야 댁이 알아서 할 일이고." 도깨비 방망이 같이 생겨먹은 무선전화기는 벌써 직원의 손으로 넘어갔고, 그 직원은 당연히 그래야 할 것처럼, 재빨리 사무실로 건너갔다. 그러나 유태중은 자기 말 외에는 잘 이해를 못 하겠다는 듯이, 그 직원이 나가고 나서도 배추벌레 우거지에 깔린 상이었다. 변상열이 얼른 유태중을 향해서 정중히 목례를 건넸다. 그 목례는, 원장을 찾는 전화를 실장이 임의대로 받아서 처리했다는, 또는 원장이 있는 줄 뻔히 알면서도 그 면전에서 방약무인하게 언성까지 높이고 무례를 저질렀다는, 아니면 부하직원 하나 교육시키지 못하여 앞뒤 없이 뛰어들게 했다는, 이러한 것들이 미안스럽기도 했고 겸연쩍기도 해서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젠 여기 일은 다 끝났으니 돌아가달라는 간곡한 표현일 수도 있었다. "젊은놈인데, 주소가 어떻구 명함이 어떻구 횡설수설 하는 게, 돌아도 아주 드럽게 돈 놈인가 봅니다. 하긴, 머리깨나 돌린다는 놈들 일부러 사이코 드라마를 연출하는 놈도 있긴 있죠. 이런 전화는 하루에도 기수부지로 많고. 어물쩡하게 넘어갔다간 보증 서주고 인감도장 도둑 맞기는 유도 아니어서 애초에 싹수를 팍 잘라놔야 합니다, 요론 놈들은. 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는 말은 홍길동전에나 나오는 고전이고. 요즘 세상, 기는 놈 밑에 엎드려 등 긁어주길 기다리는 놈들이 쌔고 쌨다니까요." 밖은 완전히 어둠으로 뒤덮여 있었다. 시간으로 따지면 아직은 그렇게 어두울 때가 아니건만, 아무래도 장마가 들어설 셈인가 보았다. 별이 있어야 할 자리에 별이 없다는 것은 그 사실 자체가 비극이었고 혼돈이었다. 간혹, 패망(敗望)한 자들의 눈으로는, 어쩌면 그것이 하나의 안식처로 보일지 모르나, 죽음에조차 희망을 걸어야 하는 대부분 인간들의 입장으로 볼 때는, 그것이, 비극이 아니라고는 부인 못 하리라. 밤벌레 울음소리가 더욱 깊어진다. 이명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소슬바람조차도 머뭇거린다. 그 역시, 길을 못 찾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박가야." "잉?" "등좀 긁어줄랴." "힛, 등신." "소리함 되냐. 배 밀어줄게." "타령으루 해라. 아라리 미길게." 18. 도수 낮은 알전구 불빛으로 희미하게 드리워진 막사에선 은어와 밀담이 간간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유태중을 실은 승용차가 미끄러지듯 빠져나오자, 철제로 된 육중한 대문이 아주 듣기 거북살스러운 굉음을 토해내며 닫혀졌다. 세상 속에 있지만, 세상과는 완전히 유리되고 차폐된, 상자 속의 쐐기집으로 남아 있었다. "그래도 그렇지. 건 잘못이여. 폭폭 궈 삶을수록 뽀야니 울어나는 사골두 아니고, 두고두고 볼수록 생침 도는, 거 뭐냐. 이조백자나 고려청자 속의 천도복상도 아니고. 피차간에 체면치레로 보자고 헌 거, 굳이나 그럴 셈이 뭐였냐고." "딱하잖아요. 그렇다고 누구처럼 손가락 건 것도 아닌데. 사람 좋아보이고 속세 사람들처럼 응큼생심할 것 같지도 않고, 어떻게 그냥 보내요. 말도 안 되지. 말 나온 김에야 말이지만, 고려청자나 이조백자는 몰라도 부담감 없기론 뚝배기 정도는 되데요. 뭘." 김석배가 앞서서 걷고, 주연실이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내 얘기는, 뚝배기에 된장국 한 그럭, 걸 두고 하는 얘기가 아니라니깐. 그 자슥 입장두 고렬해야지. 전한국이 갸 듣는데 고목남구에 꽃이 피었다구 해봐, 똥이야 팥이야 가릴 줄 알아. 당장에 벌통부터 지고 나설 놈이야. 그놈이. 순진하고, 무구해서가 아니라 이게 돌이래서 그래. 돌. 거기다 대고 믿음직스럽네 부담감이 없으시네, 하면서 한껏 바람을 집어 넣어놨으니, 모르겠어 나두. 알아서 하시란 말밖엔." "문제는 문제네요. 나간 지가 이틀이나 됐다면." 석분처럼 후두기던 빗줄기가 조금씩 굵어지고 있었다. 감나무에 홍시 매달리듯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노변의 전등에선 희미하고 엷은 불빛이 이파리처럼 흩뿌려지고 있었다. 빗줄기는 점점 세차게 쏟아지고 있건만, 그들 둘은 누구 하나 서두르는 기색이 없었다. 마치 가로수의 낙엽을 밟듯, 그렇게 천천히, 빗물에 불어터진 보도블럭과 가로등 불빛을 밟아가고 있었다. "행방불명이 되건, 어디 가서 탁 꺼우러지건, 거야 지 명이 가지니 그렇다 치고. 또 눈에 안 보이면 걸루 그만이라 하지만, 요는 눈만 뜨면 찾아오는 그 자식이 문제라." "네에...?" "상국이 그 자식 말여. 냄비뚜껑에 녹두전 부치듯, 단솥에 왕소금 튀듯, 호랭이 새끼 검불 보고 날뛰듯 으르렁대는데, 이건 숫제 토끼몰이에 반달곰을 만났다 이 식이여. 그 자식 날 보고는 뭐라는지 알아. 떡바치에 오사리잡놈이라는 거여. 글쎄." "무슨 말인데요?" "드럽고 추한 놈이란 말이겠지. 나 역시 드러워서 안 받는다고 했어." "뭘요? 빌려준 돈이라도 있었어요?" 19. "지난번에 한국이 그 자식 일로, 손해 많이 봤을 거 아녀. 쉴참도 아니고 알쪽 같은 근무시간이었응께. 난 뭐 어디 등신이라고. 일당으로 쳐 달라고 했었지. 저두 감지덕지했었고." 뒤따르던 연실이 독오른 푸독사처럼 갑자기 머리를 꼬나세웠다. "뭔 말씀이세요, 지금. 제 얘기라면." 무엇 때문에 저다지 화를 내는지 알 바 없는 석배로선, 주연실 양을 대하기가 그저 미안스러울 뿐이었으니. "왜 아녀. 최선을 다했지. 십만 원. 근데 이 자식이 이제와선 오리발부터 내미는 거라. 행방불명이 된 게 누구 때문인지 아느냐, 실종시킨 책임을 져라. 지가 먼저 찾아와서는 떼거지를 쓰는데, 그 자식 인간성 드럽다는 건 내 진작에 알아모셨지만, 천하에 씨도 못받고 꺼우러질, 인간말종이여, 그놈이." "관 두세요! 그만! 누가 석배씨한테 그런거 참견하랬어요. 어째 사람이, 매사가 그래요." 주연실이 울컥 성질부터 부렸다. 그녀가 화를 내는 경우란 극히 드문 일로, 갑자기 당한 석배로선 어떻게 대해야 할지 그저 난감했다. 얼떨떨한 채로 망연히 서 있던 석배가, 지나가는 행인을 흘끔 쳐다보면서 어깨를 으쓱 추스렸다. 우산도 없이 빠르게 지나치는 행인은, 혼자였다. 빗줄기가 거듭 세찼고, 불빛 찬란한 어디든 술집 아니면 여관이었다. "얘기가 그렇단 얘기고. 지가 아무리 날고 기는 놈이래도, 설마하니 그 돈이야 부도 내겠어. 저도 양심이 있지, 설마 애들 불알에 붙어 있는 밥풀은 떼먹을 수 있을지 몰라도 그 돈 십만 원이야..." "관 두시라니까요! 고만. 암만 다방 지집년이라고 해도 돈 몇푼에 왈짜 놓을 줄 아세요. 제가! 시키지도 않은 일 왜 만들어 난리세요." 극도로 흥분한 탓인지 그녀가 소리를 빽 질렀다. 퍼렇게 질린 얼굴로 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주연실이, 더 이상 어디고 갈 맘이 없다는 듯, 몸을 홱 틀더니 오던 길로 삐쳤다. 그제사 아차 싶은 석배였다. 석배가 뛰다시피 그녀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구질구질한 빗줄기를 뿌려치듯, 석배가 앞머리를 힘껏 털어댔는데, 그때마다 끓는 물에 닭털 빠지듯 머리카락이 무더기로 빠져나갔다.그러나 석배는 지금 그런 하찮은 머리카락 숫자나 셈하고 있을 정황이 아니었다. 어떻게 하면 이 여자의 마음을 되돌려놓을 수 있느냐가 문제였다. 털어내면 털어낼수록 칙칙해지는 머리채를 신경질적으로 툴툴거리며, 주연실의 뒤를 무작정 따라붙고 있었다. 는개처럼 일렁이던 빗줄기가 가랑비로 치적이더니, 그들이 옥신각신할 때쯤에서는 장대비로 변해 있었다. 흥건히 가라앉은 가로등불빛이 빠르게 내달리는 차바퀴에 치어, 여린 수박처럼 으깨졌다. 물방울이 튈 때마다 빛조각이 끈적거렸고, 펑퍼짐한 도로에 고이기 시작하는 물결 위론, 흉하게 문드러지고 찌그러진 광막이, 더럽혀진 갑사처럼 부유했다. 20. 퍼붓 듯이 쏟아지는 빗줄기를 피해 주연실이 근처 건물을 찾았고, 그 뒤를 석배가 따라 들었는데, 어쩔 수 없이 마주보아야 했다. 그녀가 겸연쩍은 듯 먼저 쿡 웃었고, 얼떨에 석배 저 역시 따라 웃었다. 자세히 보니 그곳은, 고급스럽게 지어진 술집이었다. 'SALON 裸木'이란 붉은 전자가 네온불빛에 타닥타닥 튀고 있었다. 글자의 '裸'자는 그런대로 알아볼 수 있었으나, 그 뒤의 글자는 전라의 미희가 팔과 다리를 요염히 꼬고 앉아있는 그림문자여서, 석배로선 저게 글자인지 그림인지 분간이 서지 않았다. 석배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쏟아지는 비를 고스란히 알몸으로 맞은 탓도 있겠지만, 빗줄기 저 건너에 서 있는 어렴풋한 환영을 보았다. 농염한 몸짓으로 다가서는 여인. 아, 몇 년 전이던가. 천산에 단풍이 만홍으로 물들고, 사위사위 흘러가는 시냇물이 만가를 부르며 떨어지는 낙엽을 조상하고 있을 때, 너붓이 달려와 지켜보는 초췌하고 핼쓱한 조각달 하나 있어, 그래도 조금은 위안이 되던 밤. 오곡이 익고 백과가 영그는, 그래서 누구는 가을을 결실과 수확의 계절이라고 하더라만, 석배로선, 어쩐지 허전하고 쓸쓸하기만 한, 가을은, 상실과 조락의 계절이었다. 청자빛 하늘을 보노라면 괜스레 눈물이 흐르고, 담배연기처럼 표표히 떠도는 고추잠자리가 까닭없이 처연해지는, 가을은, 눈물과 슬픔과 비애의 계절이었다. 가슴을 부둥켜안고 울어도 다 울어내지 못할 눈물일 것만 같았다. 산과 초목이 뿌리째 뽑히도록 소리소리 질러대도 다 토해내지 못할 답답하고 울적한 심사일 것만 같았다. 봉창 앞에 다가선 조각달을 하염없이 바라보다 섬돌 밑에서, 또 하나의 만가를 지쳐 우는 귀또리 소리에 그만 저도 모르게 까무룩이 잠이 들었었나 보다. 가슴에서부터 따뜻하게 번져오는 열기가 있었다. 처음엔 그저 금침처럼 보드랍고 포근하기만하던 그 열기가 조금씩 달아오르더니, 어느새 아주 뜨거운 불덩어리로 변해 있었다. 가슴이 턱턱 막히고 숨이 가빴다. 가위 눌렸을 때처럼 입을 딱딱 벌려야 했다. 맥이 탁 풀리면서 온몸이 나른해졌다. 곧이어 전신이 뜨겁게 달아올랐고, 뻣뻣한 현기증을 느끼며 위로위로 ㅅ구쳐 오르는 게 아닌가. 꿈이라고 생각했다. 꿈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다니, 이게 꿈이 아닌 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으나, 경험해 본 바로는 분명 꿈이었고, 그것도 그냥 꿈이 아니라 몽정일 터였다. 짜릿짜릿한 흥분을 느끼며 마비된 듯한 몸을 간신히 뒤틀었을 때, 무언가 뭉클했고, 그는 부르르 진저리를 쳤다. 21. 그의 몸뚱이보다 더 뜨거운 불덩이가 그를 덮쳐왔다. 말랑말랑하고 보드랍고 아주 매끄러운, 속곳만 겨우 걸친, 알몸이었다. 누굴까. 이렇게 향기롭고 매끄러운 몸매를 가진 여자가 누굴까. 그러나 그것도 한순간, 혓바닥처럼 뜨겁고 길쭉한 손이 그의 몸 구석구석을 더듬기 시작했다. 여자의 손이 석배의 거기에 닿자 두 사람의 입에서 짧고 가느다란 신음소리가 동시에 터져나왔다. 잠결엔 듯, 꿈결엔 듯, 석배가 알몸뚱이를 으스러져라 끌어 안았다. 겨우겨우 가려 있던 그녀의 속곳이 갈갈이 찢겨져나갔고, 땀과 열기로 범벅이 된 두 개의 알몸뚱이가 뒤엉켜선, 가을밤 위를 몸부림치고 있었다. "무슨 생각이 그렇게 심각하세요." 빗줄기 저쪽 끝을, 초점 잃은 눈동자로 망연스레 바라보던 석배가, 연실에게 꼬집힘을 당하고 나서야 퍼뜩 정신이 들었다. 그가 눈을 비볐다. 혹시 저 건너편에 있을지도 모를 그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있는 것도 같고 없는 것도 같았다. 있겠지. 이 세상 어딘가에는. 살아 있던가, 이름도 모를 공동묘지에 평분으로 남아 있던가. 이제 와서 세삼스럽게 미워한다거나 증오한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는 일이랴마는, 그래도 유쾌하고 깨끗했어야 할 첫날밤의 동정을, 다른 사람도 아닌 의모에게 그렇게 빼앗기고 난 석배로서는 아지 못할 분노와 절망감이 엄습해왔고, 우두둑거리며 허물어지는 춘강(春江)의 얼음장처럼 인륜이 두렵고 늙은 아비 대하기가 무서웠다. 칙칙하고 불결하기 이를데없는 그날밤을 뜬 눈으로 고스란히 지세우고 난 그가, 차마 늙은 부친을 마주할 용기가 없어, 첫닭이 울기도 전에 허재비 같은 헐렁한 옷소매에, 고향의 산천과, 그 고향의 산천에 살고 있는 이웃들의 얼굴을, 비설거지하듯 그렇게 쓸어담고는 도망치듯 떠나온 석배였다. 쌍녀러...개만도 못한 지집년. 드러운 화냥년. 석배가 화를 내는 것은 그녀와의 정사 때문이 아니었다. 상국이 놈의 말을 빌리자면, 남녀의 그짓이야 양은냄비에 담긴 죽 한술 떠 먹기 식이요, 냉미뜰에 물 한 되박 더 퍼내는 격이니, 그게 어디 자리가 나겠고 표가 나겠는가. 허고, 냄비면 그냥 냄비지 새것이면 어떻고 중고면 어떻고, 불 지피면 달게 마련인데, 이것 저것 따질 건 뭐고 가릴 게 있느냐 했다. 22.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석배의 가슴이 이처럼 답답하고 울분스러운 것은 의모에게 당한 수치스러움도 수치스러움이었지만, 속절없이 죽어간 아비 때문에 더했다. 임종만 했었더래도, 탁구공만한 봉분이래도 올렸더래도 지금처럼 허전하지는 않을 것 아닌가. 그게 다 그날 밤의 그짓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두고두고 앙심이 가는 의모였던 것이다. 그 후로 그는 어떤 여자이든 거부했다. 여자만 대하게 되면 저도 모르게 벌거벗겨진 그녀의 알몸뚱이부터 상상하게 되었다. 자연 의모의 얼굴이 떠올랐고, 모든 여자들이 의모같이만 여겨졌다. 겉으로는 점잖은 채 하고, 교양도 있고 고고한 척 하지만, 한꺼풀만 벗겨놓고 보면 아주 더럽고 불결하고 잠자리에 들면 그짓밖에 모르는 요부색녀쯤으로 보였다. 혼처가 나설 때마다 그래서 파혼되었고, 여자라면 무조건 손부터 내젓던 것이, 그것도 연분이라고 주연실을 만나고부터는 잊을 만 했는데,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고만 지병이 도지듯, 그 가을날 밤이 생생히 떠올랐던 것이다. 계속 이러고 있을 거예요. 젤루 보기 싫은 게 뭔지 아세요. 지갑 빳빳하게 세워갖고 돈 자랑하는 거하고, 비 맞고 청승 떠는 거예요." 샐쭉하던 얼굴이 어느새 풀어져 있었다. 흰 이빨과 살짝 패여진 볼우물이 앙증맞았다. 계단을 내려서는 연실의 뒤를 따르면서도, 그러나 석배는 내키지 않았다. 그녀의 웃는 얼굴이 억지처럼 보였고, 아무래도 지어보이는 듯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앞서 걷고 있는 그녀의 옷이 자꾸만 벗겨졌다. 이러진 말아야지 하면서도 눈을 떠보면 브래지어와 거들만 걸치고 있는 그녀가 보였고, 이래선 안 되지 하면서 머리를 흔들어보면 그녀는 어느새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 되어, 히프를 살랑거리며 요염히 걷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고 색욕이 도는 것도 아니었다. 구역질이었다. 지저분하고 풀더미처럼 끈적끈적한 악취였다. 이를 악물고는 석배가 그녀의 뒤를 겨우겨우 따라붙고 있었다. '나목'이라는 룸살롱은 지하층에 있었다. 얼마간 계단을 밟고 내려갔을 때, 입구가 나왔고, 미닫이 문을 열자 카운터박스에 서있 던 안내가 그들을 정중히 맞았다. 은은했다. 연분홍 불빛이 그랬고, 계류처럼 흐르는 시네뮤직이 그랬다. 따뜻하고 안온한 실내 분위기가 석배의 마음을 조금은 누그려뜨렸다. 이런 데선 마음 놓고 맥주 한잔 정도는 마실 수 있으리라는 기분이 들었다. 잔뜩 기대를 걸고 있는데 웬걸, 웨이트리스에게 안내되어 가던 연실이 노중에 뱀을 만난 듯, 까무러치게 놀라는 것 아닌가. 23. 걸터 앉으면 머리끝만 살짝 보이게 된, 칸막이와 칸막이 사이를 헤집고 가던 주연실이 멈칫했다. 어둑신한 구석퉁이에 몸을 모로 세우더니, 확인이라도 하듯, 안개꽃과 장미꽃이 꽂혀진 꽃병 쪽을 몇번이고 다져보곤 했다. 사이, 꽃병 너머로 어른거리던 사내가 출구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그녀는 출구를 향해 내달았다. 너무나 순간적인 일로, 그녀의 동작이 어찌나 민첩했던지 출입문을 거쳐 계단으로 뛰어오르는 동작이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 사내가 출입문 쪽으로 눈을 돌렸을 때는, 그녀는 벌써 지상으로 나와 있은 다음이어서, 거기엔 석배 혼자만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서 있는 중이었다. "아는 놈이야?" 석배 역시 도망치듯 뛰어나오고보니, 밖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왜 그래? 젤루 싫어하는 게 비 맞고 청승 떠는 거라매." "가요. 그냥." "가아? 어딜...?" 석배가 주위를 둘러본다. 길. 헤드라이트. 빗방울. 네온사인. 그런 길을 따라 심연처럼 이어진, 끝도 깊이도 가늠할 수 없는 어둠. 그 어둠뿐이었다. 오돌거리며 서 있던 주연실이 한숨을 탁 쉬더니, 숙여진 고개를 더욱 깊숙이 숙였다. 조금 성글어진 빗방울을 자근자근 밟으며 그녀가 길바닥으로 내려섰다. 망설이듯 서 있던 석배가, 그녀의 뒷모습이 어둠 속으로 가라앉을 쯤 해서 뛰듯이 걸었다. 묵벽 저 아래로 굴러떨어질 것같이 위태위태하던 그녀를 불빛 근처에까지 가까스로 건져올려 놓고보니, 그녀나 석배나 설 삶은 호박잎이긴 마찬가지였다. 옷은 후줄근히 젖었고, 머리는 덤부살이 도깨비풀마냥 제멋대로였다. 자세히는 보이지 않았지만, 부리부리한 눈매하고 안반짝만하게 두꺼운 낯짝이며 무엇보다 자극적인 선홍색 넥타이... 그래, 그놈 때문일 것이다라고 석배는 단정했다. 장미꽃과 넥타이는 어땠을지 모르나, 결코 검정색 양복과 안개꽃은 어울리지 않는 배색이었다. 그놈이 어떤 작자이길래 그녀가 저토록 당황해 한단 말인가. 혹시... 석배가 연실처럼 고개를 숙였고, 어느새 그 역시 심상찮은 기분에 빠져들고 있었다. 일전에 있었던 일로, 두 번 다시 돌이키고 싶지 않은, 언제고 다시 반복이 가능한, 그래서 더욱 겁부터 나는 악몽이 있었다. 성명 김석배. 당년 33세로 직업은 이용업. 본적, 주소, 학력...이상 없습니까. 네. 그런데 무슨 일로... 좋습니다. 그럼 이틀 전 새벽, 좀더 정확히 말해서 23일 02시 30분쯤 어디서 뭘 하셨죠? 에 있었습니다만, 아마 자고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24. 좋습니다. 김석배 씨가 자고 있었다는 알리바이, 즉 다시 말해서, 귀하께서 그 시간에, 귀하가 말씀하신 당소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는 구체적이고 명백하고도 확실한 증거를 제출해 주시겠습니까. 난감했다. 참고인 진술로 필요하니 잠깐이면 된다기에 찾아온 경찰서였다. 파란색 종이로 된 출석요구서를 내보이자 이파리 하나짜리 수문이 2층 수사과, 그랬고 쥐며느리 나무잽이하듯 별 생각없이 들어왔는데, 사건담당 형사라고 악수를 내민 작자의 묻는 말이 갈수록 심각했다. 23일 02시 30분, 증거라...그것도 명백하고도 확실한? 아무리 따져보고 뒤져보아도 물증이 될 만한 게 없었다. 결혼이라도 했다면 좀 수치스럽긴 하겠지만 몇 번이라는 판수까지 손 꼽아 보이며 그야말로 확실한 증거를 대겠는데, 이건 그러지도 못할 사, 하필이면 그날 밤따라 그다지도 자주 꾸던 주연실과의 꿈자리도 한자락 펴지 못했으니. 글쎄요. 증거라고 말씀하시면...글쎄요. 이것뿐입니다만, 제발 무슨 일로... 김석배가 손가락을 갈고리처럼 하여 자기 자신을 가리켰고, 담당 형사란 자가 눈을 꿈뻑했다. 가장 확실한 증거물은 제 자신뿐입니다. 제가 그 시간에 저의 방에서 자고 있었다는 것을, 저 자신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의심이 된다면 저와 같이, 그 시간 그 장소에 가보실 수도 있습니다. 저의 이 손목시계를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안 됩니다. 그 정도로는 충분하지가 않습니다. 이건 살인사건과 관계되는 중요하고도 법적인 문제입니다. 선량했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부도덕했다거나 다른 사람에게 고의로 피해를 끼쳤다고도 말할 수 없는, 23일 02시 30분 이전까지 이 도시에 살고 있었던, 한 사람의 시민이 피살되었습니다. 김석배 씨와는 누구보다도 격의없이 허물없이, 친하게 지냈던. 아. 이제보니, 칼국수집 그 뚱땡이 아줌마 말씀하시는군요. 피살됐다는. 알고 있었습니다, 저도. 하지만 그녀의 피살건 때문이라면, 이건 지극히 부당한 처사입니다. 저는, 누구보다도 그녀와 친하게 지내왔었으며, 그래서 누구보다도 슬퍼하고 있는 사람 중에 한 사람입니다. 김석배 씨가 여기 불려온 이유도 거기 있습니다. 그녀와 가장 친하게 지냈었다는 것, 그것이 전부입니다. 그녀는 살해당했지만, 반항한 흔적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것은 곧, 그녀가 살해자를 신뢰했었다는 증거이며, 그 신뢰는 예리한 칼날로도 끊을 수 없을 만큼 두터웠다는 증좌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당신을 가장 유력한 혐의자로 지목해놓고 있습니다. 제 개인적인 법철학입니다만, 모든 피의자는 그 스스로 무죄라고 증명될 때까지는 유죄입니다. 딱 벌리고 있는 석배의 입에다 그는, 자신의 그 개인적인 법철학이라는 것을 거침없이 쏟아붓고 있었다. 25. "이하부정관, 과전불납리. 의심받을 만한 행동을 했기 때문에 의심받는 것이며, 그것은 자기관리를 잘못한 탓일 뿐, 사회를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어느 경우이나 마찬가지이겠지만, 자기 자신이 그 스스로의 결백을 입증한다는 것이 어렵고, 짜증스럽기까지 하며, 남자가 여자화장실에 들어가서는 소변기를 찾을 때처럼 당혹스럽고 열적기도 하겠지만, 언제까지고 피의자로 남기보다는 덜 고통스럽고 의미있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좀더 확실하고도 명백한 알리바이, 구체적인 물적증거를 제시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더니, 그 형사는 진술조서의 맨 마지막장을 내밀었고, 거기엔 '위의 조서를 진술자에게 열람하게 하였던 바 진술한 대로 오기나 증감, 변경할 것이 전혀 없다고 말하므로 간인한 후 서명, 날인하게 하다'라고 씌어졌는데, 막상 열람을 하려고 하자, 그자는 눈을 아래위로 치뜨더니 인주통을 불쑥 내밀었다. 그날 이후, 이때까지 줄곧 쫓기는 심정이었다. 늘 누군가에게 미행당하는 기분이었고, 집에 들어와보면 모든 게 어수선해 있었다. 불안하고 초조하고, 가슴 조이는 나날이었다. 무서울 땐 보름달만 쳐다봐도 개 짖는 소리가 난다더니 작히나 그짝이었다. 그러면서도 아주 이상하고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있었다. 범죄수사란 것이 어떤 것인지, 또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는 모르나, 아무리 수사에 문외한인 석배로서도 혐의자에게 당신이 혐의자라고 일러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담당형사란 자는 아주 은밀히, 그것이 무슨 대단한 비밀이라도 되는 냥 조용히 불러서 귀엣말로 소곤댔던 것이니, 당시의 석배로선 무턱대고 감사했고 고마울 뿐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이 혹시 덫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이 들기도 했지만, 어떻게 하는 것이 덫에 걸려들지 않는 것인지도 몰랐으므로, 석배는 유리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 사건과는, 상대방으로부터는 밀접히 관여되어 있으면서도 정작 그 스스로는 철저히 무관한 상태로 놓여져 있었다. 모든 게 모호했고 불안했으며 의심투성이었다. 확실한 것은, 담당형사가 요구한 확실하고도 구체적인 명백한 증거가, 확실하고도 명백하게 없다는 것이었다. 바로 그자일 것만 같았다. 그날 이후로 만난 적은 없었다. 그러나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는 그자의 얼굴이었다. "형사지? 맞어, 그놈이 틀림ㅇ어. 어디서 많이 본 상판대기라 했더니. 드러운 자식. 그런 놈은 뒈져도 까마귀도 안 파 먹을 거라." 연실은 그저 걷고만 있었다. 비가 좀 더 세차게 뿌렸으면 했다. 성글던 빗줄기가 가늘어지더니 완전히 그쳤다. 왕소금을 뿌린 듯, 하늘엔 별들이 서글프게도 많았다. 까무잡잡하게 빛나는 무명성, 따라갈까 하다가 뒤를 돌아다보니 꼭 그같이 생긴 김석배가 따라붙고 있었다. 26. 이 남자는 지금 무슨 말을 원하고 있는 것일까. 아냐, 그래... 무엇을 원해서가 아니라 침묵이, 길 저쪽 끝에 서 있는 막막한 저 어둠이 답답해서일 것이고, 그럼에도 어떠한 조치도 취할 수 없다는 절망스러움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남자는 지금, 무슨 말을 한대도 곧이들으려 할 것이며, 어떤 거짓말이래도 믿어 의심치 않을 것이다. 그래, 무슨 말을 해주어야 한단 말인가. 당신이 보았던 그 남자.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선홍색 넥타이를 매고, 어딘지 모르게 유치하고 천열한 것 같으면서도, 사람을 낚는, 그것도 여자를 유혹하는 재주 하나는 어느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자. 사기와 상술에 뛰어나 걸어다니는 모든 사람의 호주머니를 자신의 사설금고쯤으로 여기고, 한약방 앞에서 무우를 팔 만큼 능변에 달변을 겸하여, 세 치 혓바닥으로 15층짜리 고층건물을 종잇장처럼 옮겨다 놓는 자. 목걸이를 살 때마다 잠자리가 갈리고, 양은냄비에 콩죽 끓듯 아내가 바뀌는, 바로 그자가 내 아버지라고. 나목이란 카페에 들어섰을 때, 처음엔 놀랐고, 놀란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뛰어나온 지금, 별과 바람과 어둠과 가로등 불빛과, 그 불빛에 가려진 그림자가 뒤섞인 도로변을 걷고 있자니 왠지 측은해지는 연실이었다. 그리고 조금은 후회가 되는 그녀였다. 뛰어나와도 말을 하고 뛰어나왔어야 하는데...그 남자 때문이 아니었다. 그 남자 앞에 앉아 있던, 꼭 수반 위에 올려진 토막난 은행목처럼, 세련된 모습으로 보이긴 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딘지 엉성하게 보이는, 40대 초반의 그 여자 때문이었다. 무슨 연고로 그러한 자리가 마련되었는지 모르나, 자연스럽지 못 한 것만은 사실이었고, 어떠한 대가를 치루는 한이 있어도 그 자리만큼은 깨뜨렸어야 했다. 어쩌자고 그녀는 또 간악한 술수와 음모와 계략으로 짜여진 덫에 걸려들고 말았는지. 주연실이 저도 모르게 한숨을 탁 쉬었다. "석배 씬 그 사람이 형사로 보여요?" "그놈도 그랬거든." "그놈이라면." "아녀. 옛날에...그런 놈이 있었거든. 관내 순찰이랍시고 다달이 찾아와 똘똘이 목욕값이라며 용돈 뜯어가던, 눈빛이 꼭 그랬으니까. 아마 짤렸을거라 요샌 대가리 밀루두 않오는 걸 보면." 경찰서에 불려갔던 일을 말해버릴까 하다간 어쩐지 내키지 않은 듯하여 말을 돌리고 마는 석배였다. 피의자로 지목받고 있다는 게 그랬고, 또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그 담당형사의 말마따나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 싶기도 해서였다. "사실은 그 남자...사기꾼이예요. 호색한에 치한에 날도둑에 더럽고 추잡한 건 다 갖고 있는, 석배씬 상국씨를 인간말종이라고 했지만, 그자에 비하면 이도 안 들어갈 걸요." 나란히 걷고 있는 두 사람 사이에 잠깐 동안의 침묵이 흘렀다. 27. 그러나 두 사람에게는 다른 어떤 시간보다보 길게 느껴졌다. 그 잠깐 동안, 그들 둘은 각자 하려다 만 이야기를, 남김없이, 그러면서도 아주 또렷하게 지껄이고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별이 반짝였고, 쓰린 기가 소금발처럼 저려왔다. 그들의 말을 대신 받아 적는 가로수의 은행잎이 뭉툭해진 연필심에 물칠을 하고 있었다. 주정뱅이의 고함소리와 번득이는 주방용 칼날 아래서도 담담히 입을 다물고 있던 어둠이 그제서야 물빛처럼 반짝이기 시작했다.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어디구 들어가지. 나목이 아니면 손목이나 발목이라두 있겄지." 김석배가 떼를 쓰듯, 주연실의 팔을 잡아 끌었다. 그녀가 망아지처럼 뻗대다 마지못한 듯 따라갔다. 어거지로 그녀와 팔짱을 낀다는 게 좀 곤혹스럽긴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석배였다.언제 또 떠오를 지 모를 의모였고, 앞서 걷기라도 한다면 꼼짝없이 발가벗겨질 그녀였다. 눈을 감는다고 지워질 의모가 아니었고 도리질을 해댄다고 벗겨지지 않을 주연실의 속곳이 아니었다. "이러지 말고 노래방 가요. 우리." "시원한 맥주는?" "노래도 하고 맥주도 마실 수 있는 델 제가 알아요. 배달 갔다가 알아둔 곳인데, 요 근처 어디드라..." 주연실이 주위를 살폈다. 소나기가 한바탕 퍼붓고 난 도시는 질 고운 먹빛으로 단장이 된 듯, 아주 깨끗하고 중후해 보였다. 방향을 가늠한 그녀가 커브를 돌면서 그들이 걸어온 쪽을 흘끔 쳐다봤다. 시내의 중심가로 4거리였는데,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회로의 중앙에 커다란 시계탑이 있었다. 이 도시에 조금이라도 오래 살아온 사람이라면, 지금은 주황색 차선으로 메워진 그 자리를 볼 때마다 바벨탑처럼 우뚝 서 있던 시계탑과, 그 시계탑 위에 올려져 있던 정방형의 시계를 상상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또 짙푸른 창공을 한가로이 날면서 유유히 선회하던 하얀 비둘기떼를 연상할 것이니, 이러한 것들은 가을날의 단풍처럼, 아름답기도 하겠지만 한편으론 애틋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여, 사람들의 가슴에 두고두고 남아있었다. "뭔 생각이여. 영 넘는 노루맨치." 주연실이 석고처럼 서 있었다. 김석배 역시 이 도시로 들어온 지 오래되어, 시계탑과 비둘기를 보아왔으나 기억엔 전혀 없었다. 무엇을 생각하는 일이라면 손부터 내젓는 탓이기도 했고, 과거지사라면 무조건 잊기로 마음먹은 김석배였다. 더구나 오늘이 무슨 날인가. 김석배로선 특별한 날이었다. 이날 이때껏 만나기는 자주 했지만 초장부터 단 둘이 술집에나 가자고 작정하기는 처음이었다. 오뉴월 고뿔에 푸닥거리하듯 그렇게 쉽게 넘길 날이 아니었다. 무슨 수를 써서든 조골 내 껄로 맹글어야 한다고 벼르고 있는 참이었다. 28. "뭐가 보여? 캄캄한 오밤중에. 가자구 어서. 이 김석배 다들 말하기를, 3년 묵은 간장독에 절인 마늘쫑맨치로 째째하고 짜짜한 놈이라 그러던데, 건 진실이 아녀. 확실하고도 명백한 물적 증거가 있다니께. 옹졸한 놈이 아니다라는 걸, 행동으로 보여줄팅께 가자구." 김석배가 주연실의 팔을 잡아 끌었으나, 역시 석고상이었다. 주연실이 가로수 밑으로 숨어들었다. 그리곤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저어기...저기가 어디죠." "...?" 김석배, 별주부전에 나오는 자라란 놈이 토끼를 찾는 형국으로 고개를 있는 대로 빼들긴 했으되, 난생 처음 대하는 산천경지이고 보매 산천은 의구한데 토걸은 간 데 없네 하고 노랫가락을 읊을 겨를도 아니요, 그렇다고 산 절로 물 절로 절로절로 나도 절로 해가면서 두 눈을 딱 감고 나몰라라 자빠질 처지도 못되었으니, 밤눈 어두운 고양이 약방에 숨어들어 비타민제 찾는 격이라, "어디, 어디를 말여."하면서 맞장구나 치는 수밖에. "저기 건널목 건너, 3층 건물에 2층 말예요." 그제사 불빛이 보였고, 거긴 석배 저도 '삼삼회' 모임으로 몇 번 가본 적이 있는 곳이었다. "아아, 조기. 물레방아 아녀. 워타밀. 저긴 나보다두 주우, 연실 씨가 더 잘 알텐데. 왜? 뭐가 보여?" "아뇨. 혹시 해서요. 가요. 쭈욱 빠지다보면 볼링장이 나올 거예요. 그 건물에 있어요." "흣, 나두 알어. 이따만 도장 세워논 데 말이지." 한껏 기분이 좋아 있는 석배와는 달리 연실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그 사람. 혹시 그가 아닐까. 설마... 그래, 그 사람일지도 모른다. 전한국... 거간의 사정을 종합해 볼 때, 그리고 김석배의 전언을 참작해 볼 때, 전한국 그는 그러고도 남을 위인이었다. '물레방아'라는 네온간판의 그림자 밑으로 어른거리던 그림자가 있었다. 쪼그려 앉아 있었는데, 분명 사람이었고, 석상처럼 그렇게 언제까지고 누군가를 기다릴 태세였다. 술을 마시면서도 노래를 부르면서도, 지나오는 길에 얼핏 스쳐간 그 모습이 줄창 어른거렸다. 아니겠지, 하면서도 그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저러다 횡사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러한 감정은, 주연실 자신이 생각해도 이상했다. 단순히 걸인처럼 쪼그려 앉아 있는 타인에 대한 동정심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보다 깊은 연민이 배어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연민은 아주 친근한 것이어서, 오래 전부터 품어 왔던 낯 익은 정인에 대한 감정 같기도 했다. 4. 꽃뱀 1 "거 속좀 시원하게 삽시다. 우리. 대체 그놈이 어디로 가 있는지 대중은 알 거 아니유." 상국이 다탁을 잔뜩 끌어잡으며 노인을 다그치고 있었다. 그러나 노인은 알아들었는지 말았는지 멀거니 창 밖만 응시하고 있었다. 아주 작은 체구에 속눈썹까지 희디흰 백발이었다. 상국이 초조한 듯, 저도 따라 창쪽으로 눈길을 돌리긴 했으나 눈에 잡히는 거라곤 후적후적 말아올린 커튼과, 그 커튼 사이로 넘겨다 보이는 찌푸린 허공이 전부였다. "내 다른 사람 같으면 판돈을 되려 받는다 해도 오지 않았을 거요. 일전에 일러준 처방이, 그 뭐냐 귀신 같다면 좀 그렇고. 하여튼 원체가 귀신 같아서 이러는 것이니, 따악 요번 한번만 일러주슈. 내라고 어디 인정을 모르기야 하겠수. 간주만 탓다 하면 상다리 휘어지두룩 뻑적지근하게 쓸 터이니. 그래 요번엔 어느 쪽으루 가면 돼겠수." 상국이 아예 목을 걸고 나왔다. 듣기에 따라서는 협박도 될 수 있고, 간청도 될 수 있는 아주 묘한 분위기를 연출해내고 있었다. 노인의 눈썹이 꿈틀했다. 형형한 눈빛이 상국과, 상국의 뒤에 걸려있는 '적積선善지之가家 필必유有여餘경慶'이란 족자를 번갈아 넘나들었다. 상국이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렇다고 그 정도에 기가 죽을 상국이 아니었다. 음침하고 음습한 실내가 폭풍전야처럼 괴괴했다. 또옥...! 노인이 성냥개비를 분질렀다. 또옥...! 똑. 두 동강으로 분질러진 성냥알이, 머리통은 머리통대로 다리몽둥이는 다리몽둥이대로 다탁 위에 너절했다. "허어...이런 실수를. 내려질 지벌도 감하기 버거운데 다가올 앙재가 명전하니, 쯔읏...비책이 무책이로고. 난세에 백마를 기다릴밖에..." 노인이 알아듣지도 못할 혼잣소리로 혀를 끌끌차더니 애꿎은 성냥개비만 축내고 있었다. 노인은 다름아닌 이로라 불려지는 난쟁이였고, 그들이 앉아있는 곳은 까치다방의 한쪽 구석이었다. "뭐가 잡히슈. 일전엔 묻지도 않은 말이 환하더니, 어지간히 뜸 들이고 고만 끌러보슈. 까짓거 동서남북 방향만 일러주면야 딴에 또 짚이는 데가 설 거 아니유. 콩자치기 뛰어봐야 정지간이라고, 한국이 그 자슥 걸어봐야 도나 개니께. 한마디로 부처님 손바닥 아니겠수." 노인의 안색이 안 좋아 보여 불안감이 없는 것도 아니었으나, 백설(白雪)이야 분분하건 말건 개구리만 울으면 경칩이라고 꽉 다물고 있던 말문이 터진 것만해도 속이 시원한 상국이었다. 2. 이로의 양볼이 씰룩했다. 입맛을 쩝 다시더니 내리 눈을 감았다. 일에도 격이 있고 냉수를 마셔도 순서라는 것이 있는데, 이 작자 어디 한군데 순유한 곳이 있는가. 홍동백서 조율이시를 따르지 않음이야 가정교육이 모자라 그렇다 쳐도 초헌 올리는 자리에서 독축을 재촉하지는 말아야 할 것 아닌가. 하도 어이가 없던지 이로가 넌즈시 상국을 건네다보며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연다. "그래, 그곳이 필경 동남방은 동남방이렸다?" "뭐요? 동남방? 건 일전에 노인장이 일러준 곳 아니오. 덕분에 일자리도 구했고." "공사현장이 복구라 했겠다?" "허어, 이 어른신네 갈수록...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거지. 생판 듣도보도 못한 복구는 또 뭐요?" 백발답지 않게 피둥피둥한 얼굴이었다. 제법 심각한 얼굴로 봐서 일부러 놀리는 것 같지는 않은데, 갈수록 엉뚱했다. "상지가 말일세. 엎드릴 복자에 거북구, 거북이 엎드려 있는 상이라 했겠다." "넨장...난 또. 확실합디다. 거북이란 놈, 의심나면 당장이라도 가보슈. 숫놈을 기다리는지 암놈을 기다리는지 납짝 엎드려 있응께." 이로 노인이 아주 낭패한 얼굴로 냉차를 훌쩍 마셨다. 그리곤 성냥개비 한 개를 집어들면서 혀를 끌끌 찼다. "사혈에 복구라...멀리 갔어...너무 멀어. 멀다보니 때를 놓칠밖에. 내 그만큼 일렀건만. 동방목에 유시라...필시 수성일터, 신시만 놓치지 않았던들. 쯧쯔... 가로 뛰어도 오황살 세로 뛰어도 암검살이니, 삼도천 건너 초강왕이라 해도 헤어나기 힘든 일. 전생에 업보려니." "헤에야, 내 이거 원. 어디 복장 터져서. 한국이 그 자슥 어디께 있는지 어림이나 해 달라는데 웬 뱀발. 노인장 뱃속에서 꼴꼴 하는 게 시방 복채 타령인가 본데, 요번 딱 한번만 봐주면 한상 휘어지게 낸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번에도 동남방이유?" "저번 일이네. 오황살로 말하면 안에 있던 쇠기가 밖으로 기승하니, 이를테면 길을 가다 멀쩡하던 다리 부러지는 격이라 피해볼 방도란 없는 셈이지. 대충(對沖)되는 곳에 또 다른 흉살이 있어, 이를 암검살이라 한다. 오황살이 자발적이라면 이놈의 암검살은 외부로부터 기인한 재앙이라, 이 또한 면재하기는 어려운 일. 운동장 밖을 걷다가 무심히 쳐다본 벽공(碧空)에 눈두덩이가 시커멓게 부어올랐다면, 나부터래도 그 자의 운수를 탓하지 야구선수를 나무라겠나. 허니, 더 큰 액이 들기 전에 일찌감치 물러나야 할 게야. 자넨 지금 제 발등의 불도 못 끄면서 건넌산 화를 걱정하고 있는 격이니. 쯔읏...! 방책이 따로 있을까마는, 노부가 저지른 실수이매 일러주는 방책이니 명심허게. 내일부터라도 그쪽 일엔 손을 떼는 것이 상선은 못 되도 차선은 될 터." 3. 상국이 시큰둥하여 콧등을 연신 문지르는데, 콧물보다는 실실거리는 웃음이 더 많은 걸로 보아 이놈 이거 아무래도 귀동냥은 여벌로 하는 것이렸다. 그도 그럴 것이, 허리에서 뚝 소리가 나고부터 이날 이적지 눈치밥으로 연명해 오던 신세로 돈벌이라면 썩은 새끼줄에라도 목을 매고 싶은 심정이었는데, 천신만고 끝에 구한 일자리를 그만두라니. 이거야 어디, 흘레 붙은 수캐에게 뒷물하라는 것도 아니고, 사흘 굶은 진드기 발에 기름칠하자는 것도 아니고. 병 주고 약 주는 놈이야 약값 올릴 욕심에서라지만, 약 주고 병 주는 심사야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동남방, 그래서 동남방으로 갔고, 가다보니 일자리를 얻었다. 그랬으면 됐지, 오황살이 어떻고 암검살이 어떻고, 겨우 면책이라고 일러주는 것이 그 일에서 손을 떼라니. 웃어도 그냥 웃을 게 아니라 박장대소, 가가대소를 한다 해도 시원치 않을 마당에, 그래도 동남방 하고 취직을 시켜준 어르신네 앞이라 소리없는 코웃음으로 예의를 차리고 있는 상국이었다. "일전에 취직 건이라면 입이 없어 말이 부족할 지경으로, 그 은혜 길이길이 보존하고 있습니다만. 등신이네 머저리네, 팔삭둥이에 쉰둥이네, 남들이야 짖고 까불고 하든 말든 제겐 형입니다. 형. 것두 달랑 하나 남은 친형인데 어찌 내 몰라라 하겠습니까. 더구나 남의 집서두 아니구 우리집이서 행방불명이 됐는데, 노인장두 한번 생각해 보슈. 이게 어디 쇠경 뜸 뜨는 식으루 대충 넘어갈 일인가. 지가 뛰어봐야 동서남북 네 방위 중 한 곳일텐데 도대체가 오리무중이니...벌써 이 자리에서만 네 번째유. 그래 어디 쪽으루 가면 돼겠습니까." "됐네. 할 얘긴 다 했고. 그만 가보시게." "가라니. 어디 쪽을 말씀이오?" "허...때가 되었느니. 천지간에 몸 둘 곳은 오직 한군데, 집일 터. 대저 항하사 같이 많은 별들에게도 나름대로 거처하는 곳이 있어 이를 우주라하니 집이라. 허공을 날으는 새들에겐 둥지라는 것이 있고 땅 위를 기어다니는 짐승들에게도 굴이라는 것이 있어, 이 모든 것이 또한 집이라. 사람이 살아서 거처하는 곳을 양택이라 하고, 죽어서 묻히는 곳을 유택이라 하니, 다름아닌 집일 터. 어디로 가냐고 물으면, 그래 어디라고 대답해 줄 것 같은가." "뭐요! 이 영감이 증말루, 요오...! 그래 관둡시다. 관둬. 나오지도 않는 점괘 쥐어짜봐야 주역에두 ㅇ는 모르괘나 짚을 것이고. 달 뜨면 내일이 것지. 내일 또 봅시다, 노인장." 지금껏 죽치고 앉아 애걸복걸한 걸로 따지면 주먹부터 한방 먹이고 볼 일이나, 쥐고 흔들 것도 없는 몸집에 나이도 있고 하여, 슬그머니 일어서는 상국이었다. 헌데 이건 남의 속도 모르고 염장부터 지르고 있었으니. 4. "크하핫! 썩돌은 썩돌. 내 그만큼 성정을 다독이라 했거늘. 본좌, 다시는 자네를 만날 일도 없을 터. 명심하게. 재물은 쌓으면 쌓을수록 하늘과 멀어지고 이름은 날리면 날릴수록 이웃과 멀어지며, 학문은 닦으면 닦을수록 자신과 멀어지게 되네. 학문을 하는 자 고독해지고 명성을 얻은 자 시기를 받으며 재물을 모은 자 불안에 떨게 됨은 당연한 이치. 드렁칡이 그 명을 다하는 것은 아무 쓸모가 없기 때문이요, 엉겅퀴가 꺾이지 않는 것은 그 모습이 흉하기 때문이네. 학문을 이룸에 한발 물러설 것이고, 공명을 바라기 전에 이웃을 해치 말 것이며, 부귀를 탐하매 하늘에 맡길 것이야. 멀리 걷거든 적게 먹을 것이며 높이 오르거든 낮추 행동할 것을 재삼 명심하게." 상국은 이미 다방문을 나서고 있었다. 그러나 눈을 지그시 감은 노인은 혼잣소리로 계속 읊고 있었다. "타고난 난세엔 그저 기다리는 게 상수이니. 암 소리 마시고 그저 기다리시게. 차면 기울고 들면 나는 법, 자네 말 마따나 달 뜨면 내일인 게야. 나간 짐승이 돌아올 건 정한 이치. 그리 아시고 하는 일에서나 속히 손을 떼시게. 크험...!" 상국이 가슴을 쓰다듬었다. 사실, 헛일삼아 찾아온 곳이었다. 까치다방이라고 하면 석배 저놈과 몇 번 와본 적이 있는 곳이어서 생소한 곳이라고는 할 수 없었으나, 설마하니 점쟁이 이로 노인이 있을 줄은 몰랐다. 행방이 묘연한 한국이었다. 아내의 말로는 분명 누르실 집이루 간다고 나섰다는 놈이, 서울로 돌아갔어도 벌써 갔어야 할 시간이건만 어찌된 영문인지 전화할 때마다 노친네가 받았고, 한국이 들어왔는지 어쨌는지 물어보기도 전에, 듣기만 해도 골머리가 지끈거리는, 이곳 농삿일일랑 애시 신경쓰지 말고 차분허고 조신허니 거동혀서 요번만큼은 뭔 일이 있어두 성사를 시키라는 말만 누누히 강조하는 걸로 보아, 집에 들어가지 않은 것만은 확실한 듯했다. 짐짓 딴청을 부리느라, 녀석 용돈이 궁한지 어쩐 일로 집에만 들어박혀 있어 보기가 좀 그렇다는 말을 하자, 그게 무신 조화냐며, 농협에 근무하는 너구리 이 부장에게 사정사정을 해 일반대출 50만 원씩이나 장만해 줬는데, 못된 송아지 응덩이에서 뿔 난다더니 그놈이 장바닥 구경맛을 들이더니 돈 쓰는 행우부터 득한 모양이라고, 원체가 그런 놈이니 즉은 니가 주관하고 관장하여 매사 신중을 기하라는 말로 외려 나무라는 노인이었다. 조금은 안심이 되는 상국이었다. 길 떠난 나그네가 곤궁에 처하게 되면, 여자는 거울부터 꺼내들고 남자는 지갑부터 뒤져본다던가. 5. 먼 길이든 가까운 길이든 노자(路資)는 들게 마련이고, 포장길이든 자갈길이든 거마비는 많이 들수록 편할 일이고 보면, 수중에 돈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듬직하고 미더운 안내자를 갖고 있다는 얘기가 아닌가. 노친네의 말이 사실이라면, 소개비랍시고 10만 원 울궈낸 것하고 이발비며 점심값이며 소소하게 쓴 돈을 제한다 해도 30만 원은 남아 있을 터이니 며칠 정도는 걱정없으리란 계산이었다. 그렇다고, 돈 떨어지면 돌아오겠지 하는 생각으로 태평스럽게 기다릴 수만도 없었다. 성격이 기름종이에 부싯돌인 탓도 있겠으나, 내집 찾아온 피붙이를 내쫓았다는 누명을 어떻게 감당할 것이며, 무엇보다 이러한 사실이 누르실에까지 건너간다면 왕래는 고사하고 부자의 정리마저 끊자고 나올 노인이었다. 무슨 수를 써서든 한국을 찾아야 한다고 대문간을 나서보면, 그럴 때마다 고작 찾아간다는 게 역전 파출소였으니. "저어...사람을 찾습니다만." "어이고 이거, 난 또 뉘시라고. 일전에 오셨던 그분 아니시오." 파출소 사무실은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상국이 출입문을 열자 먼저 눈에 익은 교통이 보였다. 그의 손엔 늘 핸드폰과 지시봉이 들려져 있었는데, 그날은 갈색 딱지장을 들고 있었다. 두 명과 세 명의 젊은이가, 그를 둘러싸서는 무슨 말인가 따지기도 하고 항의도 하고 있었는데, 상국에게 아는 체를 한 사람은, 그런 그들을 남의 일처럼 물끄러미 지켜보던 뚱보였다. "자자, 이리루 이리루 앉읍시다. 하안 눔의 장닭. 그래 안녕히 계시오." 이파리 세 개짜리 그 순경보다 더 반가운 상국이었다. 그것도 인연이라고 머리에 담고 있다니, 꼭 한국을 찾은 기분이 들었다. 그때의 그 장닭은 그날로 생을 다했으며, 엊그제 한국이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것과, 어디서 들어본 바로는 가출인신고라는 것이 있다는데 그거라도 해놓으면 좀 나을까 해서 이렇게 찾아왔노라고 말하자, 헐렁한 소맷자락에 앞단추 하나가 떨어져 나간 순후하게 생겨먹은 그 순경은, 아주 섭섭하고 안 됐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그게 효험이 있을지는 자신도 모를 일이로되, 어쨌건 그렇게라도 해보자는 거였다. 신상명세와 인상착의, 성격 등을 말해주자 그는 알았다며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보겠노라 했다. 허리를 꺾을 수 있는 데까지 척 꺾어 보이곤 그 길로 찾아간 곳이 김석배가 운영하는 '깔끔이발관'이었다. 6. "그런 기 있음 진작 얘길헐 일이지. 그기 요샛말루 농부병이란 거여 임마. 뼈마디가 쑤시고 담이 절리고, 또 자다가 신음소릴 지른다매. 증상이 농후한 걸 보니 중증이다야. 심혀." "새앳긔넌. 장바구에 개털 붙이듯기 찍어다 붙이기는. 똥구녕에 결핵 들고 아가리에 티눈 박힌다는 말은 들어봤어도, 내 생전에 농부병이란 병속은 니눔이 첨이다. 돌아서면 차오르는 오줌보도 농부병 탓이드냐." "그렇다니까. 의학적으루 말해서 합병증이라구 안 헌다냐. 하초가 부실하다보니 소변이 자주 마렵겠지만 원인은 다 농약중독에 있다구 하드라. 그 흔한 애들 고뿔만 해두 고열에 기침에 편도에 한두 가지 증상이 아닌데, 자그마치 600만 농사꾼이 앓고 있는 농부병이 어디 오줌통, 밥통뿐이것냐." "됐다 고만. 의학적으루 안 따져도 택시기사, 이발기사 유식하다는 건 다 아는 사실이고. 그 얘기 할려구 니눔 찾아온 게 아니라, 너 겉다면 지금쯤 어디 처박혀 있겠냐. 그 잘난 대가리 빛 좀 보자." "몰러 임마. 한국이 갸 행방불명된 거, 불쌍하고 측은하고 딱하기두 하지만, 사실 톡 까놓고 얘기하면 내 개인적으룬 환영이다. 아주 잘 된 일이여. 먹구렁이 같은, 내 그 자슥한테 골병든 걸 생각하믄 지금도 이가 갈리고 치가 떨린다." "거야 돌배 니눔이 단도리 잘못한 탓이고. 남의 대가리는 양파껍줄 뱃기듯 하루에도 수십 개씩 뱃기는 놈이, 그래, 고 불여시 같은 거 꼬리 하나 못 잘라 그 난리를 피우게 만드냐. 보나마나 고년이 한국이 주머니를 넘겨다 봤겠다. 내 이년, 내 손에 걸려들기만 하면 마른 명태 두들겨 패듯 흠씬 두들겨 팬 다음, 새끼줄에 앵미리 역듯 유치장에 처넣고 말팅께. 파출소 그 친구도 장담혔응께. 잡아만 오라고." "너 운제 파출소에 친구 뒀냐. 거긴 감방두 없든데." "짜식. 맥ㅇ이 감방은. 형사다 임마, 형사여. 왕파리." 길게 얘기해 봐야 입만 아플 것 같았다. 펄쩍 뛰는 김석배를 다독여 놓고는 집으로 가는 척하며 숨어 들어온 까치다방이었는데, 주인공인 주연실은 어디 배달을 갔는지 없었고, 생각지도 않은 이로 노인을 만났던 것이다. 상국이 버릇처럼 가래침을 컥 뱉어냈다. 김석배와, 사주 관상 작명 택일 풍수 지리에 두루 능통하다는 술사 이로까지 만나봤지만 한국의 행방은 뜬구름이었다. 있으면 얼마를 있고, 먹으면 얼마를 먹는다고 그 사이 대놓고 구박을 한 것이 후회가 됐다. 한국에게 너무 소홀했었다는 생각이 들자, 덩달아 괘씸해지는 아내 은숙이었다. 설사 남편인 자신이 좀 과격한 언행을 일삼더라도, 그래도 저만은 눅눅해져 있었어야 할 것이, 이건 거기에 한술 더 떠 자거품을 물고 설쳐댔으니. 가정교육이 잘못되도 이건 턱없이 잘못됐다고, 허리를 움켜쥐고는 마른 가래침을 또 한번 탁 뱉어내며 집으로 향하는 상국이었다. 7. 참으로 많이도 걸었다. 오전 내내. 오후 내내, 또 이렇게 많은 불빛이 점등될 때까지, 걷고 또 걸었다. 사람들이 쳐다볼라치면 일부러 빌딩숲으로 숨어들기도 했고, 상국이나 석배의 눈에 띌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골목길을 택하기도 했다. 실수도 많이 했고, 그때마다 무안도 많이 당했다. 이국사람들이 그렇든디. 히, 요새 신식 여자들 밸 꼴이여. 콜라병 맨치로 몽땅 똑 같으여. 하구보면 양색시 닮아가는 건 아닌지 몰러. 양색시도 이국사람인께로. 그랬다. 벌건 대낮에 나돌아다니는 사람들 중의 열에 일곱은 여자들인 듯했고, 그 여자들의 일곱에 다섯쯤은 모양생김이 똑같았는데, 특히나 뒷모습은 전혀 분간키 어려웠다. 짧은 미니스커트, 아니면 반바지. 쪽 곧은 다리, 야들거리는 몸매. 커트머리인 것 같기는 했으나, 그의 뒷모습까지는 눈여겨 본 바 없었으므로, 한국으로선 매양 그여자가 그여자 같아 보였고, 하나같이 주연실 양을 빼어닮고 있었다. 헐레벌떡 뛰어가보면 아니었고, 헐레벌떡 뛰어가 보아도 똑같은 것 같아 두 팔을 딱 벌리고 막아서보면 또 아니었고. 정도가 지나쳐, 얼굴까지도 비슷한 경우가 한둘이 아니어서, "맞쥬. 댁이, 주우연실 씨. 울매나 찾았넌디유. 히..." 해보면, 쌩 하고 부는 찬바람이 또 아니었으니. 그럴 때마다 속으로, 요샌 한국여자들이 이국여자들이여. 하나같이 말짱 이국여자를 닮았당께. 이름을 바꾸던지. 뭔 팔자가 드셔 전한국이 여자가 양색시드라냐 밸꼴. 그랬었다. 텔레비전을 보면서, 아부지유. 아부지넌 알아보겠어유. 내 눈엔 부씨란 사람허고 콜링톤이란 양반하고 우째 구분이 안 서네유. 하면, 밸눔. 양반은 무신. 노랑머리에 백대가리 말짱 쌍눔인게라. 쇠여물 쑤득기 휘휘 젓어봐라 구분은 고사허고 허여멀금한 피돼지맨키로 그놈이 그놈 같아 보일팅께로. 그기 다 종자가 쌍눔인 게로 그러니라. 여즉 쇠꼬챙이로 밥 뭉다 안 하드냐. 뒤를 봐도 짐승맹키 엉거주춤 서서보고. 지 애비한티두, 거 뭣이냐. 그려, 유 허고. 지 남편 한티두 유, 새끼한티두 유. 이럼시 토막말 빼기 ㅇ다구 하드라. 군의원 말인게 참말일 것이고. 자고로 하등동물에 미물일수록 그 생김생김이 똑 같은 법이니. 뉘라서 참새 얼굴을 구분하겠고, 원생이 얼굴에 이름 달 재간 있겠드냐. 허니, 애초 종자가 그려서 그러려니 헐 것이여. 아부지넌유. 우린 뭐 유자를 안 쓰는 감유. 긋보다 더 햇갈리는 건 깜둥이대유. 진짜루 이 사람들 휘휘 섞어노면, 보세유 이 사진. 이 사람이 요 사람 같구, 요 애가 이 아 겉구. 판에 박아 두 요ㄹ게는 못 찍어낼 거구먼유. 그러고 보면 우리 조상들 참 신통허시기두 허지. 한 번만 잘못 사곳다 하믄 꿈자리까정 뒤숭숭한 게. 8. 그랬던 것인데 어찌하여 오늘날 이 땅의 여자들마저 그렇게 똑같단 말인가. 아무리 뒷모습이라 해도 그렇지 그래. 하나같이 슈퍼마켓의 콜라병이고 압출기에서 양산해낸 인형이라니. 눈이 침침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루종일 쏘다녔지만 아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자신의 지나온 뒷길을 돌아보며, 한국은, 특색도 없이 정형화되가는 수도 없이 많은 이 땅의 주연실 양을, 다시는 보지 못할 것처럼 멀리서, 그리고 조금은 겁먹은 표정으로 그렇게 쳐다보고 있었다. 어둠이 깔리고 하늘 그득히 덮쳐오는 비구름을 의식하면서, 그는 또 걸었다. 어둠이 오자 거리는 일시에 불빛으로 요란했다. '어린 왕자'에 나오는 그 어린왕자처럼 세상이 온통 낯설고 이상했고, 이렇게 많은 불빛을 한꺼번에 밝힐 줄 아는 점등인이 있다는 게 신기하기만 했다. 사람들이 있는 한 찾으리라 했다. 불빛이 있는 한 걸으리라 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혔지. 이게 길이여, 뜻도 있고. 가기만 하믄 되는걸. 어디군 가설랑 꼭 찾아내구 말겨. 부담감 ㅇ구, 편하구 또오... 그려, 좋아보인다구 혔어. 그분이 낼 좋아한다는데, 마음씨 곱구 이쁘구 그런 여자 두 번 다시 만나기 힘들거구먼. 뭐? 다방여자래서 우떻다구? 밸...지년은 우떻고. 이만큼 힘써준 석배 동상 체면두 있지. 그냥 휠쩍 내려가믄 갸 꼴두 말이 아닐 거구. 델구가면 아부지가 젤루 좋어허시겠지. 히... 아부지유 미누리될 샥시구먼유, 허믄. 오야, 참맬로 정갈허고 참한 규수로고. 다 니 복이다. 전씨 문중에 더없는 경사로고, 허겄지 히. 골목을 빠져나오자 한길이었다. 사람들 틈바구니에 섞여 건널목을 건너던 한국이 고개를 들었다. 빗방울이 후둑거렸고, 굵고 야무진 빗방울 하나가 그의 이마 위에 떨어졌다. 한국이 뛰었다. 빗방울 때문이 아니라, 4거리 때문이었다. 눈에 익었고, 그의 기억대로라면 이곳은 그녀와 첫대면했던 장소가 분명했다. 빗방울 사이로 불빛을 가려냈다. 목을 등뒤로 가지껏 꺾어들고는 뛰듯이 걷던 한국이 딱 멈춰섰다. 2층. 그곳이었다. 어둠에 가려진 윤곽이 희끔하긴 했지만 유리벽에 세워진 수차가 분명했다. 수막처럼 떠오르는 카페트와 불빛에 빛나는 동선으로된, ㄹ자로 꺾여올라간 고급스런 층계를 확인하면서, 한국이 그 앞에 우뚝 섰다. 그리곤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조용히, 도둑질이라도 할랴는 냥 고양이발로 걸어올라갔다. 문을 열려는가 했는데, 멈칫거리던 한국이 그냥 내려왔다.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게 된 어둠과, 그 어둠을 단번에 씻어내리기라도 할 듯 세차게 퍼붓는 빗줄기를 바라보면서, 한국이 그 자리에 앉았다. 9. 인조석으로 된 난간에 등을 기대자 차가운 한기가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부르르 몸을 떨며, 방금 나온 한쌍의 젊은이를 피해 상체를 새우등처럼 말아 길을 트여주자, 앞서던 여자가 빠르게 뛰었고, 뒤따르던 청년이 그를 흘끔 쳐다봤다. 그리곤 빗줄기를 의식한 듯 그들 역시 다른 행인들처럼 재빨리 뛰었는데, 여관골목이었다. 밸 사람덜... 빗방울이 무서운겨 어둠이 두려운겨. 존 건데 비는. 곡식이 크자면 내내 와야 헐 거구먼. 어둠도 그려. 순득넬 보라고. 보안등을 첨 달아줬을 때 울매나 좋어혔어. 대낮같이 환한게 떨어진 밥풀도 줘먹을 수 있겄다구. 했든기. 참, 조화는 조화여. 고 근처 벼농사는 몽지리 실패했응께. 곡식도 잠을 자야 헌다는 걸 알기나 했어야 말이지. 무릎에 턱을 걸고 앉아있던 한국이 무료했던지 난간을 똑똑 두두렸다. 아무런 소리도 없이 빗소리만 처량했다. 영상처럼 스치듯 지나는 차량과 행인들을 보면서, 한국이 언제까지고 그렇게 앉아있었다. 속으로 그는, 주연실 양이 나올 때까지 기다릴 것이라고 다짐했다. 그녀가 저 안에 있을지 없을지 확실히는 모르지만, 기다려야 된다는 사실만은 확실할 것 같았다. 더 이상 길은 없었고, 걸어온 길의 종점에 그는 앉아있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없다면, 그 뜻이 약하거나 밤눈이 어두운 탓. 밤눈도 어둡지 않고 뜻도 확고하다면, 도로공사측의 자못일 탓. 도로공사...사장은 하나님인겨. 그분 잘못은 잘못이 아닌 게로. 그럼 수로원...수로원도 그려. 하늘에 천사고 지옥에 사자인게. 그치야 사장 말대로만 따르고 행하는 기 가진디. 쪼매만 기다림 뭔 기별이 있겄지. 춥고 배 고프고, 또 졸립기도 했으나 한국은, 당연히 그래야 할 것처럼 그렇게 앉아 있었다. 집에선 날리 것지. 아녀. 맨날 ㅁ일이두 좋으니께, 니눔 혼삿일에나 전념하라구 혔응께. 이러다 농사 피롱은 안 헐라나 몰라...허긴. 이눔아! 농사가 대순겨. 산 입에 거미줄 치는 법 ㅇ고, 쌀독에 구리때 끼는 법 ㅇ니라. 농사야 다시 지먼 되고 빈 독이야 지게품이래도 팔아 채우면 되지만, 자식농사 그르치는 날엔 패가망신하는겨. 패가망신, 하면서 집안 일일랑 아예 꿈에서라두 생각지 말라 혔응께. 상국이...그려, 질루 갸가 걱정이구먼. 갸가 승질이 밸나서 그렇지 먹은 맘은 ㅇ는 앤디. 장개만 잘 갔어도 뭔 일을 혀도 크게 혔을 앤디. 벌통이 흥허자면 여왕봉이 실해야 허고, 집안이 잘 되자면 드는 복이 있어야 헌다고. 우째 그런 여자가 앤겼는지 몰라. 갸가 머리만 좋았지 눈은 사팔루 휘뜩 삔겨. 참, 밸꼴... 미안허구먼. 석배 동상. 암케두 내가 동상보다 먼저 식 올릴 것 같응께. 괜찮여. 동상은 아즉 나이도 있고, 무엇보다 사장 아닌겨, 사장. 10. 깐눔 맘만 먹으면 색시는 줄로 설 거구먼. 요번일만 성사되믄, 내 기성복 한벌, 그려 웬 기성복은. 딸러돈을 내서래두 가단마이 한벌 짜악 맞춰줄팅께. 근데 연실 씨는 있는겨 ㅇ는겨. 허...이잔 불꺼정 꺼뿌리네. 요상한 집구석. 한국이 일어섰다. 문이 닫히더니 주인인 듯한 사내와 종업원인 듯한 여자가 피곤한 걸음으로 한국의 곁을 내려갔다. 하품을 길게 하면서 한국이 그들 뒤를 따랐다. 쏟아붓던 빗줄기 대신 하늘엔 별이 고왔다. 주인인 듯한 사내와 종업원인 듯한 가시내는 어느새 종적도 없었다. 한국이 아쉽다는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며 방향을 가늠했다. 버스 승강장의 푯말이 지리를 알려주고 있었다. '중앙로'란 굵은 고딕체로 쓰여진 가로명 바로 아래, '의림랜드(시민공원)'와 '역전'이라는 지명이 대칭으로 보였다. 4거리의 왼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역전이라고 명기된 쪽이었고, 상국의 집이 있는 쪽이기도 했다. 해바라기처럼 하늘을 보다가, 물봉숭아처럼 길바닥을 보다가, 그것도 힘에 겨웠던지 눈을 감고는 하품을 길게 토해내기도 했다. 허재비처럼 흐느적거리는 꼴이, 멀리서 본다면, 노제를 찾아가는 망령이 현신한 것은 아닌가 할 정도였다. 지쳐 있었고 피곤해 보였다. "어서와요. 젊은이 쉬었다 가구랴. 따땃한 방에 몸두 녹이구." 결엔 듯, 누가 붙드는 것 같았으나 내처 걸었다. 헌데 이건 걷는다고 걷는 것이 아무래도 이상했다. 발걸음을 떼고는 있는데도 허공을 걷기라도하는 냥 하체가 허전했다. 물매미처럼 맴도는 게 장 그 자리가 그 자리 같다는 느낌이었다. 그제사 누군에겐가 옷자락이 잡혀있다는 걸 깨달았다. "자자, 다왔수. 바루 이 집이유. 우리집이." 한국이 황소 같은 눈을 부라리며 멀쩡하게 섰다. 옷자락을 잡고 따라온 여인이 우격다짐으로 잡아끌고 있었고, 엇부루기 황소마냥 뒷걸음질치는 한국이었다. 그녀의 나이 쉬흔 몇살쯤 되었을까. 몸집은 한국과 비등하게 비대했고 사방에 찌렁내쯤은 코도 안 풀고 들이킬, 산전수전 육박전까지 다 치러본 백전노장인 양 버티고 서 있는데, 얼결에 우시장에까지 끌려나온 순진하고 어리숙하기 그만인, 여물이나 먹고 밭이나 갈아온 촌뜨기 전한국으로서야 어디 필적할 상대인가 말이다. 된서리 맞은 열무줄거리처럼 뚝심 하나로 버티고 있긴 했으나,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서릿발로 허옇게 질린 꼴이라니. 참으로 난감하고 황당스러운 경황중에, 그래도 창피하고 꼴사나운 건 알았던지, "왜 이런데유. 남보기 숭허구먼...놔 봐유. 상국이, 동상 상국이 갸네 집을 염탐하구 있는 중인디. 지발...즘잖은 양반이." 하면서 고만 울상이었다. 11. "누가 아니랴. 즘잖은 냥반이 내숭허군. 어서 듭시다. 길바닥에서 이게 뭐랴. 일끈 예까지 잘 따라와선. 남이 보면 부부싸움한다 하겠수." 야학을 마치고 귀가하던 여학생 둘이, 옥신각신하는 그들 곁을 지나며 키득키득 웃었다. 저만치서 또 고만한 또래의 학생들이 걸어오는 게 보였고, 심심하게 서 있던 사람들이 기웃거리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었던지 주위가 조금씩 술렁거렸고, 한국의 얼굴이 무참하게 달아올랐다.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짐작이 서지 않았다. 부끄럽고 창피스럽고, 귓속은 웅웅거리기만 할 뿐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눈구덩이 속을 헤매다 방안에 들어왔을 때처럼, 온 몸이 후끈거렸고 전신이 얼얼했다. 난생 처음 당하는 일이었다. 어떻게 돌아가는 일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서 있기는 했지만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때 거리의 여자가 활개를 치면서 한국을 감싸 안았다. 한국이 흠칫 놀랐고, 전신의 맥이 쭉 빠졌다. 저쯤에서 다가오는 학생과, 기웃거리며 서 있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우뚝 커져 보였다. 한국이 아주 무기력하게 끌려들어가고 있었는데, 의외로 순순해 보였다. 집은, 역사로 들어가는 진입로와, 그 진입로에서 우측으로 꺾인 졸빗한 골목길이 만나는, 말하자면 대천과 세천이 맞닥뜨리는 합수머리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세천으로 거슬러 오르다보면 두 집 건너 한 집은 여관이나 여인숙이어서, 사람들에게는 여관골목으로 더 잘 알려진 곳이었다. 더구나 '두 집 건너 한 집'이 여관이나 여인숙인 반면, 한 집 건너 두 집, 그러니까 여관이나 여인숙이 아닌 집들은 대개 술집이거나 술을 파는 음식점이었다. 길바닥은 늘 술취한 사람들로 득실거렸고, 그들이 질러대는 고함과 괴성은 밤 늦도록 이어지고 있었으니. 비틀거리는 사내의 손에 머리채가 잡힌 계집이 악을 악을 써가며 희끔한 불빛 속으로 끌려들어가고. 서너 놈이 어깨동무를 해가지곤 유행가를 빽빽 부르며 이리 쏠리고 저리 밀리고. 컴컴한 하늘에다 대고 손가락질을 하면서 누구에겐가 일장 훈시를 하는 놈도 있고. 암코양이가 수코양이에게 쫓기듯, 이쪽 골목에서 저쪽 골목으로 후닥닥 내달리는 계집도 있고. 비가 내린 다음이었고 시간 또한 야심한 시각이긴 했지만, 그러한 제반 정황에도 불구하고, 이곳 여관골목은 어수선하고 뒤숭숭하기 그만이었다. 이 모든 광경을 자세히 바라볼 사이도 없이, 한국은 주변의 다른 어떤 건물보다도 낡고 퇴락한 시멘트벽돌집의 2층 맨 끝방으로 쑤셔박히듯 안내되고 있었다. 12. 하나의 성냥갑이 있다. 갑의 전면에는 '세이여장'이란 명호가 보이고, 높이는 5층인지 6층인지 확실치 않다. 엘리베이터가 있고, 다른 곳과는 특이하게도 맨 위층에 목욕탕이 있다. 이곳은 다름아닌 안마시술소이다. 여늬 안마시술소와 다른 점은 목욕탕이 겸비되어 있다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목욕탕과 안마시술소가 뭉뚱그려진 안마목욕장이라 생각하면 될 것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건물의 맨 위층까지 오르면, 자동문이 열리면서 다음과 같이 입력된 앵무새의 목소리가 3분 정도 반복된다. "이곳은 천상으로 연결된 지상의 마지막 층계입니다. 귀하께서는 다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곳까지 와 계십니다. 이곳을 지나시면 귀하께서는 천상의 첫번째 나라에 도착하실 것입니다. 두려우시거나 겁이 나시면 빨간 스위치를 누르십시오.조금 전까지 당신이 있던 지상으로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그러나 이곳까지 와서 다시 저 아래층으로 내려가겠다고 빨간 스위치를 누르는 사람은 없었다. 엘리베이터의 출입문을 나오면 작은 거실로 인도 되는데, 온통 별들로 가득했다. 머뭇거릴 사이도 없이 예의 그 앵무새소리가 또 반복된다. "귀하께서는 천상계의 첫번째 나라에 오셨습니다. 시그널보드에 귀하의 신용카드를 입력시키십시오. 감사합니다. 귀하에게 '작은천국'의 민권을 부여하는 바입니다. 코인을 받으신 다음 보안경을 착용하십시오. 주황색으로 빛나는 별이 귀하를 안내할 것입니다." 코인은 비취옥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물론 여러가지 있겠으나 그녀가 받은 코인은 진초록으로 빛나는, 아주 예쁘게 조각된 옥돌이었다. 보안경을 쓰자 무수히 빛나던 별들은 간데없고 신기하게도 주황색의 작은 별만이 반짝이고 있었다. 따라가면 따라갈수록 커지더니 한 3분 정도 걷자 주변이 온통 주황색으로 변했다. 좀더 가까이 가자 벽이 나타났다. 벽은, 주황색 빛살로 짜여진 빛의 그물이었는데, 어찌나 미세하고 찬란했던지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해내고 있었다. 그녀가 그 앞에 서자, 주황색과는 보색 관계인 파랑색으로 된,'천국의 언어로 말씀하십시오. 천국의 표준언어는 상상입니다. 방언인 생각도 허용합니다. 그러나 복잡하고 난해한 생각은 가급적 피해주시기 바랍니다.'라는 글자가 보였고, 곧이어 '코인을 벽쪽으로 던지십시오.'라는 명령어가 깜박였다. 그녀가 코인을 집어들었다. 비취옥에서 발산되는 푸른빛이 어찌나 강렬했던지 눈을 꼭 감으며 그 코인을 벽쪽으로 던졌다. 코인이 벽에 닿자 신기하게도 빛그물이 출렁거리더니 수많은 물방울이 색색으로 떠올랐다. 그것들이 제각기 뒤엉키고 쌓여지면서 하나의 환상을 보여주고 있었는데, 보는 사람에 따라 모양과 색깔이 달라져보였다. 13. 그녀가 눈을 지그시 감더니 무엇인가를 열심히 나꿔고 있었다. 한번, 두 번... 그녀의 손놀림이 아주 익숙해보였는데, 그 때마다 끼루룩끼루룩, 하는 들새 울음소리가 벽쪽에서 들려왔다. 그녀가 손놀림을 그쳤을 때는 물방울도 말끔히 지워졌고, 대신 사라진 벽 저쪽에서 누군가 걸어나오는 게 아닌가. 연분홍의 긴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어찌나 ㅇ고 투명했던지 속살이 훤하게 내비쳤다. 옥돌을 깎아 다듬은 듯, 살결이 아주 희고 고운 소녀였다. 소녀가 그녀를 대하자 반가운 표정으로 눈웃음을 쳤다. 오셨군요. 전 또 다른 사람을 찾으시면 어떡하나 했는데. 사실 요사인 소년을 찾는 여자분들이 부쩍 늘었거든요. 물론 남자분들의 대부분은 저같이 나이 어린 소녀들을 원하지만요. 반가워요. 이렇게 또 뵙게되서요. 모든 음성언어는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그들은 눈빛으로 의사소통을 해야 했다. 답답하리란 생각이 들지도 모르나 그들은 전혀 그런 것 같지가 않았다. 너무도 자연스러워 보였고 스스럼없이 대했다. 별도의 탈의실은 없었다. 칠채의 영롱한 극광으로 충만된 실내는, 다다를 수 없는 무한의 세계를 연출해내고 있었다. 보드랍고 미세한 일곱색깔 입자들이 실내의 전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는데, 은은하면서도 환상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그렇게 현란스럽지도 않았고 어지럽다거나 산만하지는 더욱 않았다. 남극하늘 위에 빛나는 오로라의, 가장 아름다운 한 자락을 잘라다 놓았다 생각하면 틀림없을 것이다.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이러한 빛의 입자들은 사실은 수증기였다. 실내 평균온도 46.5 C, 습도 87%. 넋이 나갈 정도로 황홀해 보이는 아름다움은, 여러가지 빛들이 이러한 수증기에서 뿜어나오는 미세한 입자들을 통과하면서 내는 착시의 일종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빛방울이 소리를 내고 있었다. 가장 정일하고 고요한 곳에 서 있어본 사람이라면, 그리고 아름다운 빛깔의 한복판에서 그 황홀함에 저절로 눈을 감아본 사람이라면, 그 소리가 어떠한 것인지 알 것이다. 잔잔히 흐르는 시냇물소리라 부를까. 소나무와 단풍나무잎새를 나비처럼 넘나드는 솔바람소리라 부를까. 아니면, 산 굽이굽이를 돌아 막 당도한 산사의 풍경소리라 부를까. 어쨌던 그 소리는 지상에서는 들을 수 없는 가장 아름답고 고아한 음악이었고, 세상의 그 어떤 악기로도 탄주할 수 없는 음률이었다. 그녀와 소녀의 발걸음이 나비의 날개짓처럼 가볍고 경쾌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소리도 없이 그녀의 옷이 벗겨져내렸다. 14. 잘익은 수밀도를 연상케 하는 얼굴. 수선화의 줄기처럼 가늘고 긴 목줄기. 소녀가 그녀의 드레스를 벗기자 우유빛 살갗이 거품처럼 일어나며 브레지어의 고리매듭이 바닥으로 구른다. 그녀가 거품을 닦듯, 천천히 그리고 아주 부드럽게 자신의 겨드랑이와 가슴팍을 쓸어내린다. 터질 듯 솟아오른 두 개의 꽃봉오리. 백옥처럼 희부얀 속살이 너무나 탱탱하여 건드리기만 해도 하늘 저 끝 위로 날아오를 것만 같다. 교교히 흐르는 몸매를 따라 오색찬연한 물빛이 빛나고, 한자락 연분홍 기운이 그녀를 감싸돈다. 눈을 지그시 감으며 여리디여린 허리를 꼬자 마지막 남은 속잎 한자락 표연히 날아내린다. 소녀가 그녀를 안아들었다. 작고 귀엽고 앙증맞게 생긴 소녀 역시 알몸이었다. 그녀를 안아든 소녀가 욕조가 있는 원형의 돔 중앙에 다가서자 이슬비 같은 물줄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아주 가늘던 물줄기가 점점 세차게 쏟아졌다. 얼마간 서 있자 샤워가 그쳤고, 소녀는 그제서야 욕조 속으로 들어갔다. 욕조엔 더운 물이 찰랑찰랑 고여 있었다. 우유빛이었고, 불을 지피고 있는지 보골거리며 끓어오르고 있었다. 피곤하신가봐요. 몸이 전보다 가벼우신 게 약해보여요. 소녀가 그녀를 욕조의 가장자리에 뉘이며, 역시 눈빛으로 말을 건냈다. 응. 그래. 아주 피곤해. 나 같은 여자, 늘 그렇겠지만 엊저녁은 정말 피곤했어. 하지만 엊저녁에 피곤했던 것은 순전히 내가 원해서 한 일이었어. 그런 남자... 글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몰라... 지나놓고 보니 좋은 사람이었는데, 너무 심했다는 생각이 들어. 하지만 뭘. 후일을 기약하여 다시 살 것도 아니고. 어차피 일회용인 거. 미련없지 싶기도 해. 한편으룬... 자학하지 마세요. 너무 피곤해보여요. 피부를 늙게 만드는 것은 미래의 시간이지만 마음을 병들게 만드는 것은 과거의 시간이거든요. 후회하고 뉘우치고 스스로를 원망하고... 성숙한다는 것이 가을이라면, 죽음을 의미할 뿐이에요. 소녀가 그녀의 몸 구석구석을 씻어내기 시작했다. 욕조의 물이 아주 따뜻했고 기분이 좋았으며, 몸 전체가 해면처럼 흐물거리더니 육신은 간데없고 정신만이 뜨거운 물 위를 둥둥 떠다니는 기분이 들었다. 그럴까...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인생이란 일어나서는 활활 타오르다 스러지는 불꽃과도 같은 것. 세상의 모든 생명이 다 그렇듯. 자신과, 자신과 관계된 대상을 부식시키지 않고는 단 하루도 지탱할 수 없게 만들어진, 곰팡이나 녹처럼 그런 것이라면...타오르는 불꽃...그것도 그렇지 불꽃이 일어난다는 건, 무언가를 태운다는 얘기일 것이고. 죽음이란 것은 그래서 의미있는 일이야. 15. 며칠새 어려워지셨네요. 못 알아듣겠어요. 소녀가 욕조에서 그녀를 꺼냈다. 희고 매끄러운 그녀의 알몸이 마치 잘 씻긴 무우같이 고왔다. 잔뿌리를 다듬듯, 소녀가 그녀를 시트 위에 뉘이곤 정성스레 다독였다. 그녀가 눈을 스르르 감으며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어렵긴. 떨어지는 낙조를 보아. 그 빛이 얼마나 아름답고 신령스러운가. 단풍도 그렇지. 피를 토하듯 서 있는, 그 강렬한 색채. 세상의 어느 것도 흉내내지 못할 거야. 그것은 '있음'에서 '사라짐'에로의 환희이고 희열이며, 창조주가 그에게 부여한 마지막 권능이거든. 죽는다는 것이 슬프긴 하지만 아름답기로는 그보다 더 한 것도 없지. 손님 중 누군가 이런 말을 했었지. 반짝이는 별이 일생을 통해서 가장 빛나 보일 때가 있는데 그것은 그 별이 스러지기 바로 직전이라고. 자학이란 것도 그래.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이 가장 인상에 남거든. 뉘우침이라든가 후회라는 것이 가슴을 멍들게 하고 정신을 병들게 할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우리가 성장해 가는 과정이고 어쩔 수 없는 일인 거야. 파란 색깔로만 있다가 모든 잎들이 진다면 세상은 참 멋도 없고 운치도 없겠지. 모든 인간들이 어린애로만 있다거나 청춘으로만 살다가 죽어야 한다면 이보다 더 큰 형벌도 없을 거야. 소녀가 그녀의 몸에 바디크림을 발랐다. 아주 끈적끈적하고 그러면서 매끄러운 향유였는데, 이상스러운 것은 색깔이 별나게 검다는 거였다. 그것을 다 바르고 나자 그녀는 마치 숯검댕이처럼 검게 윤이 났다. 소녀가 그녀의 얼굴을 가볍게 마사지했다. 길쭉하고 반들거리는 팔을 잔잔하게 토닥거리기도 하고 자근자근 주무르기도 했다. 소녀가 그녀의 몸쪽으로 서서히 밀착해 들어갔다. 그녀를 감싸안듯이, 소녀가 그녀의 몸 위에 자신의 알몸을 사뿐히 포개었다. 그녀가 입을 붕어처럼 벌리더니 뜨거운 입김을 토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그녀가 혼잣소리를 중얼거렸다. 자랑스런 무용담 같기도 하고, 어쩌면 참회의 고변 같기도 했다. 어젠...공치는 줄 알았지. 날씨도 구질구질하고, 그래 그냥 이불 한 둥치 포개놓고 자려는데 삐삐더라구. 요샌, 이런 장사 다 그렇거든. 무조건 삐삐야. 올 수 있느냐, 없느냐 물을 필요도 없어. 그냥 연락온 순번대로 찾아가기만 하면 돼. 그게 뚜쟁이한테도 우리한테도 서로 편하고. 마수걸인데 안 갈 수 있겠어. 더구나 다른 사람두 아니구 의자매 맺은 영춘아줌마더라구. 연락 온 데가. 택시를 잡아타고 딱 들어갔는데 이 아줌마 밑도 끝도 없이 올라가보라는 거야. 올라갔지. 16. 문을 딱 열고보니... 처음엔 웬 팔푼인가 했어. 참 별사람도 다 있지 글쎄. 내가 문을 열고 들어가니까 등치냐고 남산만한 사내가 눈을 꿈벅거리고 있는데 그 꼴이 어찌나 엉성했던지 꼭 사마귀 앞에 잡아다 논 풀무치 같더라고. 거짓부렁으로 그러는 것 같기도 하고, 진짜배기로 아무 것도 모르는 멍텅구리 같기도 하고. 해서 떠볼 양으로 슬며시 다리를 꼬고 앉았지. 일부러 스커트자락을 트고는 허벅지를 드러내 보였거든. 근데 이 작자 모르긴 뭘 몰랐던 모양이야. 수릿가재처럼 뒤로만 어기적거리는거야 글쎄. 재미 있겠다 싶어 먼저 말을 걸어봤지. 아저씨 이런 데 처음이야? 그러니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게 아니겠어. 그러면 그렇지 하는 생각에 그럼 몇번? 하니까 손가락을 꼬부장이 내밀어보이는데 엄지손가락만 접혀 있더라구. 그래서 네 번? 그러니까 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거야. 그러면서 아까보다 더 세게 엄지손가락을 접어 보이더라구. 이렇게 나머지 네 손가락은 쪽 세워갖고는 말야. 지가 놀리면 난들 못 놀리랴 싶어, 그럼 하루에 네 번? 그냥 히죽 웃는 거 있지. 앞산에 저 딱다구리 생나무 구멍만 뚫는다더니 이놈의 멍텅구리야말로 생떡만 씹고 앉았구나 싶어, 그렇게 억살이 좋아? 그러니까 그제사 편했던지 고개를 크게 끄덕이더라구. 속으로, 옳거니. 이 아줌마 내가 질기다 질기다 하니까, 오냐 니년이 질기면 얼마나 질기고 세면 또 얼마나 센가 어디 두고보자 해서 일부러 이런 변강쇠를 골라보냈구나 했지. 싫지는 않더라구. 몸도 찌푸듯하고 허리도 쑤셨는데 잘됐구나 싶었지. 근데 이 인간 널뛰기 한번 하고 나더니 폭 엎어져서는 불김에 흐물거리는 엿가락처럼 맥 못추는 거 있지. 아무래도 이상하더라고. 그래서 다시 물어봤지. 어째 그렇게 세다는 사람이 남의 점방에 풀칠만 하고 않았냐고. 그래 갖고야 어디 한자리에서 네 번은 커녕 나흘에 한 번인들 제대로 되겠냐고, 했더니. 내원 참 기가 막혀... 이런 덴 처음이라는 거야 글쎄. 무슨 일로 여관인가 여인숙인가 잔 적은 있지만 여자하고 이런 짓 해보긴 털 나고 처음이라며 징징 짜는 소리 아니겠어. 어찌보면 등신 겉고 또 어찌보면 순진한 것도 같고. 어쨌건 그 사람 그렇게 어름어름하더라구. 들 떨어진 게 아니라 이건 떨어져두 너무 떨어졌더라구. 울매나 무던하고 무르던지 손이 아파서 못 주무를 지경이더라니까.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사람, 속셈하는 방식하고 겉셈하는 방식이 똑같은 거 있지. 자기 혼자 하나 둘 셋 하고 셀 때, 손을 이렇게 엄지손가락부터 꼽아가잖아. 그 사람, 다른 사람한테도 그런 식으로 숫자를 가르쳐 준다는 거야. 여관에서 잠잔 게 무슨 일로 딱 한번 있었다는 걸 그런 식으로 말했던 거야 글쎄. 17. 그녀가 스르르 눈을 감자 그녀의 허벅지를 주무르고 있던 소녀가, 그녀의 무릎을 일으켜 세우더니 그 밑으로 자신의 다리를 끼워넣었다. 소녀가 떡쌀을 씻 듯, 천천히 그러면서도 야무지고 강하게 손목에 힘을 주었다. 바디팩으로 검게 빛나는 그녀의 피부가 시간이 갈수록 굳어지면서 팽팽해져 갔다. 검정색 바디팩은, 얇고 질긴 피막을 형성하면서 이완된 근육을 수축시켜 주름살을 없애주었고, 외포에 쌓인 노폐물을 빨아들여 피부를 싱싱하게 가꾸어주었다. 전신마사지를 하는 이유는 팩의 피막이 굳어지기 전에 노폐물을 흡착시키기 위해서였다. 미용효과는 아주 높은 듯 했고, 그래서 그런지 돈푼께나 있다는 여자들은 너나없이 이리로 몰렸다. 그래서 어찌하셨는데요. 소녀가 다음 말이 못내 궁금하다는 듯 아주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 봤다. 그녀가 하품을 길게 물으며 몸을 옆으로 뉘었다. 기지개를 길게 켜더니 가므스름한 눈빛으로 소녀의 말을 받아왔다. 농담삼아, 해우채라고 있는데 한푼도 안 줄 것이냐고 하자, 눈을 뚱그렇게 뜨더라고. 얼마냐고. 성의껏 알아서 달라고 하니까 바지주머니를 뒤적뒤적하더니 뒤로 돌아앉는 게 아니겠어. 그래 살며시 넘겨다 봤지. 놀랐어. 지독하더라구. 종이로 돌돌 말았는데 고무줄로 싸고 노끈으로 댕기고. 거짓말 안 보태 몇십 분은 더듬거렸을 거야. 무슨 보물단지라고 저렇게 싸동겼나 했는데, 알고보니 그럴 만도 하겠더라고. 만 원짜리 지폐가 후두둑 흩어지는 걸 보니, 나도 모르게 무릎을 탁 쳤지. 아녜요. 됐어요. 어차피 오늘 밤은 밖에서 주무셔야 할 거 같으니 기왕이면 우리 자리를 옮깁시다, 했지. 선불 맞은 괭이라도 좇아가야 할 판에 이건 괭이가 아니라 퍼런 배춧잎으로 내두른 수달인데 그냥 보내면 천추에 한이다 생각 했지. 뭔 말씸이데유, 하더라고. 그래, 따라와보면 알아요, 하군 피난 길에 송아지 내몰 듯 앞세워갖곤 시내에서 제일 유명하다는 '그린호텔'로 갔지. 무궁화 네 개짜리. 눈을 찡긋하며 스페샬, 그러니까 특실을 주더라고. 좋았지. 중이 고기맛을 알면 빈대가 안 남아난다고, 딱 그짝이었으니. 밤새도록 시달리고 나니까 진이 다 빠졌던지. 그치 새벽녁이 되자 코를 딩딩 골며 산송장인 거 있지. 미안하지만 어쩌겠어. 그냥 튀었지뭐. 뭉치째 몽땅 갖고 올까도 했는데, 그러단 죄 받지 싶어 차비나 하라고 얼마간 남겨줬어. 어차피 내 돈도 아닌 거 인심이나 써보자 했지. 누가 그러데, 월천공덕이란 것도 있다고. 호호호...! 그녀의 눈빛이 반짝하더니 이내 스르르 감겼다. 소녀가 박사로 된 덮개를 덮어주었다. 긴 침묵이 흐르고, 그리고 다시 얼마의 시간이 지나서였을까. 18. 소리가 있었다. 그 소리는 이른 봄 들판을 이윽히 바라보노라면 홀연히 다가서는 아지랑이와 새싹의 움트임 같기도 했고, 긴 꼬리별이 다가오면서 내는 잔잔한 불빛 같기도 했다. 소녀가 그녀의 몸에 달라붙은 바디팩을 제거하고 있었다. 얇고, 조금은 질긴, 까맣게 반들거리는 피막이 도르르 말리면서, 마치 잘 익은 수밀도의 속살처럼 희고 싱싱한 살갗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허물이 벗겨진 그녀는 소녀의 피부보다도 더 싱싱하고 고와 보였다. 엘리베이터 문을 열고 나오는 그녀는, 도시의 어떤 여성보다도 젊고 세련되어 보였으며 청순해보이기까지 했다. 몸 팔아 정을 사는 허튼계집이라고, 찌렁내와 곰팡내가 퀴퀴하게 배어나는 우중충한 여인숙 골방이, 그녀가 밤새워 야근해야 하는 근무처라고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 같았다. 말복을 베고 누운 태양이, '세이여장'이라고 씌어진 아크릴 간판 위에서, '종달이'처럼 혀를 빼물고 헐떡거리고 있었다. 양산을 받쳐든 그녀가 고개를 숙인 채 빠르게 걸었다. 사람들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급히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지난 봄. 똑같은 경로를 거쳐 지금처럼 집으로 돌아갈 때였다. 밤일을 생각해서 잠이나 푹 자두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별 뜻없이 걷고 있는데, 조막만한 강아지가 팔짝팔짝 뛰면서 갱갱거렸다. 접을 것도 없이 딱 핸디볼만 했다. 전신이 순백색으로 털복숭이였는데 발목에만 까만 털이 박힌 게 특이했다. 주인 없이 돌아다니는 천덕꾸러기 같지는 않았다. 따라오다 지치면 돌아가겠지 싶어 그냥 걸었다. 후달구어 쫓아보낼 수도 있었겠으나 쫄래쫄래 따라오는 모양이 귀엽기도 하였고,싫지가 않았다. 집 문앞까지 왔는데도 그 강아지는 돌아갈 줄 몰랐다. 애라 모르겠다 하고 지금까지 기르고 있는 중이었다. 어떤 소도둑에게, 네 이놈 어찌하여 남의 집 귀중한 황소를 훔쳐 왔는고, 하고 호령하자 그 소도둑 왈, 집으로 오다보니 길가에 긴 줄이 있었고, 지개고삐나 할까 해서 그냥 끌고왔을 뿐인데 집에 와서 보니 줄 끝에 황소가 매달려있더라고. 줄을 도둑질한 건 사실이지만, 결단코 소를 도둑질할 의사는 없었노라고 하소연 하더라는, 어느 주부대학 강사의 말처럼, 그랬다. 아니, 줄은 커녕 지푸라기 하나 갖고 온 적도 없는데 강아지 자신이 그냥 따라왔을 뿐인 것이다. 돌아다니는 강아지로 말하면 동물인 셈이었고, 무주동물(無主動物)은 선점한 자가 주인일 것이고 보면, 지금껏 그 치와와를 기르고 있다는 것은 법적으로 따져도 아무런 흠이 없는 정당한 행위일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귀엽고 영리했으며, 그녀의 발자욱 소리만 들어도 뛰어나오는 둘도 없는 친구로 지내는 사이였다. 새처럼 발랄하고 깨끗했다. '종달이'라고 이름 붙인 것도 그래서였다. 19. 그녀는 세상의 누구보다도 고독했고 소외된 곳에 있었다. 고독이 현실적인 대상들과의 관계 맺지 못함이거나, 또는 관계를 맺고자하나 그 대상이 없어진 경우를 말한다면, 소외란, 대상도 있고 또 그 대상들과 관계도 하고 있으나 내면의식이 그것들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상태일 것이다. 다시 말해서 바라만 보고 있거나 바라볼 대상이 없을 때 우리는 고독하다 하고, 서로 마주하면서 얘기도 같이 하고 악수도 나누지만 그들로부터 은연중에 따돌림을 받던가 스스로의 의식이 그들을 배척하던가 할 때 우리는 소외라는 말을 쓰는 것이다. 때문에 고독은 관심의 대상이 생겨난다면 자연적으로 없어질 것이며, 그래서 창조와 생산을 낳을 수 있지만, 소외는 솔가지의 송충이처럼 상대에게 해악을 입힐 뿐으로 파멸과 혐오만을 강요하는, 역사의 확장과 문화발전의 과정에서 생겨난 더러운 부산물일 뿐인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 두 가지 상태를 다 공유하고 있었으니, '종달이'를 만난 것이 그녀로선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렇게 위안일 수가 없었다. 시장경제와, 그 시장경제를 바탕으로 한 자본주의가 소멸되지 않는 한, 그리고 지배와 피지배라는 사회계급의 2중구조가 허물어지지 않는 한 소외란 말은 어느 곳에 가든 누구에게나 적용될 것이고 보면, 그놈을 깨뜨릴 재간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고독은 그렇지가 않았다.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떨쳐버릴 수 있었다. 어떤 이는 가을만 되면 바위 위에 턱을 고이고 앉아서는 아주 난감한 표정으로 한숨까지 푹푹 쉬어가며 궁상을 떨곤 했다. "아, 고독하구나." 그러면서 그는 늘, "이 넓고 많은 사람들 중에 나만큼 외롭고 쓸쓸한 사람이 또 있을까. 아, 참으로 고독하고 고독하구나."하면서 한탄하는 거였다. 하지만 이처럼 어리석고 딱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아, 나는 고독하다.'라는 말을 건성으로 하지 말고 가슴 저 밑에서부터, 그야말로 온 천지간에 존재하는 거라곤 저 혼자뿐이라고 곱씹고 곱씹어가며 진지해진다면, '아, 나는 고독하다.'라는 말만 갖고도 전혀 고독한 줄을 모를 것이다. 양산으로 햇빛을 가린 그녀가 빠른 걸음으로 길을 건너고 있었다. 젊고 아름다운 그녀의 어디에서도 외로움이라던가 쓸쓸함 같은 노년의 정서는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 발랄했고, 활기로 넘쳤으며 더없이 즐거워 보였다. 한국이 기지개를 늘어지게 켜며 부시시 일어났다. 눈을 부비며 하품을 길게 물었다. 손에 잡히는 이불홑청의 감촉이 어딘가 이상했다. 떨어지지 않는 눈꺼풀을 몇 번인가 꿈쩍거리던 그가, 그제서야 소스라치게 놀랐다. 20. 부윰한 빛발 사이로 드러난 방안의 광경이라니.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꿈일까... 모든 게 생소했고 낯설었다. 도대체 여기가 어디란 말인가.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도 막막하기만 했다. 이불을 확 걷어냈다. 벌떡 일어났다. 한국이 또 한번 소스라치게 놀라며 그 자리에 푹 주저물러 앉았다. 어딘가 서늘하다 했는데, 벌거벗은 사내가 벽거울 속에서 불쑥 튀어나왔던 것이다. 머리카락은 쑥대궁처럼 뒤엉켜 있었고, 움푹 패여진 눈자위와 튀어나온 광대뼈 하며, 몰골이 송연했다. 그게 자신이라니. 너무나 흉칙하고 혐오스러웠다. 이불로 몸을 휙 감고는 노려본다. 치렁치렁 늘어진 분홍빛 커튼. 밤색으로 빛나는 이불장. 밟고 지나가기가 송구스러울 만치 정갈하게 깔려 있는 갈색 양탄자. 대순처럼 쭉쭉 뻗어올라간 갈포벽지. 응접셋트가 보이고, 모든 게 고급스러웠고 한국으로선 그만큼 생소했다. 경대 위에 올려진 전화기를 꼬나 보면서, 한국이 그제서야 간밤의 일들이 기억나던지 고개를 푹 꺾었다. 그러다간 무슨 생각을 했던지 부리나케 침대에서 뛰어내렸다. 너절하게 널려진 옷가지를 뒤적였다. 팬티가 손에 잡혔건만, 그는 신경질적으로 휙 집어던졌다. 바지를 찾았다. 주머니를 뒤지는 손이 떨렸다. 허전했다. 아무 것도 잡히지 않는다. 반대쪽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는 한국의 손이 좀 전보다 심하게 떨렸다. 무언가 손에 잡힌다. 그러나 역시 허전했다. 손에 딸려나온 지폐를 확인하는 순간, 통나무처럼 쓰러졌다. 미친 듯이 옷이란 옷을 다 털어냈다. 서랍장을 뒤지고 침대 속속들이 훑어냈다. 끝내 어디에서도 찾아지지 않았다. 한국이 침대에 맥없이 걸터앉았다. 바지주머니에서 걷어낸 만 원짜리 두 장과, 하혈처럼 불구죽죽한 천 원짜리 지폐 몇 장을 넋이 나간 듯 바라보던 한국이 고개를 슬몃 틀더니 입술을 씰룩거렸다. 가슴이 미어졌다. 앞이 캄캄한 게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흙빛으로 굳어진 얼굴 위로 기어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주르르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바닥으로 훔치며 애절하게 흐느꼈다. "흐흐흑...! 나쁜 년... 그기 우떤 돈인데...흐흑...!" 때가 꼬질꼬질하게 낀 와이셔츠 사이로, 늙은 아버지의 손때가 묻은 실밥이 뿌옇게 드러났다. "나쁜 년... 꼬추 팔아 갚는다구...흐흐흑...! 사정사정혀서 빌린 농사자금이란 말여. 소금 찍어 묵으민서 색시 하나만 잘 ㅇ어오라고... 괴기는 무슨 괴기냐고 흐흑... 대쪽같이 마른 아부지가 사정사정혀서 ㅇ어준... 그 돈이 우떤 돈인데 그걸 후비가넌겨...연실 씨 허고 저녁 한 그럭두 못먹어 봤구먼...흑...!" 21.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한 절망감으로 언제까지나 그렇게 앉아 있었다. 간밤의 일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육덕이 실한 거리꾼에게 붙잡혔던 일이며, 퇴락한 여인숙의 2층을 시작으로, 즘잖은 양반이 너무 보채지 말고 몸이나 녹이고 잠깐만 기다리라는 말을 끝으로 잠이 들었는가 했는데 난데없는 처녀가 들어왔고... 그려... 따라가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이눔의 좆끝이 왼수여... 연실 씨는 뭔 낯으루 만나야 헐지 몰라. 꽃값인가 해우챈가 달랄 때 ㅇ다구 딱 잡아 땠어야 허는 건데... 고년이 돈 땜에 알랑방구 꾸는지도 모르고 숙맥겉이 허자는 대로 따라 혔으니...아부지 말이 딱 맞구먼유. 남자는 자고로 세 끝을 조심혀야 헌다. 그 중에서도 셋바닥 끝허고 손 끝은 조심헌다구 허믄 돼지만, 뭣이냐 사타구니에 달린 거시긴 다른 겨. 조심헌다구 혀서 될 일이 아니란 말이시. 성인군자라 해도 불끈허믄 맥을 못 추는 기 미색인 겨. 오죽허믄 부처님도 재색지화넌 심어독사허다구 안 혔것냐. 맞구먼유. 것두 모르구 깝빡허다니... 질루 연실 씨를 우째 만난데유. 흐으... 넋빠진 놈마냥 훌찌럭거리며 앉아 있는데, 갑자기 전화벨 소리였다. 가슴이 또 한번 철렁했다. 심장이 졸아들며 고드름처럼 매달렸다. 왕방울처럼 툭 튀어나온 눈알을 껌뻑거리며 한국이 뒤로 주춤거렸다. 제까짓게 울리다 지치면 그치겠지.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따르릉거리는 벨소리가 갈수록 커지면서 간신히 매달려 있는 심장을 줄기차게 물어뜯고 있었다. 홑이불로 몸을 칭칭 감은 한국이 조심스럽게 전화기 앞으로 다가갔다. "편안히 주무셨습니까. 저희들은 또 아무런 연락이 없으시길래 궁금해서 전화들었습니다. 부탁하실 게 있으시면 언제든지 카운터로 연락 주십시오. 서어비스 넘버는 일레븐투입니다. 백십이." 수화기를 들자 막혔던 말이 쏟아져나오는데, 한국으로선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저 시간이 됐으니 나가라는 말이겠지 했다. 걀겨...간다고. 숭악헌 집구석... 요기를 느낀 한국이 화장실을 찾았지만 여의치 않았다. 승질 나는데 아무 데나 깔릴 거라고 음침한 곳을 들어서는데, 웬걸 밥사발보다도 깨끗한 사기그릇이 튀어나왔다. 그려... 이제 보니 여그가 양화장실 아닌가벼. 요상한 집구석...양눔은 뒤를 봐도 짐승맨키로 엉거주춤 서서 본다드니, 아부지 말이 맞구먼. 밸꼴... 내를 양눔으루 알었능가...요상헌 집구석... 억울하다 싶기도 했고 불끈 치솟는 화증도 있고. 에라이, 드러운 집구석 오줌이나 쳐바를 거라고 틀어쥐고 있던 거시기 빠이쁘를 탁 풀어놓는데, 그 굵기가 어찌나 굵던지 50밀리 가정용은 갖다댈 것도 아니요, 털끝 하나 안 보태 열 가구 50명은 넉넉히 먹고도 남을 영업용이라. 그만한 굵기에서 분출돼 나오는 물줄기였으니 수압 또한 오죽하겠는가. 물마에 투가리 깨지는 건 애들 물장난으로, 놋요강이 아니라 철판을 들이민다 해도 창호지처럼 구겨져나갈 판이었다. 22. 소변을 다 보고난 그가 욕조의 수돗꼭지를 틀었다. 뜨거운 물이 쨀쨀거렸고, 다시 그 옆에 붙어있는 수도꼭지가 보였다. 또 틀었다. 알맞게 데워진 물이 시원스레 쏟아져 나왔다. 벌거벗은 몸이었다. 여름이라곤 하지만 서늘한 기운이 하초를 타고 올라왔다. 주변을 쓰윽 둘러보던 한국이, 한숨을 탁 쉬며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욕조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곤 진저리를 치듯 머리를 내둘렀다. 눈에서 흐르는 물기가 여전히 칙칙했다. 드응신. 내가 눈이 휘뜩 삔겨. 작두날루 싹둑 비 내든지...그 돈이 우떤 돈이라고 암케나 굴리다니...오살할...후비갈 기 따루 있지. 연실 씨를 무신 면목으로 다시 본댜... 그래놓고도 무엇을 잘했다고 불뚝불뚝 일어서는 거시기 수수목이 야속했다. 뜨거운 물이 샅에 닿자 갓난애기 엄지발가락맨치로 줄어있던 수수목이, 그새를 못 참아 용두질로 발광을 해대는 것 아닌가. 아무리 이목이 없는 미물이라고 해도 그렇지 그래. 염치라는 게 있고 낯짝이라는 게 있는 데, 이건 주인놈이 허재비처럼 울고 있거나 말거나, 떨거지 신세로 빈 깡통을 차고 앉았거나 말거나, 대가리만 내밀면 지랄발광으로 개거품을 물고 나대고 있으니. 애라이 잡놈의 수수목. 밀밭에 가라지 뽑듯, 줄거리째 뽑아버릴 거라고. 뽑다가 뽑다가 뽑히지 않으면 아주 묵사발로 짖뭉개어 다시는 꼴값떨지 못하게 요절을 내고 말 거라고. 훑이질하듯 도리깨질하듯, 비벼대고 잡아뜯고 태기를 치면서 짖이겨 대는데, 잡놈의 거시기 그때는 배알도 있고 씨알도 있던지, 머리채를 내두르며 길길이 날뛰는 꼴이 가히 역발산기개세라. 아서라 이 잡것아. 아무리 니눔이 디밀기를 잘해 천리준마 뺨을 치고, 잡아빼는 기운이 항우장사에 필적하더라만. 어림ㅇ다 이눔아. 아무리 용을 쓰고 기를 써도 넌 내 손 안에 있는겨. 니눔의 쥔은 이 전한국인겨. 내 사전에 니눔 겉은 살붙인 달아둔 적 ㅇ응께. 쇠꼬챙이처럼 딱딱하게 달아오른 수수목을 인정사정없이 짖이기고 패댔다. 견디다 못한 수수알이 우수수 떨어져내렸다. 누런 수수알이 욕조 안에 흥건했다. 그렇게도 기세 좋던 수수목이 맥없이 푹 꺾였다. 굵고 탐스럽던 대궁이, 수수알이 다 털어지자 고만 삶긴 고구마 줄거리처럼 흐지부지했다. 한국이 입을 딱 벌리더니 수수목처럼 스르르 쓸어졌다. 수도꼭지에서 흘러나오는 뜨거운 김이, 한국과, 한국이 뿌려놓은 수수알을 휘감고 있었다. 해는 어름어름 중천에 섰고, 바람 한점 없다. 어디로 간단 말인가. 숙박지를 빠져나와 대로변에 다다르고 보니 그저 막막하기만 한 한국이었다. 23. 다리가 후둘거렸고 가슴이 답답했다. 건물과 골목과, 그 골목 속으로 삐쳐들어간 길바닥이 심란했다. 늘 보아오던 승강장의 푯대와 우편함까지도 어젯밤 여자의 부위처럼 낯설고 보기 민망스러웠다. 바람이라도 있으면 쏠리는 대로 간다지만 바람은 고사하고 휘둘리는 화살표 하나 보이지 않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목표가 뚜렷했고 목적지가 명확했었다. 천생연분, 찰떡궁합. 맞어, 내 색시는 누가 뭐라해두 연실 씨구먼. 짚새기도 짝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낼루겉이 모지러는 눔도 맞상대가 있구먼. 히... 그랬는데, 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단 하룻밤 사이에 한줌의 꿈으로 깨지다니... 꿈도 그냥 꿈이 아니라 뻘밭 속으로 흘러든, 다시는 찾지 못할 유실몽이 아닌가 말이다. 개꿈이었등겨...내가 개새낀게...개새끼도 그런 짓거린 안 할 거구먼. 주제에 고매헌 연실 씨를 생탐하다니... 주위는 여전히 조용했고, 정지한 채로였다. 죽었나... 아닐 거구먼. 어젯밤에 죽은 건 내 혼저뿐인겨. 죽은 눔이 보니께 다 죽어 보이는 겨. 술 취한 눔이 즘잖한 전봇대 붙잡고 찍자붙는다고, 딱 그짝인겨. 내가 시방. 아무리 둘러보아도 산막처럼 어설프기만 했다. 숨을 죽이고 봐도 숨을 내쉬고 봐도, 옴짝 않고 서 있는 빌딩이었고 까닥 않고 서 있는 승강장 푯대였다. 내 이년을 붙잡기만 하믄...그려. 전한국이 니가 등신인겨. 풀풀 쉬어빠진 수꾸무신기 한 사발에 삼십 만원을 날리다니...아가리가 미어지던 창사구가 짜개지던 한 입에 탁 털어넣고 말 일이지. 수꾸무신기 떡맛이 있으믄 울매나 있다고 밤꺼정 홀랑 새워감시로 잡쉈다냐 잡숫길. 등신이여 등신. 떡맛 좋은 거만 알었지 잠맛 곤한 줄은 모른 등신인겨... 물에 빠진 놈 불 구경하듯이, 마디마디 감창가락을 넣어가며 팔자에도 없는 떡타령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끼익! 하는 소리가 났다. 하늘이야 땅이야, 멀겋게 서 있던 한국이 혼비백산했다. "야아이! ...팔눔아! 뒤즈고 싶으면 저 위루 기어 올라가든지. 초장부터 재수가 없을라니까 개새끼 치고 송장값 물어줄 뻔했잖어 이거. 그래도 이 자식이 눈깔에 흑태가 끼었나. 뭐야, 임마! 뭘 잘했다구 눈깔을 치뜨고 내리뜨고... 맞장 한번 까구싶다 이거냐! 쓰발자식. 퉤에...!" 아슬아슬하게 비켜선 택시에서 욕지거리가 마구 튀어나왔다. 한국이, 여우굴에 든 오소리처럼 슬금슬금 삐치더니, 후닥닥 튀었다. 간덩어리 하나쯤 길바닥에 떨어졌을 법도 하건만 뒤도 돌아보지 않고 줄행랑을 쳤다. 24. 택시가 보이지 않을 때쯤 가서야 걸음을 줄였고, 덜컹거리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입천장에 달라붙어있는 숨을 떼어내기 위해 엉덩이를 내리깔고 보니 굴뚝이 하늘마당까지 솟구쳐올라간 무슨무슨 탕이었다. '탕'이라니... 음식점인가 했다. 그러고보니 시장기가 들었다. 갈 곳이 없으니 차비는 필요치 않을 것이고. 그래, 개탕이면 어떻고 사탕이면 어떤가. 시원한 탕국물 한 사발이 그토록 간절할 수가 없었다. 아무려면, 풀어지고 쉬어터진 수꾸무신기 한 사발에 비견되겠는가 싶어서, 일단은 들어가보기나 하자고 일어서는 한국이었다. 후둘거리는 종아리를 어찌어찌 추려잡고는, 탁발승이 교회 근처 얼씬거리듯, 마실 나온 강아지 잔나비떼 훑어보듯, 가지 끝에 간당거리는 자벌레 형상으로 남은 거리가 몇 발자욱이나 될까 재고 있는데, 회전문이 삥그르 돌더니 경찰서 수위처럼 짜악 빠진 인물이 딱 백혀오는 게 아닌가. 훤칠한 키에 풍덩한 몸집이 어디로 보나 시원시원해 보였고, 헛기침 소리까지도 거창해 보였다. 자라목처럼 쭈욱 빼고 있던 한국의 모가지가 달팽이처럼 또르르 말렸다. 눈을 꿈뻑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얼굴인데, 갑자기 당하고 보니 생각이 멀었다. 마음 속에 다져진 인물이라면 악한은 아닐 터였다. 그는 자신에게 몹쓸 짓을 한 사람의 얼굴은 금방 잊어버렸다. 머리가 나쁜 탓이기도 했지만, 담아두고 복수할 여력이 없었다. 또 그만한 갱기나 강단도 없었다. 무른 호박이 서리 맞는다고, 이러한, 이유 같지도 않은 이유로 하여 본의 아니게 칠뜩이 취급도 많이 받았고 조막만한 벌거숭이들에게까지도 눈 아래로 당했다. 새로 쓰는 '흥보전'이 있다면 주인공으로 내세우면 딱 들어맞을, 그런 으설픈 위인이었다. 어쨌건 호의적인 감정으로 무슨무슨 '탕'에서 방금 나온 사내를 짚어내려가는 한국이었다. 그러나 쪼록거리는 소리만 요란할 뿐 그 어떤 기억도 되살아나지 않았다. 한국이 사내에 대한 기억을 포기하고 탕집으로 들어가려 할 때였다. 사내가 차에 올랐고, 검정색으로 반질거리는 승용차가 막 출발할려는 찰나, 한국이 두 손을 번쩍 치켜들면서 차 앞으로 뛰어드는 게 아닌가. "맞지유! 선상님이, 유우...그려유. 이분이 맞지유." 한국이 본네트 앞에다 대고 허리를 척 꺾으며 달뜬 목소리로 아주 절박하게 외쳐댔다. "지난번 그왜, 닥괴기집에서 만났던 선상님이 맞지유...!" 창유리가 스르르 내려지더니 운전수가 고개를 쭈욱 내민다. 웬 놈의 강아지가 털도 없이 짖어대나 하는 눈치였다. 25. "누구슈 댁은. 어른 잘못 본 모양인데, 비키슈. 이 어른은 종합물산 대양," "그러유. 대양주식회사 허고 또...그러유. 대양복지원 원장님이 아니신감유." 한국이 한 손으론 차의 본네트를 잡고 또 한손으론 깃발처럼 무엇인가를 휘두르고 있었는데, 희끗희끗한 종이딱지가 흔들릴 때마다 노란 금분이 반짝반짝 빛났다. 그제사 운전수가 운전대를 놓으며 뒷자석을 돌아봤다. 넉넉하게 앉은 사내가 푸짐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회장님께 볼일이라도 있소. 바쁘신 몸이라 다음에 얘기합시다. 전화를 주시던지." 누그러지긴 했으나 퉁명스럽긴 여전했다. "부, 부탁이 있으서 그런디유. 어려운 일 있음 어려워 말구 찾아오라구 혀서...전화두 디려 봤구먼유." 운전수가 다시 뒷좌석을 돌아봤다. 난감하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러나 뒤에 앉아있는 사내는 무슨 생각이었던지 또 고개를 끄덕였다. "차암 나원. 그래 무슨 부탁이오. 간단하게 말해보슈. 명료하게." "다믄 미칠 동안... 그려유. 사날이래두... 어디 취직좀 안 될까 히서유." 운전수가 웃었는데, 웃음소리가 실없이 컸다. "입만 살어있음 될 거구먼유. 아무 일이래두 좋으니께. 집이 ㅇ어서가 아니라 면목이 ㅇ어서 그렇구먼유. 여기 이..." 한국이 사내가 준 명함을 운전수에게 들이댔다. 마치, 이게 네가 써준 보증수표가 아니냐는, 그런 조금은 당당한 자세였다. 뒷좌석의 사내가 턱짓으로 운전수의 옆자리를 가리켰다. 태우라는 뜻이었다. "저렇게 모자라는 놈을 어디다 쓰시려구요. 제가 보기엔 밥만 축내는 게 아니라 속까지 썩힐 놈으로밖엔..." "이 사람이...!" 사내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어보이자 찔끔하는 운전수였다. 문을 열고 나오더니 한국을 자신의 옆자리에 태웠다. 한국을 태운 승용차가 도시 저쪽으로 사라져갔다. 매춘과 변태와 살인과 도박과, 인간의 상상으로는 도저히 그려낼 수도 없는 해괴하고도 간악한 음모와 범죄가 판을 치는, 단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고 단 한시도 잠잠할 때가 없는 광란의 도시. 온갖 욕망과 탐욕이 끝간 데를 모르고 불타오르는 도시의, 그 불꽃을 뒤로 남기고 한국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밤하늘의 불꽃 위로 날리는 불티처럼, 그렇게 속절없이 사위어져가고 있었다. 5. 해인 1. 광막한 수평선을 가로질러 거침없이 짓쳐오는 거대한 물기둥! 태산처럼 치솟아 올랐다가는 사태처럼 무너져 내리는 노도의 물결! 천군만마를 호령하듯, 맹금의 무리를 질타하듯 천지간을 포효하는 함성! ...그리고 포말! 유리구슬처럼 빛나는 파랑의 물결 위로 검붉은 태양이 솟아오른다. 휘광한 빛의 세계다. 말씀 하나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이 위대하고, 그 말씀으로 지으신 우주 대자연이 참으로 위대하다.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 돌 하나에 이르기까지, 어디 존귀하지 아니하고 막중하지 아니한 것이 있으랴만, 신새벽의 대양과 태양에 견줄 것인가. 아무리 가슴이 깊은 성인이라 해도 저 파도의 한 자락만큼이나 깊겠으며, 제 아무리 지혜로운 현자라 해도 한올의 빛줄기만큼이나 밝을 것인가 말이다. 솟아오르는 태양의 저편, 무엇인가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무수히 명멸하는 불티였다가 눈발이었다가, 점점으로 날아오른다. 가늘고 긴 끄나풀이 되기도 하고, 바람에 남실거리는 꼬빡연이 되기도 한다. 새떼였다. 회백색으로 빛나는 흰물떼새의 무리가, 하얀 포말을 안고 짖쳐들어오는 파도처럼, 그렇게 몰려오고 있었다. 파도가 자연현상으로 빚어진 신비라면, 저 수백 수천의 흰물떼새의 무리는, 살아있는 생명들이 어우려져 벌이는, 지상의 가장 아름다운 축복이리라. 장엄하고도 화려한 아침의 바다는, 태양과, 태양볕에 반짝이는 퍼득임으로 그렇게 열려지고 있었다. "어이...! 전씨! 조는겨 자는겨." "으음... 으..." "낸지럴... 졸라믄 그늘로 들구 잘라믄 방으루 들어. 전씨...! 씁장이 온다니께." 상국이 눈을 번쩍 떳다. 까무룩이 졸았던 모양이다. 눈을 비비적거리며 선하품을 입에 물고 있는데, 물새떼보다 먼저 날아온 도십장 강종술이 눈에 띄었다. "자알들 논다. 잘들혀. 틈만 나면 졸고 짬만 나면 요령이니. 그ㄹ게 부지런을 떠는 작자가, 뭐어? 낼쯤엔 도마리 짓고 한 며칠 푹 쉬자고?" "고만해둡시다. 졸리는 거야 어떻허우, 생리적 현상인데. 허고 일도 일할 맛이 나야 하는 게요. 보슈, 이게 어디 각구목인가. 왜장녀 사리마다를 갖다대두 이렇게까지는 흐지부지 안 할 거외다. 화냥년 불러갖고 엿가락 멕이는 게 낫지. 이래 갖구야 요대길 깔아줘두 못 자겠수. 내원..." "뫼야...?" 2. "하두 답답하다보니 열통 터져서 졸지두 못하겠다 이 말이오. 야긴 즉." "엇쭈. 게으른 망아지 굴레미 욕하고, 바느질 서툰 갖바치 쇠가죽 나무란다드니, 으설픈 소목쟁이 연장타령이나 하고 앉았고...싹수가 노오랗다. 종자개량하기 전엔 감나무에 고욤이고 귤나무에 낑깡이다." "습장 나리 너무 그러지 맙시다. 싹수가 노랗다고 적두팥이 그루팥 되겠수. 걸 잘라본들 메조 자리에 차조 올라오겠수. 및 억대가 왔다갔다 하는 그 귀하고 엄한 섯다판에 끗발이 높아 흑싸리껍데기가 튀는 줄 아슈. 아스슈. 노름판이나 공사판이나 삼팔 잡고 따라지로 기는 놈 있고 광땡으로 후리는 놈 있게 마련인 거유. 쉽게 말해 우리네 겉은 종자 삼팔은 삼팔인데 따라지라 이 말이유. 뭔 말인지 감 잡히슈. 종자개량...? 씨돼지 불알 까서 꽃사슴 맹그는 거 봤수. 개량종자는 있어두 종자개량은 ㅇ는기 세상이치우. 이제야 아시겠수. 허니 전씨나 내나 이모냥 요꼴로 살팅께 왈이왈율 말라 이 말이우. 허고, 전씨 말이 생다지 어거지도 아닌 건 습장 나리께서도 말한 바 아닙디까. 소뼉다구도 울궈내면 구녕이 뚫리는데 이건 오리목 하나루 천리를 댄다구." "자알들 논다. 초록은 똥색이라드니..." 상국의 불퉁그러진 말대꾸만 가지고도 한 사람 부아거리는 톡톡히 될 터인데, 거기다 눈치가 코치고 쓸개가 오줌통인, 해서 입담 걸기로야 망우통이 비좁다 하고 나설 고성만까지 상국의 역성을 들고 나왔으니, 십장인 강종술로서는 승산도 없는 입씨름이 되고 말았다. 대거리로 나대는 그들을 타이를 정도 아니요, 상사의 명령에 불복하였으므로 인사기록카드의 고가란에 '가가가'로 평정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을 일도 아니었으니, 들어도 못들은 체 보아도 못본 체, 뒷짐이나 짚다가 슬그머니 꽁지를 빼는 게 가지였다. "일혀...! 낼 식전부턴 빰뿌차 대절해놨응께. 느들 땜에 빵꾸나면 구상권 발동이여." 강종술이 코를 힝 풀고는 아시바(가설공)쪽으로 가자, 상국이 강의 뒤쪽에다 대고 퇴에...,하고 가래침을 뱉었다. "쓰으발눔. 따라지두 못되는 망통인 새끼가...낙하산줄 하나 믿고 까불어설치는데, 운제고 한번 복상 씨에 갈구리 백힐 날 있을 거다." 고성만이 상국의 가래침 위에다 쌍시옷을 뿌려댔다. "뭔 새따먹은 소리냐. 고가 너야말루 노가리를 까는 건지 설래발을 푸는 건지 도대체가 헷갈린다. 쟈 끗발이 망통이면 우린 그럼 노상 그리기만 하는 뱀발이라냐." "전씨가 몰라서 하는 소리여. 저 인간 전력이 뭔지나 알어?" "전력...? 전력이면... 빳데리?" "무식한 인사. 이전의 경력 말여. 국회에서 걸핏하면 걸고 넘어지는, 그 왜 변절자니 훼절자니 해가면서 따지고드는, '과거 있는 여자'할 때 그 과거 말여." 3. "난 또... 노가다 십장 전력이 있어봐야 디모도 아니면 도비였겠지. 근데 물외밭에 개똥참외 구르는 것도 아니고,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유분수지 이판에 빳데리가 뭔 말이여." 상국이 이내 시큰둥했고 선하품을 길게 물었다. 꿈결엔 듯 바라보던 창창한 해변의 풍경이 삼삼했던 것이다. 남들은 다 가는 바캉스철에 자가용 타고 휘파람은 못 불 망정 새참그늘에 꿈도 못꾸는 신세가 처량하기도 했다. 그러나 고가 이놈은 무엇이 신이 났던지 마른침까지 삼켜가며 때기를 욱신거렸다. "들어보라고. 강 씁장, 아니 강종술이 저 인간 전력이 상사라는 거여. 갈구리 세 개짜리. 짬밥 경력이 장장 이십 몇 년이라더라... 하여간에 군출신이라 이 말 아닌가배." "군출신? 상사? 상사믄...높은데. 근데? 그게 어쨌다고. 대한남아 쳐놓고 군출신 아닌 사람 있기나 하대? 이 전상국이도 육군상병 전상병인데." 중사란 말에 조금은 의외라는 듯, 놀라는 표정이긴 했으나 별 관심은 없다는 눈치였다. "이거야 어디, 벽창호에 대고 봉창 뚜드리는 게 낫지... 사람을 자그만치 수천 명이나 쏴 죽였는데도? 그게 무슨 자랑거리라고 을진지 충문지 하는 무공훈장까지 받아갖고 명태를 했다는데도? 그것도 모자라 국내 유수의 건설업체에 상무자리까지 진설해주어? 쓰읍장...? 한끝 갈 때 두끝 가면 끝수로 먹고 아홉끝 갈 때 여덟끝 가면 운수로 먹는 노름꾼하고, 손끝 갈 때 발끝으로 발려먹고 통수로 갈 때 꽁수로 속여먹는 야바위꾼하고 이래 먹으나 저래 먹으나 돈 놓고 돈 먹기는 마찬가지라고? 어림 반푼어치도 ㅇ는 말. 도둑놈 막으려고 철망 치는 거 하고, 물고기란 물고기는 씨도 안 남기고 잡아들이는 투망 치는 거 하고 어째 그게 그거여, 그게 그거가. 치는 방식부터, 치는 자세, 그 뭐냐...그ㄹ지 의도도 틀린겨. 대권에 눈이 멀어 민권을 우습게 아는 놈들, 민권을 유린하면 정권을 잡을 줄 알았겠지만, 흐응! 어림없는 말. 민심이 천심이라고 했거든 가당키나 한... 가장(家長) 자리에 앉겠다고 지 에미 애비를 때려 죽이는 패륜아들과 조곰도 다를 게 ㅇ는 인간백정이여, 그놈들이. 대권 잡겠다고 민권을 뚜드려 잡었잖여, 천인공노할..." "...?" "한두 사람을 죽인 놈은 살인자로 몰리고, 수천 수백만 명을 학살한 놈은 영웅으로 대접받는 게 힘의 논리라고는 하지만 그게 역사는 아닌겨, 정의는 더더욱 아니고. 전씨." "히야...그놈이 그런 놈이다? 광준가 어디선가 한세상 떠들썩하게 했던... 하지만 뭐하겠냐. 지눔두 오죽하면 생목숨 멱을 땃을라고. 다 위에서 시키니 저 안 죽을라고 했겠지. 더구나 다 지나간 과거 얘기 아니냐. 가만 놔 두면 절로 아물 거 괜히 ㄱ어 생채기 낼 건 또 뭐 있고. 당장에 목구멍이 포도청인데, 고만하고 저 자식 말마따나 얼릉 일이나 끝내자고. 낼부턴 공구리 비빈다는데." 4. "내원...그만큼 얘길해줘도. 과거...? 그래 과거라해서 다 덮어두면? 무식해서 잘은 모르지만, 과거가 뭐여. 지금이 지나가면 과거가 되는 것 아니 것어. 과거라구 해서 다 눈감아주면 지금이 엉망이 되는겨. 전씨 말대로라면, 오늘 살인한 놈은 내일 가면 어제란 과거에 살인한 놈이 되고, 또 그담 날이 되면 그저께 살인한 놈이 되고, 그러다보면 오래 전에 살인한 놈이니 덮어주자 이식이 되고 마는겨. 세상이 그럼 어떻게 되는 줄 알어? 난장판이 아니라 아수라장이 되는겨. 오늘이란 시간은 모든 범죄의 장이 되고, 내일이란 오늘 못다한 범죄의 예비 시간에 불과하고, 저질러진 그 숱한 범죄와, 이루어질 모든 죄악은, 아주 자연스럽게 스쳐지나가는 물살과도 같은, 과거란 시간이 가져다주는 면죄부를 받고... 전씨두 알걸, 저보다 작은 물고기는 씨두 안남기도 다 잡아먹는 준치란 놈 말여. 그놈처럼 그렇게 네 활개를 펴고 온 강바닥 세상을 휘젓고 다닐텐데, 그래도 과거라고 그냥 묻어둬? 사람을 죽인 놈은, 더구나 죄없는 사람을 죽인 놈은 운젠가 또 사람을 죽일 놈이여. 풀밭에 제초제 분사하듯기 무고한 양민에다 대고 총질을 한 놈들,...뭐? 데모를 주동 했다고? 정국이 불안했고 이적(利敵)에 다름아니었다고? 우째 이 땅의 위정자들은 그리도 하나같이 우국지사, 호국열사들만 모였다냐. 조국과 민족밖에 몰라서 우리네 겉이 무식헌 무지렁이는 눈에 뵈지두 않는다면 그래, 차라리 관두라 혀. 들 우국해도 좋고 들 애족해두 좋으니께 지발이지 대권 잡겠다고 민권 잡아 족치지 말고, 정권 뺏겠다고 죄 없는 백성 목숨 뺏지 말라구 말여. 자결을 해두 시원찮을 놈이, 뭐어? 습장이라고! 내원...억장이 무너지고 사지가 떨려서..." "엇쭈우... 꽤짢데. 고가 넌 그 많은 걸 어디서 다 배웠냐. 대단하다. 존경할 만혀. 근디... 혹시 너 대학생 아니냐. 위장취업..." "뭐야! 이 사람이 보자보자 허니까." 고성만이 도끼눈을 치뜨자 상국이 찔끔했다. 말끝마다 찍찍 내깔리던 반말도 어느새 쑥 들어갔다. "아님 관두슈. 하도 번지르해서 해본 소리유. 근데 한가지 물어봅시다. 알 만한 일이니." "관두자고. 전씨 말마따나 목구멍이 포도청인게." 이번엔 고성만이 시큰둥했고, 태연히 망치에 대못을 재였다. "그런 게 아니라... 고리타분한 시국얘기 말고, 아녀 고리타분하긴. 신나고 재미있게만 들었구먼. 보다두... 야, 고가 너 점두 볼줄 야냐." 상국의 말투가 도로 반토막으로 갈라지긴 했으되, 자못 심각한 투였다. 5. "뭐어...? 점?" "그려. 그러니깐으루... 오늘 일진이 어떻겠다든지, 어딜루 가면 누굴 만나겠다든지 하는, 그런 거 그 왜 있잖냐. 천책이니 지책이니 괘사가 어떠니 하면서 사주도 짚고 팔자도 보는." "...알긴 하겠는데. 그거야말루 황당무계한 거여. 과욕이지. 인상이니 수상이니 족상이니 해서 보는 것도 많고, 파자니 찰색이니 방위니, 또는 서죽이다 해서 보는 방법 또한 가지가지이더구만 난감한 일이여, 딱한 노릇이고. 오죽하면 육갑 떤다고 안 하것어. 의사가 다스리는 건 질병이지 사망이 아니겠고, 점쟁이가 관장하는 것은 추명(推命)이지 개운(改運)은 아닌 기여." "복잡한 건 알거 ㅇ고. 알긴 아는구나. 그챠? 됐어 금, 딱 한 가지만 물어보자." "내 말을 오해한 모양인데. 점이라면 볼때기에 붙은 주근깨도 볼 줄 모르는 내여. 굳이 아는 것이 있다믄, 점이란 점은 죄다 거짓이란 거여. 있을 수도 없는 일이고. 찬찬히 따져보라고. 전씨도 알다시피 우리네 겉은 무지렁이가 그래도 살아가는 건 내일이 있어서가 아니겠어. 희망이지. 근데 그 내일이란 게 빤하다 생각해봐. 살아 갈 낙이 있겠나. 액운을 피하고 길운을 따르기 위해 점을 본다고 말이야 뻔지르르 하지만, 그야말로 말뿐이지. 꿈을 뺏는다는 건 그러잖아도 버러지 같은 우리 인생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뿐인거여. 어서 일어나 못질이나 하자고. 이 집이 다른 집도 아니고 하누님 모시는 예배당이란 걸 잊었어. 엉성하게 해놨다가 냉중에 내리앉기라도 하면 전씨나 나나 천당하군 영 손떼는 거여. 허니 부지런떨자고." "과거지사는 억척겉이 물고 늘어지는 눔이 겁은 많어서... 천당 못 가믄 극락 가지. 하기야 우리 미선이 그년 말로는 도대체가 저 빈틈없는 우주간에 천당이나 지옥이 들어설 자리가 어디 있겠느냐고 하더라만. 그래 관두자. 그 자슥 명줄 길다는 건 금수산 골아댕이가 다 아는 일이고." 상국이 엉덩이에 묻은 톱밥을 툴툴 털어내며 고성만의 뒤를 따랐다. 기대하지 않은 질문이라 그랬던지 고성만의 대답이 시큰둥했음에도 별로 실망스런 표정이 아니었다. 정녕, 지금 이마당에 전상국으로서 시급한 일은 어떻게 하면 단 한푼이라도 더 벌어 생계를 꾸려나가느냐였지, 그쯤에서 접어두자고 한 그의 형에 대한 안부에 매달려 하많은 세월을 허송할 일은 아니었다. 더구나 입에 게거품을 물고 나대는, 굴곡지고 왜곡된 역사의 사실들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고성만의 그 지사적이고 심사관 같은 말에 덩달아 날뛸 일은 더더욱 아니었다. 물론, 같은 형제지간으로서, 그리고 노부도 말한 적이 있거니와, 엉성하기 짝이없고 칠칠맞기 한이없는 한국을 대리하고 후견해야 할 입장에 있는 상국으로선, 남의 일처럼 팔짱이나 끼고 구경꾼처럼 뒷짐이나 지고 있을 일은 아닐 것이다. 6. 하지만 더 이상 어떻게 해본다는 건 무리였다. 파출소에 가서 가출인신고라는 것도 내봤고 용하다는 용한 점쟁이도 숱하게 찾아봤다. 금쪽 같은 시간 알쪽같이 쪼개어 시내곳곳 안 뒤져본 곳이 없었고, 하다못해 교통사고는 아닌가 하여 누르실 입구까지 왕복하길 곰배팔이 소매 돌 듯했다. 만만한 게 뭐라고 일수이자 독촉하듯 하루도 거르지 않은 김석배의 가게였다. 하지만 앉은뱅이 모기 잡기요, 당달봉사 저울눈금 보기 식으로 어느것 하나 신통한 게 없었다. 어디 그뿐이던가. 상국과, 상국의 처 은숙이 티격태격 닭싸움으로 시작한 불화가, 급기야는 멱살에 머리채까지 끄잡아드는 개싸움으로까지 번지게 되었으니. 하긴, 그 이유가 한국의 가출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 전부터 문제는 많이 있었고, 그 문제라는 것이, 살다보면 일어날 수 있는 사소한 문제가 아니라는 데에 그 심각함이 더했다. 의심이 깊으면 손녀를 업고도 시앗을 투기한다고 그들이 꼭 그짝이었다. 말은 안 했지만 불신의 벽은 높았고 의심의 골은 깊어만 갔다. 5백 원짜리 동전까지도 쪼개 써야 하는 궁색한 살림살이에서부터 살붙이기 잠자리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순탄한 게 없었다. 그러다보니 집안 꼴이 말이 아닌 건 당연했다. 냉냉하기가 봉고파직 당한 변사또네 사랑채요, 썰렁하기로는 폐병 걸린 이몽룡이 죽지 못해 어슬렁거리던 광한루였으며, 휘휘하기로 말하면 변사또 꼬드긴 성춘향이 칼 쓰고 앉은 뇌옥이나 다름없었으니. 그러잖아도 무슨 책잡을 일이 없나 눈알을 휘번득이고 있던 판에, 한국이 덜컹 가출을 하고 나자 때는 요때다 싶어, 상국이 은숙을 닥달했고, 그 닥달이라는 게 싸움걸기에 다름 아니었다. 은숙 역시 수굿이 죽어만 있을 성깔이겠는가. 사랑 한번 더하겠다고 지분거리는 것이라면 몰라도, 또 세간살이 하나라도 더 들이겠다고 꼬장거리는 것이라면 모를 일이로되, 이건 순전히 싸움 하나만을 목적으로 한 타박이었고 시비였으니. 지눔이 남편이라고 허울만 뒤집어쓰고 있었지 낮일을 제대로 하나 그렇다고 밤일이 시원한가, 그래 어디 해볼테면 한번 해보자고, 니눔이 주안상 휘젓는데 조반상인들 못 뒤엎겠느냐고 앞뒤 없이 나대는 은숙이었으니. 한국의 가출 이후 빤할 날이 없는 집안이었다. 그러했으니 이젠 집이라고 생각만 해도 골치가 지끈거리는 상국이었다. 상국이 가래침을 캑 뱉으며 망치를 내리쳤다. 빗맞은 대못이 허공으로 튀었다. 그 바람에 빈 망치소리만 요란했다. "쯧쯔...! 전씬 또 딴 생각이구만." "아무 생각 없시다." "형이란 사람 생각이구만 뭘. 보면 알아. 생각이 깊으면 손놀림이 풀어지게 돼 있어. 내가 보기엔 형이란 사람, 별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구먼 그려." 7. 고성만이 이마에 땀을 훌치며 이쪽을 편하게 쳐다봤다. 동이다 만 배추단처럼 어딘가 좀 엉성하고 퍼드러진 듯한 느낌을 주었다. 소탈한 마음씨가 그랬고 수더분한 말씨가 그랬다. 외곬으로 내뻗치는 성격이 직선적이긴 했으나 그걸 까탈잡을 일은 아니었다. 불편(不偏)하고 부당(不黨)했으며 불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시시로 걸고 넘어지는 상국의 가싯말을 품 좋게 받아넘겼다. 상국의 나이보다 한 살 위이긴 했으나 동갑내기로 지내기로 했다. 상국의 가당치도 않은 억지 때문이었다. 상국의 주장을 들어보면 이러했다. 즉, 상국 자신의 나이 서른셋이고 고성만의 나이 서른넷이니 햇수로는 한 살 적은 게 사실이다. 그러나 그건 되박으로 달아도 될 걸 미련하게 대두로 퍼담는 격이니 불공평한 것 아니겠느냐. 고가 니눔의 생일이 시월 초엿새고, 나 전상국의 출생이 오월 열이틀이니 겨우 칠 개월 차이가 나는데 이건 누가 뭐래도 동갑이다. 이럴 때 써먹자고 세칙(歲則)에도 자치동갑이라는 게 있지 않느냐고 했다. 소주잔에 얼굴을 띄워보내며 고개를 끄덕인 고성만이긴 했지만 속으론 쓰게 웃었다. 까막까치 둥지 틀 듯 이것 저것 끌어다붙이는 것까지는 좋으나 자치동갑이란 그런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자치동갑이란 생년의 천간 중 오행이 같아야 하는데, 고성만 자신은 기해생이므로 천간이 토성이 되고 한 살 아래인 상국은 경자생이어서 금성이 되는 것이다. 이런 이치로 본다면 상국과 자치동갑이 되는 나이는 저보다 한 살 아래인 서른두 살짜리에게나 해당되는 것인데도 굳이 동갑이라고 우기는 심사를 모를 리 없는 고성만이었다. 그런 상국이 싫지 않았다. 싫기는 커녕 기특하게 여겨지기까지 했다. 연배 같은 건 애시 따져보지도 않고 성명삼자 디밀기도 전에 누에 똥 갈기듯 반말부터 트자고 덤비는 세상에, 더구나 지 애비뻘 되는 노인장 앞에서 맞담배질이 예사요, 떨이판에 우수리 지르듯 토막말이 공연한 노가다판에서, 그래도 아래 위를 따지는 심사가 가상했던 것이다. 그러고보면 좋게 보기로는 상국이나 고성만이나 그짝에 그치였다. "고가 니가 걀 우ㄸ게 안다고..." "점쟁이가 별거여. 쌍가마에 발 빠른 놈이야 타고난 도둑놈이니 지 버릇 개 주겠으며, 들창코에 왼손잽이라면 단명의 수일 터이니 사십줄에 접어들었다면 종합검진이라도 받아보라고 해야것지. 전씨 형되는 사람의 얘길 듣자하니 인중이 길고 얼굴색이 불그죽죽하니 화색이 돈다고 했겠다. 그만하면 숭늉에 비상을 타줘도 비켜갈 상이니, 염려 같은 건 개바닥에 공구리 치드라고. 머리만 좋으면 지팽이 짚고 장관해먹을 상인게." 8. "어얼씨구. 고가 니두 이론지 이백이지 하는 난쟁이 사기꾼하구 갖다붙이면 도찐개찐이겠다야. 망치 잡고 뺀찌 놓을 게 아니라 아주 거적때기 깔구 복채 잡어라. 뒷갈망이랑 이 전상국이 수습해줄팅께." "허...뭔 소리여 시방. 같잖다 이건데 사람실력을 고ㄹ게 도매금으루 넘기는 게 아니여. 나이롱뽕으루 딴 것두 아니구, 구들마루에 튀어나온 귀사리 짤라내고 남은 짜투리 거둬들이듯 주워들은 것두 아니구, 이기 다 노가다판 돌아다니며 손등 깨지고 발등 채이면서 배우고 익힌 학문이거든. 함부루할 게 따로 있지. 의심나면 가서 물어보라고, 내 말이 그짓말이나." "앗쭈. 그렇게 횡한 학문이 묻는 말에는 입도 뻥긋 못하게 하냐. 하긴 백대가리 그 자식도 그런 말은 하더라만..." 그랬다. 듣고보니 고가의 말이 아주 맹랑한 것만은 아닌 듯했다. 난쟁이 이로 역시 그런 비슷한 말을 하긴 했었다. 흐음...사람에겐 저마다 근본이 되는 세 가지가 있으니, 이를 일러 삼보(三寶)라 하네. 첫째가 신(神)이요, 둘째가 기(氣)이며, 셋째가 색(色)이니, 신은 영(靈)을 말함이요 기색은 오장육부를 말함이지. 혹자는 여기에 빛(光)을 덧붙이기도 하나 이는 술사의 임의로, 시시각각이 변하는 것이니 일진운세를 짚는데나 필요할 뿐 별 의미는 없는 것이고. 귀가 따갑겠지만 들어보게. 행방을 아는 데 도움이 될 것인즉, 신은 목(目)으로 나타나니 난산부족(亂散不足)하지 말아야 할 것이며 위엄이 어리되 따뜻하고 밝아야 할 것이야. 육부(六腑)를 나타내는 것으로 기가 있으니 대응하여 육기라 하네. 기가 발하여 색이 정해지는 법이니, 색에는 오색이 있고 소속은 오장(五贓)을 이름이지. 기를 보면 색이 판별되고 색이 판별되고 나면 내운(來運)을 가량할 수 있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 듣자하니, 자네의 형이란 사람 준두(콧등)와 인당(눈썹사이)에 자색이 역력하다고 했겠다. 자색, 자색이라... 일개 범부로서는 감당하기 버거운 귀색이니... 쯔읏, 여름철이라 도화살이 끼었어. 색난을 당할 사, 불행중 다행으로 달리 변은 없을 터이니 안심하시게. 그러면서 이로는 아깝다는 듯, 혀를 끌끌 찼던 것이다. 그날 이후로 난쟁이 이로는 자취를 감추었다. 이튿날, 까치다방을 찾았지만 없었고, 시장골목도 뒤져봤지만 행방이 묘연했다. 이해 못할 일은, 다방을 찾았을 때였는데, 점쟁이 이로가 있느냐고 묻자 아주 불손한 태도로 없다고 대답했다. 그냥 없다고 하는게 아니라 그 늙은이 그렇게 는 보지 않았다는 둥, 뒤져도 곱게 못뒤즐 거라는 둥 차마 입에 올리기조차 민망스런 악담으로 포악을 부리는 게 아닌가. 9. 대체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엊저녁까지만 해도 제 친부처럼 따르고 감싸주던 여종업원들이 아닌가 말이다. 세상인심이 야박하기로 해도 너무하는구나 하는 생각으로 더는 묻지도 않고 나온 상국이었다. 계단을 내려오면서야 무슨 말못할 사연이 있는가 싶었지만 다시 올라갈 기분은 아니었다. 상국이 담배를 빼내물며 조금은 감탄 섞인 표정으로 고성만을 지그시 올려다 봤다. 사람이 사람을 만난다는 게 참으로 기묘하다 싶었다. 따지고 보면 우연은 아니었다. 어금니 빠지자 홍시 떨어지는 격으로, 상국이, 거북이 등딱지 같은 실내체육관 건물 공사장에 역부로 취직이 됐을 때, 제일 반긴 사람이 고성만이었다. 목공 일이란 다른 일과 틀려서 아무나 붙잡고 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웬만한 디모도나 한 사람 들어왔으면 하고 바라던 차에, 어지간한 정도가 아니라 선수에 앉혀도 군말없이 추려 나갈 조수를 받고보니, 누구보다 화색이 도는 고성만이었다. 당시 고성만은 목공조의 조장으로 있었다. 목공이랍시고 서넛이 있긴 했지만 모두 손속이 날림으로 고성만의 눈치나 보는 더부살이들이었다. 일을 시켜본 결과 빈틈이 없었다. 퉁명스럽게, 툭툭 내밭는 말투가 투박스럽긴 했지만, 입에 발린 말보다는 솔직해서 맘에 들었다. 인상이 구린 게 흠이었지만 머리통을 잘라 농짝에 자개박을 일도 아니고 보면 이 정도면 무난하다 싶었다. 상국이 저 역시 어렵게 들어온 일자리라 그랬던지 시키는대로 고분고분했다. 허리가 아프네 등골이 쑤시네 했지만, 참지 못할 정도는 아닌 듯 보였다. 며칠이 지나갔고, 수월했다. 손발도 어지간히 맞아갔다. 부창부수의 경지는 못 되더라도 선창으로 들면 후렴으로 날 줄 알았고, 아니리를 엮으면 추임새 넣을 정도는 되었다. 이만하면 허리좀 펴겠구나 했을 때, 상국이 대뜸 대팻날을 거꾸로 세워왔다. 아침 출근이었는데 어쩐지 풀이 죽어 있었다. "암케도 그만둬야 쓰겠다. 곰곰이 따져봤는데 그 영감말이 자꾸 걸려. 뒤숭숭한 게." "그만두다니! 뭘...?" "뭐긴. 여기 거북등딱지 말이지. 감도 안 좋고." 상국보다 고성만의 얼굴이 먼저 하얗게 질렸다. 이놈이 이거 해장술에 취했나 싶었지만 그런것 같지도 않았다. "썩을 인사... 감은 무슨 감." "그왜 있잖냐. 공사판을 돌다보면 와 잡히는 직감이라는 거. 아무래도 여긴 재미보긴 틀린 것 같다. 그냥 그려. 느낌이지." 10. "넨지랄! 전씨야말루 틀렸구만. 사고방식이 틀려먹었어. 이틀 벌어 하루 먹는 우리네 겉은 놈들이, 그래 좌향 보구 일진 따지구, 비오는 날은 질척해서 뻐근하고 오늘처럼 창창한 날은 땡볕이 들어 나른하고, 개코도 일은 운제하고 간조는 어느놈한테 받어. 그래가지고서야. 낫살이나 먹었으면 고만 나이값이나 하라고. 그래, 거북이 등때긴지 개구리 배때긴지 여기서 나가면? 젯상 위에 진설해 논 제물 골라 먹듯기 어디 일거리가 기다리고 있기나 하데? 철 좀 들라고 철...식전부터 김 새게 시리." 고성만이 얼굴에 핏대를 세워가며 상국을 성토하고 나섰다. 어느 때보다 강경한 어조였다. 상국이 누그러졌다. "그렇단 말이지. 사실...허리를 삐끗하고 나서부터는 이 바닥에서 손을 떼야지 하면서도 배운 게 가지라고 이러고 있는 중인게. 당장 나간다는 것두 무린 줄 알어. 벌어논 돈이 있나 쌓아둔 양식이 있나. 고가 넌 이골짝에서 뼈다구 영글었응게 이 바닥 통속은 환할 거 아녀. 해본 소리니 어디 일자리 나면 봐달란 말이다. 내 혼자만 슬며시 빠져 나갈팅게." 그런 말이 지나간 후, 손이 뜬 것 같기는 했지만 별일 없이 출근했었다. 그런데 이번엔 생각지도 않던 고성만이 나섰다. 시내에서 제일 큰 극락교회라고 있는데 교도들 성금으로 예배당을 하나 더 짓는다는 거였다. 그러면서 고성만 자신이 생각해 봐도 이곳은, 금융실명제가 되고 난 후 아무래도 자금사정에 허덕이는 듯한 낌새도 있고, 지금껏 인부를 부리는 가다를 보니 서울놈들이라 그런지 영 인정머리도 없고 믿을 곳이 못 된다며, 저번에도 기왕 말이 나온 말이니 전씨 말대로 그쪽으로 뜨자고 했다. 털어낼 것도 없이 대번에 일어섰던 상국이었다. 구차하게 사직서 쓰고 도장 찍을 일도 아니었고, 일시불이니 연분이니 해가며 퇴직금 따질 일도 아니었다. 간다고 일어서면 그날로 끝이었고, 손 한번 흔들어주면 그걸로 퇴임식이 되고 마는 게 노가다판 막일이었다. "저새낀 또 뭣하루 오는 겨." "누구...?" 공사장 건너편으로 사람들이 지나갔다. 앞서서 걷는 사람은 목사인 듯했고, 뒤따르는 열댓명의 무리는 전부 여자들이었는데 예배보러 온 신도들 같아 보였다. 저마다 손에는 하나씩의 성경책이 들려져 있었다. 묵상으로 길을 좁히는 목사와는 달리 뒤따르는 종도들은 어지간히 수선을 떨었다. 교회는 평일인데도 신도들로 붐볐다. 고성만이 고개를 늘였다. 교인들뿐이었다. "그쪽이 아니라 조길 보라니까." 상국이 턱짓으로 교회의 별관 쪽을 가리켰다. 회양목으로 둘러쳐진 정원 한가운데 마가목이 서 있었고, 그 곁으로 수형이 잘 잡힌 적단풍이 검붉은 이파리를 흐적거리고 있었다. 마가목과 적단풍 사이로 그림자가 언뜻언뜻 어렸다. 11. 자세히 보니 두 사람이었는데, 그 중 하나는 조금 전에 지나갔던 십장 강종술이 확실했다. "새애ㄱ... 그새를 못 참아 또 확인이여." "글쎄다. 저놈이 또 무슨 트집을 잡을랴고. 어라! 확인이 아니고 순찰 개벼. 옆에 붙어있는 작자 아무래도 사장 같어." "사장이면. 건축회사?" "아녀 건축회사 사장은 내가 아는 얼굴인데, 긴 아닌 것 같고. 교회 쥔 말여." 고성만이 땀을 훌치며 이쪽으로 건너오는 그들 두 사람을 꼬나본다. 마뜩찮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상국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합판에 각목을 뚝닥거리던 고성만에게 눈길을 돌렸다. "교회 쥔? 그럼 교회에도 사장이 있단 말이여? 설마...개인회사라면 또 모를까." "못 믿겠으면 물어보라고. 하누님에게. 아마 모르면 몰라도 자본금만 넉넉하다면 천당도 세울 수 있다고 대답할걸. 그게 다 인종이 많은 탓이지. 하누님 욕할 것두 못돼." "뭔 새따먹은 소리여." "입장을 바꿔놓고 보라고. 굶어 죽네, 늙어 죽네. 총 맞았데, 차에 치었데. 뱃바닥에 구멍이 뚫려서, 철길이 휘어져서. 하루에도 수천 수만 명씩 죽어자빠지는 세상에 그걸 하나하나 재판할 수 있겠어. 혼자몸으로. 아무리 고뿔 한번 안 걸리는 하누님이라지만 일일이 다 관여하자면 몸이 열 개래두 감당 못할 걸. 제일 정확하고 편한 방법이 헌금 많이 기부한 순으로 배열하는 거지. 많이 한 놈은 천당 적게 한 놈은 연옥, 나같이 한푼도 안한 놈은 지옥, 이런 식으로 말야. 그러다 보니 저런 인사도 생겨나는 거고." "도시 뭔 말씸인지 못알아 잡숫겠다." 상국이 강종술과, 그로부터 무언가 열심히 보고를 받고 있는 사내 쪽을 주시했다. 둥글넓적한 얼굴에 뭉툭한 콧등이 들창코로 붙어 있었다. 벗겨진 이마가 돈푼깨나 있어보였고, 어깨선과 목젖언저리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어, 보는이로 하여금 위압감을 느끼게 했다. 전체적으로 보아 거만스러운 인상을 풍겼다. "저자가 이 교회를 몽땅 샀다는 거여. 말로는 기부금 형식으로 교회가 떠안고 있던 부채를 탕감해주었다고 하는데 그게 그거지. 기갈 들린 놈에게 밥 멕여주고 장리쌀 갚으라는 격으루. 회사 주식 인수하는 식으로 야금야금 돈을 빌려주고는 어느날 갑자기 그돈을 한꺼번에 갚으라는거야. 돈 많은 사람이니까 기부하는 거겠지 하고 믿었겠지만 걸려든거야. 떡밥 보고 몰려들었는데 먹음직스런 미끼를 그냥 보고만 있었겠어. 덥석했다가 빼두박두 못하구 낚시바늘에 걸린거지. 남의 돈 공으루 먹겠다고 덤비는 놈이나 그걸 역으루 이용해먹은 놈이나." 12. "사고 팔 게 따로 있지 교회를 사서 어디에 쓸려고?" "그걸 전씨가 알겠어 내가 알겠어. 그나저나 목사들 월급 올려주는 것도 모자라 이렇게 거창한 사업까지 벌리는 걸 보믄, 믿음 하나만은 대단한 위인이라고, 다들 칭송이 자자하더라구. 대개 보면 가진 자들이 사회사업엔 인색하기 짝이 없는 법인데 저 자만은 딴판이라는 거야. 무슨 복지사업이라는 것두 한다지 아마. 돈이 있을라믄 그렇게 써야 한다는 거야." 그자가 가까이 왔으므로 둘의 말은 거기에서 중단되었다. 곁에 붙어 있는 강종술이 무언가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다. 군대물을 오래 먹어서 그런지 손바닥을 쫙 펴서는 두부 자르듯 탁탁 내치는 폼이, 꼭 작전관이 부대장에게 브리핑하는 식이었다. 상국이, 신축건물의 주인이며 교회의 실소유자이기도 한 그 사내에게서 눈길을 거둘 줄 몰랐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얼굴인데 쉽게 떠오르지가 않았다. 유심히 쳐다보는 상국을, 그러나 그자는 싹 무시한 채, 도비(설치조)들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겨갔다. 하찮은 잡역부쯤은 안중에도 없다는 표정이었다. 사장을 모시면 사장이 되는지 십장 강종술 역시 덩달아 거만해 보였다. 그들이 갔으므로 그쳤던 얘기가 이어졌다. 사실 이런 공사판에서 아무런 얘기도 할 수 없다면, 고역이었다. 더구나 둘이나 서넛이 한조가 되어 일품을 추려야 하는 목공일은 손발이 맞아야 했고, 손발이 맞자면 마음이 통해야 했다. 숨길 것도 감출 것도 없이 나오는대로 지껄였고 되는대로 받았다. 자질구레한 집안일에서부터 고리타분한 공사일에 이르기까지, 지난밤 술상머리에서 품었던 꽃다지에서부터 소시적에 꺾어둔 호밀밭 가시내에 이르기까지, 신주로 늘이면 야리가다로 받고, 먹줄로 띄우면 곡척으로 재워야 했다. 그러다 보니 우리네 살림살이보다 그네 고생살이에 마음이 쓰였고, 이내 눈에 티보다 자네 손톱에 가시가 먼저 눈에 띄었다. 짝이 된다는 건 그만큼 어렵기도 했다. 난쟁이 이로의 말이 그래서 그랬든 자신의 생각이 그래서 그랬든, 상국이 실내체육관 공사에서 손을 떼려고 했을 때, 고가 지눔이 먼저 발벗고 나서서 다른 일자리를 알아본 이유도, 따지고 보면 모처럼만에 만난 짝하나를 잃지 않기 위해서였다. 쉽게 만났다 맥없이 헤어지는 게 노가다판이기도 했지만 한번 정이 들었다 하면 시멘트콘크리트처럼 강고한 것도 노가다판이었다. 상국이 고성만에게 무슨말인가 할 듯하면서도 내내 머뭇거렸다. 썩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고 그만큼 비밀스럽다는 얘기도 되었다. 그걸 모를 리 없는 고성만이었다. 비죽거리는 상국의 입에다 대고 퉁명스럽게 한마디 걸었다. 13. "우물거리지 말고 뱉어봐. 자고로 기집은 품어야 허고 괴기는 씹어야 맛이 난다고, 말은 뱉어야 허는 거여. 그러고 있응게 전씨답지 않구먼." "얘기하고 자시고 할 것두 ㅇ어. 챙피하기만 할걸..." "엇따, 그때는...챙피한 애기 빼고 미안한 얘기 감추고, 이래저래 다 추리고 나면 피차 얼굴만 쳐다보고 있어야지. 체면 차릴 데가 따로 있고 자존심 세울 데가 따로 있지, 그래 바짓가랭이에 주름 세워갖고 뭘 어쩌겠다고." 고가란 놈, 속으론 궁금하기도 하고 조바심이 일기도 했으나 별관심이 없다는 듯, 태연히 너스레를 떨어댔다. 듣고 싶은 감정은 다스릴 수 있으나 말하고 싶은 욕구를 눌러 참는다는 것은 어려웠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로부터 시작하여 요즘 한창 번성하고 있는 노래방에 이르기까지, 인간에게 있어 말하고자 하는 욕구만큼은 어떻게 참아낼 도리란 없는 것이다. 언어라는 것은, 특히 음성언어라는 것은, 자기현시에 있어 가장 확실한 표현방법이 되며, 자기과시를 함에 가장 편리하고 효과적인 수단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에게 있어서 언어라는 것은, 의사의 교환수단일 뿐만 아니라 자기인식의 가장 가까운 단서가 되기도 하며, 공작의 날개와도 같이 어떻게 표출해 보이느냐에 따라서 무한한 자기미화의 도구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부연하자면, 창조주가 인간을 선택하면서 부여해준 두 가지의 특별하고도 감동적인 은혜가 있었으니, 혓바닥과 앞발을 잉여적으로 사용하게 한 것이었다. 다시말해서 인간에겐 다른 동물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생식과 개체유지라는 1차성징과는 전혀 무관한 이들 두 가지를 부여함으로써, 처음부터 예견하고 예단한 고의이든, 아니면 전혀 예기치 못한 부주의로 인한 산물이든, 결과적으로 창조주의 입장에서 본다면 상정할 수 있는 최악의 불미스러운 실수를 범하고 만 셈이었다. 결과적으로 인간은 예상할 수 있는 그 어떤 기대치보다도 높은, 그야말로 행운에 가까운 최상의 이기와 가치를 누리게 되었으니. 문화인류학자들의 주의주장을 차용할 것도 없이, 이 두 가지의 전혀 쓸모없게 보이는, 턱없이 크고 넓은 혓바닥과 거추장스럽기만 한 두 개의 앞발이 전 지구 생물사와 인류사에 엄청난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사실, 직립보행이란 인간의 입장에서 본다면, 손이라고 이름 붙여진 두 개의 앞발은 먹이를 좇고 위치를 이동시킴에 있어 그다지 필요한 것이 못 되었고, 어찌보면 거추장스럽고 짐스러울 뿐인 육손이의 여섯번째 손가락과 같은 존재나 마찬가지였다. 파충류처럼 아예 퇴화되어버리던가 조류의 그것처럼 창공으로 진화하는 게, 당시로선 인류의 공통된 바람이었을 것이며, 굳이나 있어야 한다면 신체의 전체적인 벨런스나 유지해 주는 펭귄이나 캥거루의 그것처럼 있는 둥 마는 둥 하면 되었을 일이었다. 14. 그처럼 거추장스럽기만 했지 어디에고 소용될 것 같지 않아 보이던 앞발이, 세월이 흐름에 따라 도구를 만들고 불의 사용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니, 다름아닌 인류문명의 바탕이 된 것이다. 이와 짝을 같이하여, 괄시를 받기는 혓바닥 역시 마찬가지였다. 혓바닥이란 그저 음식물을 요량껏 적당히 씹어서 목구멍까지 안전하게 넘겨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놈은 제 할 일이 무언지도 모르는지 턱없이 길기만 했고 대중없이 넓적하기만 했다. 훈련이 잘 된 애완용 강아지처럼 주인의 의사에 충실한 건 바랄 데없이 고마운 바였으나, 아무리 그렇다해도 이건 필요 이상으로 지나쳤다. 앞발에 비한다면 좀 덜한 편이긴 했으나, 거추장스럽다는 점에서는 다를 게 없었다. 하지만 이 역시 인간에게 말(언어)이라는 것을 갖게 했으니, 거추장스럽고 짐스럽게만 보이던 앞발이 인류문명의 바탕이 되었다면, 별달리 쓰임새가 있을 것 같지도 않던 혓바닥은 인간이 내세울 수 있는 최대의 자랑거리인 문화라는 실로 엄청난 기적을 탄생시킨 것이다. 다시말해서, 언어는, 단순한 생각의 전달에서부터 복잡하고 난해하기 그만인, 존재의 규명과 사랑의 실현을 종국으로한 철학의 태동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양자역학이니 광자물리학이니, 또는 유전자복재와 형질개선을 양축으로 하는 유전공학이니 하는 과학의 성과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신화적이랄 수밖에 없는 인류문화를 꽃피워 낸 것이다. 아직껏 신이 살아 있어 이를 본다면, 아마 그는 까무러치고 환장할 것이다. 작금의 인간은, 그의 가장 깊숙하고도 은밀한 속치마까지도 들춰보게끔 되었으며, 머지 않아 그가 전권처럼 향유하고 있던 '생명의 창조'라는 특권마저 빼앗길 위기에 놓였으니 말이다. 분노는 말이 없으나 심판의 날은 목전에 당도했다고 투덜거릴 게 분명했다. 어찌되었건 인간에게 있어 '말'이라고 하는 것은, 이제 식욕이나 성욕보다도 더 강한 욕구 중의 하나가 되었으며, 이를 참으라고 한다는 것은 받을 수 있는 그 어떤 형벌보다도 무거운 형벌인 셈이었다. 고성만이 짐짓 별관심이 없다는 듯 딴청을 부려보는 것도 이러한 제반의 정황을 암암리에 계산에 넣어둔 때문이었다. 그래 네까짓 게 참으면 얼마나 참나 두고보자는 식이었다. 고성만이 다시 못질을 하며 거푸집을 엮어갔다. 무춤거리던 상국이 얼마간 뜸을 들이고 난 후 기어이 입을 열었다. "집안 얘긴데 말이다. 아무래도..." 고성만이 속으로 허옇게 웃으며 연신 못질에 바쁜 척했다. "아무래도 여편네가 전하군 틀린 것 같어." "어이구야...이잔 허리도 욱신거리고. 그놈 햇살 한번 오지게 피었다. 전씨? 담배 한참 피고 하자고. 오늘 못 함 낼 하지. 어차피 돈내기 공사 하루 정도 늦는다고 일공이 처지는 것도 아니겠고." 고성만이 땀을 닦으며 휴우, 하고 한숨을 내몰았다. 말로는 쉬었다가 하자고 했지만 딴엔 귀동냥이 목적일 것이었다. 15. "듣자하니 지수씨만 탓할 일도 아니구만그려. 내가 여자래도 그렇지 그래, 밤마다 뭔질을 해줘도 시원찮을 나이에, 허구헌 날 쌈질이나 해대고 앉았으니 당연하달밖에." "아녀... 예전엔 싸움을 해도 칼로 물 베기 식이었는데 요샌 어찌된 셈인지 갈라서자는 말이 내 입에서 나오길 기다리는 눈치여. 이혼도 불사하겠다 이 말이겠지. 내원 기가 막혀... 혹시 눈맞은 놈이라도 숨겨놨나 나름대로 조살해봤지만 그런 것 겉지는 않고..." "눈맞은 놈이 있는게 아니라 배맞은 놈이 있는 거겠지." "썩을 놈. 그러길 바라는 눈치구나. 유감스럽지만 기도 아닌 것 같드라. 은숙이 갼 내가 알아. 한집에서 산 지가 팔년이고, 연애한 것까지 합치면 꼭 십 년째다. 성격이 나를 닮아서 좀 지랄 같긴 하지만 그 정도로 패악한 여자는 아니다. 건 내가 알어." "답답한 인사하군. 전씨도 이제보니 콱 맥힐 때가 있구만.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말은 알테고, 여자가 정을 통하면 우째되는지 알어?" 고성만이 담배불을 붙여 물자 상국이 묵묵히 따라했다. 씨광한 표정이 못내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고성만이야 어차피 모른 체하기로 작정한 바였다. "엄동설한에도 집을 나가는 게 여자여. 남자는 바람을 피워도 제 집을 싸안고 돌지만, 여자는 달러. 정분이 났다 하면 바람꼬리가 바깥으루만 치닫거든. 남편이 성에 안 차는데 자식이 눈에 차겠어. 치맛바람이 무섭다는 말이 그래서 그런 거여. 허니 전씨도 조심하라고. 삐그덕 했다는 허리만 탓하지 말고." "해서 하는 말이다만. 고가 니가 연극 한 토막만 해줬으면 혀서..." 상국의 말이 처음부터 끝까지 내내 힘겨워보였다. 줄줄 흐르는 땀이 골아서 그런 것만은 아닌 듯했다. "뭔 소리여... 그게." "어렵겠지만, 동갑끼리니까 하는 부탁이여. 대드는 꼴을 보면 당장에라도 갈라서자고 하고 싶지만 안돼, 은숙이 갸 만큼은... 가정파탄이 두려워서가 아녀. 이건 순전히 사랑 때문인 게. 2년 동안이나 죽자사자 따라다닌 것도 진짜배기 사랑 때문이었고, 애비 자식간의 정리를 끊든지 그 여자와 관계를 끊든지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는 노인네 반대를 무릅쓰고 은숙이 갸와 결혼한 것도 사랑이란 거 하나 때문이었어." "......" 16. "지금도 그래. 다른 건 다 버릴 수 있고 잊을 수 있지만 은숙이만큼은 안 돼. 땡볕에 앉아서 황덕불 피는 소리 그만하라고 해두 그만할 수가 없어. 진심이고 진실인 게. 쪽박 깨진 담에야 물 떠먹자고 안 할팅께 말 나온 김에 딱 한번만 도와주라. 힘든 부탁두 아닌 게. 굳이나 싫다면 할 수 없고." 상국이 그답지 않게 심각했다. 듣고보니 농으로 받아넘길 일이 아닐 성싶었다. 애써 태연한 척은 했지만 은근히 캥기는 고성만이었다. "전씨? 조금 전엔 연극이 어쩌구 하더니 부탁은 또 뭐여?" "고가 니가 은숙이한테 슬쩍 붙어보라고. 니 재주껏 꼬셔봐. 갸가 우떻게 나오는지 내한테루 사실대로 보고만 해줌 돼. 어떠냐? 어려울 건 ㅇ겠지. 지 여편넬 얼마나 못 믿었으면 그런 유치한 생각까지 하게 됐을까 욕도 하겠지만, 알어 나두. 치사하고 더럽고, 용렬하다는 것까지두. 하지만 어쩌겠냐. 이러다 죄 받지 싶어 그냥 있어야지 하다보면 께름칙하고, 믿어야지 하면서도 믿지를 못하겠으니... 나란 놈이야말루 삼팔 따라지두 못되는 한심한 놈이여. 하나밖에 없는 지 여편네두 못믿는 의처증환자가 되버렸으니..." 상국이 고개를 푹 꺾으며 담배를 비벼 껐다. 무연히 바라보던 고성만 역시 고개를 슬몃 틀었다. 초췌한 얼굴로 앉아있는 상국을 정면으로 마주할 용기도 없었거니와 어쩐지 측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상국의 심기에 덩달아 시르죽을 일도 아니었다. 상주가 '애고 애고'한다고 조객까지 '어이 어이'한다면 상례에는 충실할지 모르지만 썩 잘하는 조문이라곤 할 수 없을 것이다. 모든 예(禮)가 그러하듯 상례 역시 법도가 있고 절차가 있되, 그 근본 목적은 산자에게로 돌아갈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죽은자의 망령을 '강 건너 저쪽'까지 안도(安途)시킨다는 것이 드러난 목적이라면, 그리함으로써 살아있는 자와 저질러진, 평소 서먹서먹하고 언짢았던 감정도 해소시키고 생전에 빌려준 얼마간의 부채도 없던 것으로 하고, 방금 전 숨이 끊어지면서 보아둔 손주놈의 얼굴까지도 말끔히 잊어버려, 마치 흘러간 강물이 지나온 풍물에 연연치 않듯이 죽은자는 죽은자대로 산자는 산자대로, 산자와 죽은자를 냉엄히 구분하여, 이승에 남아있는 산자들의 안녕과 화평을 기원하자는 것이, 우리가 상례를 치루는 숨은 뜻일 것이고, 어쩌면 이러한 쪽에 모든 예의 성립 취지가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할 것이고 보면, 상가에가서는 조금은 유머스러울 이유가 있는 것이며, 어딘가 어리숙한 채 상주를 웃길 줄도 아는 여유도 필요한 것이다. 고성만이 짐짓 기분좋게 웃어 보이며 너스레를 떨었다. 17. "전씨, 그 정도라면 걱정 싸매드라고. 이 고성만이 다른 사람들, 고생만 했다고 하는데 건 뭘 몰라도 영판 모르는 말씀이고. 나두 한때는 영화배우될 뻔했었다니까. 그짓말 같지만 증말여. 깃발 날릴 때였지. 군대 제대할 무렵 찍어논 전쟁영화였는데, 전씨두 왠만하면 봤을걸. 온 장안이 왈왈거렸댔잖여. 그 왜 '오, 인천!'이라구. 대단했었지. 소피마려워(소피마르소)인지 소피노래(소피아로렌)인지 하는 주인공 옆에서 총맞고 딱 쓰러지는 장면이었는데, 햐아...걸 제대하구 극장에서 봤는데, 죽여주더라구. 1,2만 원짜리 액스트라하군 차원부터가 틀린 거야. 친구놈하구 같이 갔었는데, 생전 믿어야 말이지. 아니라는거야. 너 겉은 놈이, 국산배우도 아닌 외국여배우하고 같이 있었다는 것 자체부터가 그짓말이라는 거야 글쎄. 그질로 나갔으면 나두 팔자 확 고치는 건데..." 상국이 가래침을 콱 울궈냈다. 거짓말이래서가 아니라 고가 놈의 입담이 사실이라해도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실로 중요한 것은 은숙의 속내를 어떻게 하면 밝혀낼 수 있느냐였지 흔해빠진 전쟁영화 한편에 히히덕거릴 기분이 아니었던 것이다. "해준다니 고맙다만 들통나믄 지랄이다. 그땐 너나 내나 볼장 다보는 판이여. 잘못 찍은 연속극이야 엔지,하고 다시 찍으믄 되지만 주둥이 한번 잘못 놀려 쇼라는 게 뽀롱나믄 갸 승질에, 그땐 증말루 끝이다." "글쎄 염려 탁 붙들어 매라니께. 뭐냐...그렇지. 사실적 분위기 연출을 위해서 좀 야한 씬이 나오드래도 오핸 말라고. 부탁은 그것뿐이여. 완벽허니 해치울팅께로. 여자 맘 떠보는 거야 한 서너 번만 만나보면 훤한 것 아니것어. 그나저나 전씨 내자를 상대로 밀월을 즐긴다? 어째 기분이 싱숭생숭한 게 찜찜하기도 하고 덜컹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야릇하구만." "새앳긔하군. 주둥일..." 고가 저놈이야 생각없이 떠드는 말이겠지만, 상국으로선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아니다,라고 취소해버릴까 하는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었으나 이제와서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렇게 된 마당에야 고성만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그런 부탁을 했을 리도 만무했다. 김석배만 같았어도 그런 말을 하기 전에 한번쯤 다시 생각했을 것이다. 천둥벌거숭이적부터 친구라고는 하지만 자존심이란 것도 있었고, 친구이지만 친구이기 때문에 할 수 없는 부탁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고가 이놈은 달랐다. 나오는대로 떠들고 잡히는대로 이죽거리긴 했지만, 생각없이 떠드는 수다가 아니었고 앞뒤없이 이죽거리는 독설이 아니었다. 두루두루 모르는 게 없었고, 쉽게 내던지는 말 한마디에도 뼈가 있고 뜻이 있었다. 끌망태만 꿰차고 나가면 어디서든 만날 수 있는 허드레목수가 아니었다. 18.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찜찜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믿기로 했으니 믿기는 믿어야겠지만 아내의 뒷조사를, 그것도 그냥 뒤를 캐는 게 아니라 일부러 함정을 만들어놓고 의중을 떠본다고 생각하니 내내 마음에 걸렸다. 하늘이 두 쪽 나도 그럴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하는 두려움도 있었다. 이적지 믿어온 아내 은숙이었고 사랑이었다. 동전만 집어넣으면 줄줄 새어나오는 유행가 가사 속의 사랑이 아니었다. 부자의 정리마저 끊으면서 얻은 여자였고 사랑이었다. 세상의 어느 것하고도 비교될 수 없고, 그 어떤 값진 보석과도 바꿀 수 없는 애정이었으며 믿음이었다. 그러한 것이, 그러하지 아니하다면...아지 못할 두려움에 상국이 고개를 내둘렀다. 그렇진 않을 것이다. 몇 번의 말다툼과, 딱 한번인가 손찌검한 적이 있긴 했지만 그 정도로 허물어질 애정이 아닌 것이다. 저도 모르게 상국은 또 한 개비의 담배를 빼내물고 있었다. 아무 것도 아니다. 그저 그녀의 사랑을 확인하고자 할 뿐이다. 그녀를 의심한 것은 기우일 뿐이며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아니 이건 의심이 아니라 염려인 것이다.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라는 그 '돌다리'인 것이고, 아는 길도 물어 가라는 그 '아는 길'인 것이다. 비 온 다음에라야 땅은 굳어지는 것이며, 장마가 지난 연후라야 비로소 하늘은 푸르러지는 것이다라고, 스스로 자위해보는 상국이었다. 거나하게 취한 상국의 몸이 줏대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막무가내로 퍼마신 대접띠기 막소주 탓도 있겠고, 그러잖아도 울화통이 터지는 마당에, 그런 연극쯤은 식은 죽 먹기라고 아냥거리던 고가놈의 과잉친절 탓이겠다. 거기에다 잊을 만하면 불끈불끈 치솟는 한국이 놈의 안부까지 겹쳐, 귀로를 밟는 상국의 몸은 그야말로 안쫑다리 바깥쫑다리 형국으로 뒤틀릴 대로 뒤틀려진 상태였다. 석배 녀석에게나 들려 밀린 빚 독촉하듯, 한국의 행방이나 따져 물을까 하다간 그냥 지나쳤다. 나올 대답이란 뻔한 것이고 화풀이를 한다고 풀어질 가슴앓이가 아니었다. 술김만 쏘이면 흥얼거려지던 '꽃냄새'인지 '분냄새'인지하는 철지난 유행가 나부랑이도 맘에 없었다. 후덥지근한 귀로가 짜증스러울 뿐이었다. 저린 발로 대문간을 살금살금 기어들던 상국이 흠칫했다. 물소리였다. 짜르락 찰싹, 짜르르... 풀밭에 철써기가 우짖난 듯, 빙판에 얼음조각이 구르난 듯, 여리게 이어졌다가는 그치고 그쳤는가 싶으면 또 이어졌다. 어쩌면 아이들이 물장난을 치는 것도 같고 규중의 처녀가 발을 씻는 것도 같고. 그 소리는 가벼운 듯하면서도 무게가 있었고 꺼질 듯하면서도 다시 살아나는 호롱불 같기도 했다. 19. 상국은 어느새 부엌문 앞에까지 와 있었다. 목판으로 얼기설기 짜여진 문짝을 이윽히 주시하던 상국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찰싹 짜르, 짜르르 차알싹... 귓부리를 부엌문 쪽으로 바투 당겨잡은 상국이 엉거주춤한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서 있는 게 아닌가. 아내 은숙이었다. 날씨가 후덥지근해서 목물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상국이 또 한번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갑자기 골머리가 띵 했다. 알몸으로 서 있는 은숙이 사향처럼 흔들려왔다. 풋풋한 살내음과 희고 포동포동한 살결이 떠오르자 갑자기 다릿심이 허전해졌다. 아랫배가 뻐근해지더니, 타는 듯한 열기가 손가락끝에서부터 가슴을 향해 치달아올랐다. 가빠지는 호흡을 가까스로 다스리며 바삭바삭 타들어가는 입술을 침으로 적셨지만 혓바닥의 침까지 말라버리고 없었다. 개꼬리처럼 축 늘어져 있던 수수목이 짜릿하게 당겨지더니 걷잡을 수 없이 위로만 솟구쳤다. 뛰어들리라 했다. 뛰어들어, 죽었다 깨어나도 당신만을 사랑할 것이라고, 으스러지도록 껴안고 싶었다. 아! 얼마만에 느껴보는 욕구인가. 실로 오랜만이었다. 허리병을 얻은 후, 제대로 한번도 부부생활을 가져보지 못한 상국이었다. 체위를 바꿔보기도 했고, 주간잡지를 뒤적이며 변태를 배워보기도 했지만 어느것 하나 만족할 수가 없었다. 상국으로선 번번이 열패감을 맛보아야 했고, 아내 은숙에게 말 못 할 죄를 짓는 듯한 자책감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럴 때마다 은숙은, 애정만 있으면 됐지 육체관계가 별 대수냐고 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자신이 더없이 초라해보였고 분개했고 화가 났다. 매사에 의욕이 뚝 떨어졌고 아내 보기가 민망했다. 요즘 들어 부쩍 늘어난 은숙과의 부부싸움도 말로는 한국의 가출 때문이라고 하지만, 어쩌면 그러한 자신의 열패감과 자책감을 은폐시키기 위한 방편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랬던 것인데 오늘은 그게 아니었다. 죽은 줄 알았던 그놈이 다시 살아난 것이다. 더없는 희열이었다. 자신감이 있었고 돌진하는 생명력이 넘쳤다. 가쁜숨을 들이키며 상국이 문께로 살금살금 걸어갔다. 문고리를 잡아당기려던 그가 숨을 딱 끊었다. 상국이 눈을 못 믿겠다는 듯, 몇 번인가 껌뻑거렸다. 귀를 문짝에 바짝 갖다댔다. 짜르르 짤...철썩! 목물을 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자세히 다가가서 보니 목물이 아니라 뒷물이었다. 치마를 살풋이 걷어올리고는, 보기에도 민망한 자세로 쪼그려 앉아서 허벅지와 샅께를 문질러대고 있는 게 아닌가. 20. 마치 대장장이가 풀무질하는 것도 같고 농부가 김을 매는 것 같기도 했다. 그녀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그녀의 입에선 짧고 가녀린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녀의 손놀림이 점점 빨라졌다. 신음소리가 조금씩 커지더니 그녀의 머리가 뒤로 젖혀졌다. 땡볕에 파들거리는 붕어처럼 입을 딱 벌렸다. 아아...하는 신음소리를 길게 토해놓고는 세숫대야 위에 털썩 주저물러 앉았다. 상국이 코를 문질렀다. 난감하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니 은숙이 수치스러워할 것 같았고, 그렇다고 그냥 있자니 꼴이 말이 아니었다. 예의를 차리자면, 못 본 체 물러나와야겠지만 불뚝불뚝 위로 솟구치는 수수목이 만사 제쳐두고 기를 썼다. 예의를 알 리 만무했으니 상국으로서도 별 도리 없었다. 더구나 손끝이 아직도 아리고 저려왔으며, 가슴은 터질 듯이 가빠왔다. 들어가자고. 진심이라고 진실이라고, 하늘에 두고 맹세하지만 은숙이 당신 하나만을 사랑하고 있다고. 못할 말도 많이 했고 몹쓸 짓도 많이 했지만 당신이 미워서 그런 것은 절대 아니라고. 모든 잘못을 용서해달라고. 내 앞으로 맹세하지만, 다시는 그런 나쁜 짓은 안 할 거라고. 다른 건 다 못 믿어도 좋지만 사랑한다는 사실만은 믿어달라고. 상국이 숨을 들이마셨다. 아니, 무슨 말이 필요 있으랴. 그냥 으스러지게 껴안고만 있을 것이라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눈빛만 쳐다볼 것이라고. 상국이 벌떡 일어섰다. 입을 딱 벌렸다. 얼굴을 오만상 찡그리며 도로 허리를 푹 꺾었다. 허리의 통증이 온몸 구석구석을 타고 내렸다. 휘청하며 간신히 문고리를 잡았다. 잡아당겨봤으나 열리지 않았다. 몸무게를 문쪽으로 쏟으며 다시 문을 밀어봤지만 열리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사이 서늘한 통증이 손끝까지 타고 내렸다. 안으로 질려있는 빗장을 확인하며 상국이 슬며시 뒤로 물러났다. 불덩이처럼 화끈거리던 욕정은 손톱끝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허리의 통증이 몰고간 것이리라. 부엌 안에선 물 끼얹는 소리가 다시 찰싹거렸다. 상국이 힘없이 돌아섰고, 어느 때보다 풀이 죽은 모습이었다. 해는 떨어졌으나 빛은 남아 있었다. 여름해는 모질기도 했다. 어른거리는 그림자를 동냥자루 끌 듯 끌며, 대문을 나서려는데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사람이 보였다. 아랫방에 사는 세무서 직원이었다. 늦은 걸 보면 특근이라도 했나보다. 하긴, 정권이 바뀌자마자 바빠진 곳이 몇군데 있는데, 그 중에 한 군데가 세무서라 했던가. 잃어버렸다는 은행신용카드는 찾았는지 몰라. 요새 공무원들 사정인지 뭔지 땜에 설설 긴다던데, 그래서 그런가. 젊은 총각이 나보다 나을 것도 없군 그래. 청주 한씨 몇대 손이라 했더라... 21. 그 사이 젊은 세무서 직원은, 방금 들어온 대문을 흘끔 돌아보더니 자신의 방 앞에서 멈춰섰다. 문을 열려던 그가 고개를 돌렸다. 상국이 움찔했다. 다행히 청주 한씨는, 상국이 세들어 살고 있는 방과 부엌 쪽만을 휘둘러보고는 자기방으로 들어갔다. 상국이 휴우, 하며 화장실 건물 뒤에서 나왔다. 이발소엔 주인도 손님도 없었다. 김석배가 없어서 안됐긴 했지만, 문이 열려 있는 것만도 다행이었다. 문이 열려 있다는 건 멀리 가지 않았다는 뜻일 것이고, 그것은 곧 돌아온다는 얘기였다. 상국이 소파에 앉으려다 말고 다시 일어섰다. 출입문과, 그 맞은편에 있는 '까치다방' 쪽을 빠르게 쳐다봤다. 무언가를 확인하는 눈치였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었다. 상국이 얼른 출입문을 닫고는 책상 위에 놓인 전화기로 손이 갔다. "기셨어유? 아부지. 저, 상국이래유." "오냐 내다. 일은 잘되 가리라 믿는다만, 그래도 그렇지. 무심헌 놈...날이 꾸무리 해 들어왔드니...내 미리 들어오길 잘 혔구나. 그래 색시집에선 날이 떨어졌냐?" 말소리가 뒤틀리는 게 아무래도 이상했다. "아부지! 저라니까요. 한국이 아니고 상국이 말입니다. 상국이...!" "뉘여?" "상국이라구요!" "상국이...? 허면, 즉은 애란 말이냐?" "그렇다니까요." 그제서야 전화를 걸어온 사람이 한국이 아니고 상국임을 알았던지 노인의 목소리가 조금은 실망스럽다는 투였다. "어쨌건 잘 됐다. 그찮에도 내 전활 늘랴던 참이다. 느 성 일은 그래, 순탄하다는 건 안다만 매듭이 있어야 헐 것이 아니냐. 늙은 거 목젖 떨어지는 거야 빌 일이겠냐만 당최 동네사람들 등쌀에 붙어나질 못허겄다. 성화다 야단들이여... 색시 감춰두고 도둑장가 디릴 거냐구. 엊지녁엔 머느실서두 사람이 왔드라. 날 받았단 소문은 들어서 아는데 우째 기별이 ㅇ냐고 함서 딱어세우는데 되우 당혔다. 크흐흘... 따지구보믄 지들두 다 좋아서 그런 기지." 준비한 말대꾸가 달리 있을 리 없었다. 듣고만 있던 상국이 냅다 소리를 질렀다. "항국이 갸아... 튀어뿌ㄹ어유. 사방으루 수소문했지만 경비만 축나고...하여튼 없어유 어딜루 갔는지..." 한참을 주절거리던 상국이 아차, 했을 땐 이미 늦었다. 결국 한국의 가출을 알리고 만 것이다.전혀 그럴 의사는 아니었는데, 불찰이었다. 순간적인 잘못이었다. 언젠가는 알려지겠지만, 그때는 그때고 당장은 미룰 수 있는 데까지 미루자는 심산이었다. 22. 한국의 가출이 알려진다면 누구보다 손해될 건 상국 자신이었다. 노인에게서 들을 꾸지람을 무슨 수로 일일이 변명할 것이며 고향 어른들의 눈총과 비방을 무시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상국이 소리를 꽥 지른 건, 한국의 가출소식을 알리자는 게 아니었다. 노인의 말을 듣고 있노라니 왠지 억울한 감정이 불쑥 솟았고, 부아가 치밀었다. 자신이 은숙과 결혼한다고 했을 때는 그렇게도 반대하더니, 이번엔 상대의 얼굴도 보지 않고 싸고도는 게 아닌가. 늘 그래왔던 것처럼, 이번에도 따돌림을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의 일이라면 무조건 역성드는 노인의 심사가 괘씸하기도 했다. 그놈의 급한 성질을 못 죽여 고만 소리부터 내지른 것인데 맘에도 없는 말을 쏟아놓고 말다니. 난감했다. 가장 좋은 묘책은 저쪽의 노인이 꼬장꼬장 캐묻기 전에, 그리고 비난의 화살이 시위를 떠나기 전에 사건의 전말을 합리화시키는 일이었다. "내 하두 어이가 없어 긴 말씀 드리고 싶지도 않지만, 잘잘못으루 따지면 항국이 갸 잘못보다 아부지가 더하니까 누굴 원망친 마세유." 노인은 말을 잊었는지 숨소리만 가빠져왔다. 상국이 전보다 더 큰 소리로 떠들어댔다.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는데 아주 분하고 억울하다는 투였다. "항국이 그 자슥 말입니다. 석배가 소개시켜준 아가씨와 서너 번이나 만났나. 집으루 간다기에 그런가부다 했는데, 내중에 알고보니 둘이 짜고 날랐더라 이겁니다. 저쪽 아가씨집에두 알아봤는데 어디 잠깐 나갔다 온다구선 여지껏 종무소식이라니 하두 답답해서 집이루 전화드린 겁니다. 그 자슥 수중에 뭔 돈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그 돈 다 써야 돌아와도 돌아올 거 겉다구. 석배 그 친구가 설마 그짓말할 리도 ㅇ고... 나야 친 동기간이니까 그렇다고 하지만, 첫째 석배 보기가 미안해서요. 좋은 일 한답시고 아가씨까지 소개시켜줬는데 저쪽집 볼 면목이나 어디 있겠어유. 내, 아무리 모지라는 놈이라군 하지만...에이 그런기 우째 성이라고..." 그제서야 노인이 헛기침을 했다. "그러니까...뭐냐. 느 성이 색실 델고 어디룬가 갔다 이 말이냐? 그 처녀도 따라간 기 맹확허다냐고?" 노여워하거나 야단칠 법도 하건만 노인은 그게 아니었다. 노여워하기는 커녕 도리어 그런 한국이 대견스럽다는 목소리였다. "그렇다니까요 글쎄." "크을클...맹랑헌 눔. 영영 사내구실 못헐 줄 알었드니, 크을... 냅둬라. 비발이야 좀 나겠지만 내가 장만해 준 것이니께 신경쓸 거 ㅇ다. 돈 및푼이 대수 겉냐. 지눔만 돌아온다믄. 허고, 석배 그 사람 좋은일 허자고 헌 일인데, 좋게는 되얏다만 당분간 맘고생이 심헐 거 겉구나. 애비 니하군 둘도 ㅇ는 친구니 잘 다독이고. 크을클...맹랑헌 놈." 23. "모르겠어유. 내 그자식 땜에 석배 갸하구 의 상한 걸 생각하믄... 요샌 갸들 집이를 멀찍이 돌아댕긴다니까유. 삐릭이두 낮짝이 있다는데 석배 그 친구 만날 일이..." 상국이 하던 말을 뚝 끊었다. 뒤를 돌아보며 겸연쩍게 씨익 웃어보였다. 언제부터 와 있던지 석배가 지켜보고 있지 않은가. 아무리 넉살좋은 상국이라고는 하지만 일이 이쯤 되고 보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히 노인은 별말 없이 전화기를 내려놨다. "잘알 한다. 뭐...? 김석배네 집엔 일부러 돌아서 다닌다고? 한국이 그 자식이 누구랑 어쨌다고? 에라이! 순..." "금 임마 어쩌냐. 전화 도둑질한 건 미안타만 아주 황당무계헌 것만두 아니다. 근거 있응께. 허고, 니 얘긴 잘 했다. 꼰대도 감사하다 했고." "뭐야? 황당무계한 기 아님? 한국이 그 인간이 연실 씨허고 튀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이 말이냐. 하늘이 알고 땅이 욕한다 이눔아. 허다 버릴 말이래도 고ㄹ게 하는 기 아녀. 주딩이로 나온다고 함부로 나불거려서, 그ㄹ잖아도 편치 못한 우리 연실 씨 맴에 못질을 혀야 쓰겠냐고." "어쭈우...이게 아주 이젠 승까정 짝 빼불고 곳감씨 발리듯 술술 불러제키네. 연실씨 연실씨 험시로. 차암 나원..." 아니꼽다는 듯 상국이 석배를 째려보며 소파에 털푸덕 앉았다. 석배가 따라 앉았다. 그다지 화를 내는 기색은 아닌 듯했다. 겉창 밖으론 서서히 어둠발이 둘러쳐지고 있었다. 미등을 켠 택시가 긴 경적을 끌며 4거리 쪽으로 내달렸다. 석배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던 상국이 눈쌀을 찌푸렸다. 의뭉스런 구석이 다분한 석배이긴 했지만 오늘따라 더해 보였다. 다른 때 같으면 도둑전화 한 통화만 갖고도 길길이 날뛰었을 놈이, 얼굴에 미미한 웃음기까지 매단 게 아주 인자하고 너그러운 모습이었다. 멀거니 쳐다보고 있는 상국으로선 참말로 저러는 건지 거짓부렁으로 속내를 다스리고 있는 건지 도시 종잡을 수가 없었다. "돌배 너 속이 안좋냐. 잡아다 논 꿀꿀이상 맨치로... 나 역시 속이 더부룩하다만 어쩌겠냐. 이핼 좀 해다구. 오죽하믄 그런 거짓말까지," "아니다. 아녀 임마. 그런 일쯤에 화를 낼 이 김석배가 아니다. 다 이해헌다. 전번에도 말했지만 내 개인적으루야 한국이 그놈 가출한 거 참으로 잘된 일이지만 속으론 나두 노심초사혔어. 그깐눔 장거리 전화 한통이 맥이 뭐라고." 갈수록 태산이라고, 석배의 말이 꼭 그랬다. 이건 들을수록 오리무중이었다. 무슨 일이 있기는 있구나 싶었다. 하지만 상국이 물을 사이도 없이 석배의 입에서 그 답이 나오긴 했는데 실로 청천벽력 같은 말이었으니. 24. "작정했다. 결혼하기로 가부 결정을 내렸어. 나이 차이가 나긴 하지만 대수냐 둘이 맘만 있음 되는 거지." "뭐여! 너 시방 뭐라 그랬냐. 결혼...?" 상국이 어찌나 놀랐던지 엉덩이를 들썩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석배는 아주 태연했다. "그려 임마. 결혼. 날두 잡아놨어. 내년 4월 5일 식목일루." "누구하고? 상대는?" "알 만한 놈이 뭘 그ㄹ게 눈치도 ㅇ냐. 누구긴 누구것어. 연실 씨지. 나는 임마 너하군 차원이 달러. 오로지 일편단심이다. 연실 씨만이여. 그 사이 사정 얘길 하믄 복잡하다만 결론적으루 서로 결혼하기로 담판지었다. 노래방두 가봤고 단둘이 맥주도 마셔봤고...좀 뭣한 얘기다만 여관이란 데두 가봤잖냐. 긍께 완존히 내껄로 맹글어뻔졌다 이 말이지. 이젠 지가 날구 싶어두 못날어. 이 김석배 도장 콱 찍혀있응께로." "짜아식...이제보니 너... 어리숙한 한국이 걀 미끼루 쥐인지 양인지 하는 고년한테 접근했구나. 얍삽한 자식..." "상국이 너...아무리 친구라구 하지만 말조심 못허것냐. 고년이라니! 니 형수씨 될 분이여 임마. 한국이 껀으루 자주 만난 건 사실이다만 이용한 건 아녀. 설사 이용 좀 했기로서니 그게 어디 잘못이라두 된다냐. 왜? 한국이 짝이 못되서? 아서라 임마, 맨발에 양환 게." "샛긔넌. 그럼, 니눔헌틴 개발에 편자다 이 말이냐. 어쨌든 그 요사헌 다방냄비하고 결혼한다니 축하헌다. 진심으루." 상국이 씁쓰레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석배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이참에 아주 다 말해야 쓰겠다. 니눔 입에서 고매한 연실 씨 들먹이는 꼴 보기에도 상스럽고. 사실은 나두 첨엔 긴가민가 했다만, 연실 씨 말여. 다방에서 근무하긴 하는데, 종업원이 아니고 거 뭣이냐. 그려, 주인이라더라. 사장이란 겨. 주인 행세하는 늙다리 중닭은, 가우마담이 뭔지 하여튼 그런 거고 진짜 주인은 연실 씨라지 않냐 글쎄." "뭐어...? 상국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석배의 말을 듣고 있노라니 꼭 꿈을 꾸고 있는 기분이었다. 석배의 말을 대충 추려보면 이러했다. 주연실이라는 여자가 까치다방의 실소유자라는 것.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는 뭣하는 사람인지는 잘 모르나 어마어마한 재산과 부를 소유한 재력가이며 현직 여당 국회의원의 유일한 후원자라는 것이 아닌가. 25. 요연하게 말하자면 그의 아버지는 재력과 권력을 겸비한 실력자라는 것이고, 지금 현재 갖고 있는 다방도 그녀의 아버지가 사준 것이란다. 아마도 딸에 대한, 그것도 하나밖에 없는 외동딸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일 것이라는 게 석배의 사견이었으며, 그들 두 부녀의 사이가 워낙 나빠 견원지간이라 했다. 그러면서 석배 자신으로 볼 때는, 오히려 그것이 하늘이 내려준 천재일우의 기회라는 거였다. 그들 사이가 여늬 가정과 같아 한집 살림을 했다면, 일개 구멍가게나 다름없는 이발소 주인인 석배로서 그녀와의 결혼은 커녕 그녀를 어떻게 만나볼 수나 있었겠냐고 했다. 그러한 둘의 관계가 내년 4월 5일까지는 지속되어지길 바라며, 욕심이라면 결혼이 성사된 다음엔 그들의 관계가 호전되어 정식으로 그의 사위로 들어앉길 바라는 눈치였다. 연좌제와 더불어 권력의 승계는 끊어진 시대라고는 하지만 부의 세습은 허용된 시대상황으로 볼 때, 석배의 그러한 은근한 바람은 전혀 쓰잘데없는 망상이라고는 할 수 없었고, 오히려 그럴 수도 있으리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때부터 허리통증은 언제였냐 싶게 싹 가시고, 대신 아랫배가 슬슬 아파오기 시작하는 상국이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모든 사실들을 증명이라도 하듯, 석배가 머리를 쓸어내리며 하는 말이 있었는데 마치 제가 다방의 사장이라도 된 듯한 투였다. "배운망덕 배운망덕, 말은 많이 들어봤지만, 그 정도까지 막되먹을 줄이야... 너두 알다시피 여름 내내 멕여주고 재워주고 사무실까지 내주지 않았겠냐. 헌데 이 늙은이 나갈 때는 공을 웬수로 갚은 거야. 다른 사람은 다 못 믿었어두 그늙은이만큼은 그럴 줄 몰랐다." "건 또 뭔 소리냐. 내 오늘 니 말 질내 듣다간 문지방 넘지 못하지 싶다." 상국이 아랫배를 문지르며, 아주 속이 불쾌하다는 듯 억지로 개트림을 해댔다. "이론지 이백인지 하던 돌팔이 점쟁이 말이다. 자고 일어나보니 없어졌는데, 이놈이 저만 없어진 게 아니라 아가씨 계약할려고 뫄둔 돈 이백만 원까지 없어졌더란 거야." 그러면서 세상에 믿을 놈 한놈 없고, 잘해줄 필요 하나 없다 했다. 그제서야 상국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로를 마지막으로 만났던 다음날 아침, 상국이 까치다방을 다시 찾아갔을 때의 험악하던 실내분위기가 떠올랐고, 욕지거리를 마구 퍼붓던 여종업원들의 악담이 종처럼 흔들려 왔다. 상국이 일어서며 기지개를 켰다. 사위는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상국의 발걸음이 더없이 무거워보였다. 26. 유태중이 허리를 지그시 굽혔다. 고개를 슬몃 틀더니 그물망 쪽을 뚫어져라 주시했다. 그물망 상단 중앙에는, 황색의 원점으로 표시된 플라스틱 타게트가 망사에 대롱거리고 있었다. 타게트를 얼마간 뚫어져라 쳐다보던 유태중이 심호흡을 들이켰다. 눈을 부릅뜨더니 굽혔던 허리를 서서히 펴며 백스윙을 시작했다. 클럽이 서서히 허공을 향했다. 비스듬히 허공을 가로지르던 클럽이 한점에서 우뚝 멈췄다. 일순, 모든 게 정지했다. 사이, 그의 오른쪽 다리가 무너지는가 싶더니, 따악! 희끗한 점이 날랐다. 선이 되었다. 희고 곧은 선이 포물선을 그으려는 찰나, 그물망이 출렁했다. 도로 선이 점으로 변하더니, 그 점이 조금 커졌다. 투욱...! 초록색 양탄자 위로 구르는 볼을 지켜보며 그제서야 유태중이 휴우,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넨장...또 오비군." 티샷을 끝낸 유태중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집 나간 마누라와 오비볼은 찾지도 말랬다고, 기분 나쁘긴 했지만 일찌감치 잊는 도리밖에 없었다. 골퍼에게 오비볼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제아무리 뛰어난 프로골퍼라 해도 공은 둥글 수밖에 없으며 방심은 있게 마련이었다. 지구상의 모든 골퍼를 다 동원해봐도 오비졸업장을 받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불청객임엔 틀림없는 사실이었으나 그렇다고 문전박대할 수도 없는 게 바로 이놈이었다. 한낱 미신에 불과한 줄 뻔히 알면서도, 누구라 할 것 없이 흰색이라면 (경계선을 표시하는 말뚝의 색깔이 흰색이었으므로) 와이셔츠 입는 것조차도 꺼려할 정도였다. 오비가 난다는 것은 한눈을 팔았거나 주의력이 산만해졌다는 얘기고, 이것은 곧 집중력이 떨어졌음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 골프는 기술이 2할이고 정신력이 8할이라 했다. 골프에 있어서 주의력과 집중력은 곧 승패를 좌우했다. 유태중이 스릴 넘치는 빠찡꼬를 마다하고 새삼스럽게 골프를 배우게 된 이유도 그래서였다. 분산된 정신을 한곳으로 집중시키자. 그것만이 사업에 성공하는 길이라 믿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오비라니... 심호흡을 들이킨 유태중이 다시 티(tee) 위에 볼을 올려놓았다. 그가 막 스윙 자세를 취하려할 때, 뒤로부터 발자욱 소리가 들려왔다.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미니스커트 차림의 아가씨였다. 빠른 걸음으로, 그러나 아주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그의 곁에까지 다가와서는 조용히 멈춰섰다. 치렁치렁한 머리결을 뒤로 쓸어넘기며 서 있는 그녀는 무슨 말인가 할 듯했지만 유태중이 샷을 끝낼 때까지 잠자코 기다리고 있었다. 27. 한 점의 선이 빠르게 허공을 가르며 타게트의 중앙에 꽂혔다. 그제서야 유태중이 싱긋 웃으며 죄어있던 어깨를 풀었다. "저어...회장님." "휴우...!" "모두들 기다리고 계십니다만..." 그제서야 유태중이 그녀를 돌아봤다. 비서실에 근무하는 장지연이었다. 그녀가 버릇처럼 머릿결을 쓸어올리며 몇 마디 덧붙였다. "복지원에 변 실장께서는 출장 중이시라구...대신 공손묵 과장이 참석했습니다." 그때까지 묵묵히 듣고만 있던 유태중이 골프채를 장지연에게 넘겼다. 말이 없긴 마찬가지였다. 발길을 돌리려던 그가 흘끗 타게트를 쳐다봤다. 무언가 노리는 듯한 매서운 눈초리였다. 그들이 서 있는 곳은 조립식 간이건물이었다. 본건물의 뒤편에 세워진 이 조립식 건물은, 유태중 혼자만이 사용하도록 설계된 골프연습장이었다. 급히 설치한 때문인지 호화롭다거나 사치스러운 구석은 눈에 띄지 않았다. 시멘트 콘크리트 바닥에는 초록색 양탄자가 깔려 있었고, 그 위에 다시 고무 메트가 일직선으로 늘여져 있었는데 그 중간에 플라스틱 티가 구두 뒷굽 정도의 높이로 박혀져 있었다. 네 개의 철주가, 슬레이트 지붕을 받치고 있었는데 여름이어서 그랬는지 벽은 없었다. 장지연에게 골프채를 넘긴 유태중이 곧바로 2층 회의실로 향했다. 그가 문을 열자 앉아있던 열서너 명의 중역들이 일제히 일어서며 허리를 조아렸다. 둘씩 또는 셋씩 짝을 지어 수근거리고 있던 실내가 갑자기 숙연해졌다. 좌중을 쓰윽 둘러본 유태중이 표정없는 얼굴로 몸을 비스듬히 기대며 주석자리에 앉자 옆에 대기하고 있던 비서실장 방유석이 '회장님께 대하여 일동 경례!'를 외쳤고, 비서실장 방의 구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기립하고 있던 좌중이 또 한번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그제서야 유태중이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중역들의 좌정을 확인한 방유석이 회주(會主)쪽을 향해 간단한 현황보고를 했다. "본사를 비롯한 대양그룹 5개 계열사의 임직원 대표 13명 전원 참석했습니다. 복지원의 변 실장만이 갑작스런 출장으로 궐석입니다만, 대신 공손묵 과장이 참석하였으므로 회의 진행에는 하자가 없음을 보고드립니다." 다들 고개를 조아리며 유태중을 쳐다봤다. 말을 하고 있는 방유석 역시 그를 보고 있었는데 어딘지 겸연쩍어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룹'이니 '계열사'니 하는 말을 거침없이 뱉어내고는 있었지만, 자신이 생각해도 낯 간지러웠다. 28. '대양주식회사'라는 회사 자체부터가 말이 종합물산이었고 주식회사였지 실은 부동산투기나 하는 유령회사에 다름 아니었고, 사회복지법인으로 설립된 '대양복지원' 역시 사회사업단체라고는 하나 실상은 더럽고 구린내 나는 유태중 개인사업을 위장하기 위한 허울에 불과했다. '대양복지원'을 운영함에 있어, 그 자신의 호주머니에서 지출되는 경비란 거의 없었고, 소요경비 전액이 정부로부터 보조되었다. 뿐만아니라 복지원에 들어와 있는 노약자들을 부려, 양돈과 양계사업까지 하여 짭잘한 수익마저 챙기고 있었으니, 유태중의 입장으로 본다면 꿩 먹고 알 먹는 셈이었다. 자칭 대양물산의 계열사라고 들먹거리는 두 개의 사업체는, '대양백화점'이라고 불리는 슈퍼마켓과, 시장 내에 있는 정육점을 이름인데 이는 유태중 자신도 처음엔 탐탁치 않게 생각한 것이었다. 방유석의 끈질긴 주장도 있었고, 자금사정도 넉넉하던 때인지라 밑져봐야 본전이겠거니 하여 개점했는데 의외로 이문이 좋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정육점에서 판매하는 정육의 전부이거나 대부분을 복지원에서 출하되는 생돈으로 충당했으니 말이다. 방유석이, 회장인 유태중으로부터 남다른 신임을 얻게 된 것도 이때부터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룹의 계열에 끼어든 것이 '극락교회'인데 사실 이 또한 신종 부동산투기에 지나지 않았다. 이렇게 놓고 볼 때, 그룹이라고 부른다는 게 좀 뭣하긴 했지만 유태중은 언제나 '대양그룹'의 회장임을 자처했다. 그가 그러했으니 그 밑에서 빌붙어 먹고살아야 하는 무리들이야 오죽했겠는가. 유태중,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자신을 합리화시키곤 했다. 즉, 자신의 속하에 있는 모든 사업체는 - 복지원은 물론 교회까지도 - 이윤을 목적으로 운영관리되어야 하고 그 활동이 생산적이고 재(財)테크적이어야 한다. 영리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어떠한 사업이나 활동도 있을 수 없으며, 자신의 소신과 철학은 오직 부(富)의 창출과 이재에 있다. 돈이라고 하는 것은 시간을 무한정으로 확장시켜주기도 하며 단축시키기도 하고, 개인의 활동 영역을 늘일 수도 있고 줄일 수도 있는 것이다. 환언하자면, 인간에게 있어 돈이라고 하는 것은, 삶과, 그 삶의 길고 짧음에 관여할 뿐만 아니라, 삶의 질을 풍요롭게 또는 윤택하게 할 수도 있으며, 사회적 활동범위를 임의로 조절할 수도 있는, 아주 편리하고 유용한 것이다. 계약이 약속으로 변하여, 그리고 그 개개의 약속이 누대에 연루되면서 사회에 대한 개인의 윤리가 형성되어 가듯이, 모든 질서와 규범은 의외성을 동반한 임의로운 것들로부터 출발하였으며, 극히 필요한 최소한에 그쳤던 것이다. 그러나 현재는 어떠한가. 29. 태어나자 마자 인간은 그 스스로와는 전혀 엉뚱하고 동떨어진, 다시 말해서 자신의 의사는 단 한마디도 물어보지도 않은 채 아주 위압적이고 거만하며 외공(畏恐)스럽기까지한, 사회적 인습과 도덕을 스승으로 하여, 질서와 규범이라는 잘 다듬어지고 반질반질 윤이 난 길을 죽는 날까지 군말없이 따라가야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반란이 돈이다. 그것은 단순한 배역이 아니라 거부의 몸부림이며, 본래의 목소리와 맵시를 돌려받기 위한 그만의 날개짓인 것이다. 계약의 상징이며 약속의 표식인 돈. 그러나 자신의 의사에 반한 계약이라면 파기되어야 마땅할 것이고, 자유를 구속하자는 방편으로의 약속이라면 이 또한 취소되어야 할 것이다. 현명한 자는 돌아볼 줄 안다. 지나온 길이 잘못되었다고 믿으면 과감히 떨쳐버리고 되돌아갈 줄도 안다. 하나의 문이 있고 그는, 그 문으로 들어왔다. 되돌아 나가야 할 문은 그 한 곳뿐일 것이다. 곧 돈이다. 기존의 모든 도덕과 인습을 파기하기 위해서, 그리고 잃어버린 인간성을 회복하고 자유를 복구하기 위해서 돈은 필요한 것이다. 이 모든 노력은 돈이라는 무기가 있을 때만이 가능한 것이다. 돈, 돈이란 것만 있다면, 아무리 부도덕한 행동을 해도 규범에 어긋났다고 비난받지 않을 것이며, 제아무리 망나니 같은 처신을 해도 질서를 해쳤다고 해서 구속당하지 않을 것이다. 계약을 파기했다 해도 계약금을 두 배로 갚으면 고만인 것이고, 약속을 위반했다 해도 손해배상이나 보석금을 주면 풀려나는 것이다. 동전의 양면이 전혀 달리하듯, 마찬가지로 돈의 기능 또한 이렇게 상반되는 것이다. 그의 생각이 이러했으매, 그의 모든 사업은 돈을 벌자고 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이윤추구에 어긋나는 어떠한 사업운영도 그는 용납하지 않았다. 방유석의 경과보고를 지긋이 듣고만 있던 유태중이 고개를 끄덕이며 좌중을 훑어봤다. "수고하셨습니다. 갑자기 여러분들을 모이도록 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경영일선에서 수고하시는 여러분들 뵌 지도 오래됐고, 또...격의없이 상의할 일도 있고 해서 이런 자리가 마련된 줄 압니다. 여러분들의 탁월한 수완과 노고에 본인은 진심으로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유태중이 부드럽게 운을 뗐다. 얼굴엔 그 어느 때보다 인자하고 온화한 빛을 띠고 있었으며 기업의 총수다운 위엄은 어디에고 없었다. 손주를 무릎 위에 올려놓은 늙수그레한 촌로 같은 온정이 물씬 풍기기까지 했다. 그러나 유태중의 이러한 따뜻하고 편안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자리에 모인 임원들은 하나같이 어색한 자세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으니. 아니, 그냥 고개만 숙이고 있는 게 아니라 콩당콩당 들뛰는 가슴을 어쩌지 못하고 슬금슬금 눈치들만 보고 있는 형편이었다. 30. 유태중이란 인간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들이었다. 겉으론 저렇게 누그러져 있으나 언제 떨어질지 모를 날벼락이었다. 언짢고 불만스러울수록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고래고래 고함을 쳐야 할 자리에서 짐짓 너그러움을 가장했고, 그렇게 얼마간 입에 발린 소리로 상대방을 추켜세웠다. 그러다간 느닷없이 '그런데 말이오'라고 말머리를 돌렸다. 그때부터 시작되는 질타와 힐책은 서슬퍼런 추상이었고 추호의 가차도 없었다. 그들에겐 차라리 붉으락푸르락하며 나대는 욕지거리가 골백번 편했다. 저린 오금을 펴지도 못하고 다들 설삶은 호박잎처럼 시르죽어 있는데 저쪽 끝에서 경망스러운 기침소리가 들려왔다. "쥬님의 은총이 츙만하심을 축복드립니다. 회장님께서 져희 교회를 맡으신 이래 모든 죵도들의 믿음은 반석과 같이 되었샤옵고 교회는 날로 창셩하고 있ㅅ니다. 이 모든 기적이 오직 회장님의 은혜라 믿샤오매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기쁘기 한량없샤옵니다." 교회 대표로 참석한 김주연 목사였다. 교회의 주인이 유태중으로 바뀌면서 새로 영입된 담임목사였는데 40대 초반으로 작은 키에 빼빼 마른 체구였다. 극락교회로 오기 전까지만 해도 그는 어느 시골구석의, 신도라고 해봐야 스물댓 명 남짓한 쬐끄만 교회의, 세 끼 양식마저 걱정해야 하는 빈궁하기 그지없던 무명의 전도사에 불과했었다. 그런 그가 발탁된 것은 순전히 대양물산 비서실장으로 있는 방유석의 천거 덕분이었다. 방유석과는 고등학교 동창이라는 사사로운 학연 때문이었는데, 그렇거나 말거나 어차피 교회 쪽으로야 까막눈일 수밖에 없는 유태중이었으니 반대할 건덕지도 없었다. 친구 하나 잘 둔 덕분으로 하루아침에 일약 유명교회의 유명목사로 변신한 그는, 혓바닥만 뽑아내면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을 정도로 유난히 혀가 길고 말이 많았다. 다들 혀를 내둘렀으나 방유석이 버티고 있었으므로 이렇다할 소란은 없었다. 절름발이에 북채 쥐어주는 격으로, 거기에 한술 더 뜨는 유태중이었다. 무슨 말로 어떻게 후려잡았는지는 모르나, 그가 들어온 지 며칠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그 촌뜨기 전도사를 부목사도 아닌 주임목사로 내정했다는 발표였다. 아무리 개인소유의 교회라고는 하지만 이건 해도 너무한 인사처분이라고 다들 쑤근거렸다. 하지만 공론이 되진 못했다. 왜냐하면 그로 인하여 인사상 피해를 본 목회자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기존에 있던 담임목사는 그냥 둔 채 자리 하나를 더 늘인 것에 불과했다. 그리고 유태중의 주장이 너무나 합당하기도 했다. 즉, 교회운영을 이원화한다는 거였다. 기존의 담임목사에게는 설교와 전도사업만 전담케 하고 그외에 교회 살림살이와 회계업무는 새로 영입된 담임목사에게 일임한다고 했다. 하지만 신임 김주연 목사가 경영에 참여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31. 풋내기 전도사가 들어오기 전에 그가 임명한 회계담당자가 있어, 회계와 경리를 비롯한 모든 경영권은 유태중의 수중으로 이미 넘어간 다음이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그러한 이유를 단 것은 그 나름대로의 꿍꿍이 속이 있어서였다. 다시말해 담임목사라는 자리를 둘로 함으로써 기존의 담임목사를 비롯한 교회간부들로 하여금 자신에 대한 충성심을 경쟁적으로 유발시키자는 속셈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이 유일하게 떠받드는 여호와 하나님과 주 예수그리스도 위에 군림하자는 야심이었다. 이러한 엉뚱하고도 허황된 듯이 보이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야심이, 그러나 그의 치밀하고도 주도면밀한 계획에 의하여 너무나 쉽게 이루어지는 듯했다. 바로 김주연과 같은 무리 때문이었다. "좋아요, 좋아. 내 진작에 김 목사 같이 신앙심이 두텁고 전도사업에 열성인 분을 모셨어야 하는 건데. 어쨌건 저를 위한다 생각지 마시고 오로지 교회를 중흥시킨다 하는 사명감으로 더욱 분발해주시기 바랍니다. 허고...유념해주실 것이...목회사업이나 복지사업이나 사회사업이 아니겠습니까. 성경 한 줄도 안 읽어본 사람이 이런 말한다는 게 주제넘을지 모르지만, 부자가 천당들어가기가 그렇게 어렵다면서요? 또오... 재물을 곳간에 쌓지 말고 하늘나라에 쌓으라면서요? 너무나 엄청난 공사비가 드는 역사라놔서 이곳에 있는 임원진은 물론 나 자신까지도 망설인 게 사실입니다만, 지금 생각하니 아주 잘했다는 생각입니다. 헌데 저의 이런 뜻을 성도들이 너무 몰라주는 것같아 안타깝기 그만입니다. 내가 알고 있기론 교회는 하나님의 집인 줄로 압니다. 그 하나님의 집을 증축한다는데 성도들의 성금이... 이래가지고서야 어디 목회사업에 신이 나겠습니까. 일차적인 책임이야 믿음이 부족한 신도들에게 있겠지만 우리교회 자체에도 문제가 있다는 것을 통감해야 할 것입니다. 전도도 중요하지만 인도가 더욱 중요하다고 봅니다.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신도들을, 헌신적이고 봉사적이며 전체교회를 위하여 그야말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칠 각오가 되있는 신앙인으로 이끌 의무가 목자들에게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김 목사님이야 어련하실까마는, 아무래도 다른 목사들이..." 장황하고도 지극히 우회적인 유태중의 힐책에 김주연이 찔끔했다. 그러나 그의 길쭉하고 날렵한 혓바닥이 곧바로 유태중의 말을 받아넘겼다. "그러잖아도 이번 쥬의 설교제목을 마가복음 23절부터 31절로 정하였ㅅ니다." "...?" "예슈께서 가라샤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전토를 버린 쟈는 금셰에 있어 집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겠고 내셰에 영섕을 받지 못할 쟈가 없느니라. 그러나 먼져 된 쟈로셔 나ㅈ 되고 나ㅈ 된 쟈로셔 먼져 될 쟈가 많으니라, 하시는 셩경말ㅆ입니다. 이 말ㅆ은 곧..." 유태중이 눈을 찡그시 감은 채 아주 못마땅한 표정으로 듣고만 있었다. 32. 목사의 곁에 있던 슈퍼마켓 지배인이 허리를 몇 번 찌르자 그제서야 그는 예의 그 긴 혓바닥을 쓰윽 훑더니 말을 마쳤다. 잠시의 침묵이 이어진 다음 유태중의 점잖고도 묵직한 음성이 다시 계속되었다. 말은 안 했지만 불쾌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늘 있는 일이지만, 그는 그의 말 중간에 누가 끼어드는 것을 제일 싫어했다. 그 자체를, 그는 자신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그에겐 이유나 변명이 그다지 필요없었다. 그저, 예 하고 군말없이 따르기를 원했고 무조건적인 복종을 강요했다. 복지원의 관리실장으로 있는 변상열과 사이가 좋지 못한 것도 사사건건 이유를 달기 좋아하고 물고늘어지기 잘하는 변상열의 성격 때문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손발이 안 맞는다 이 말입니다. 교리 임야 건만 해도 그래요. 그게 대체 언제적 얘깁니까. 양쪽 변호사 비용만 해도 천만 원이 넘지 않습니까. 주소가 틀리면 만들면 될 거 아니오! 그래 놓구두 변 실장 이 사람은 뭘 잘했다고 코빼기도 안 보이고... 대책이 있어야 할 거 아니오. 대책이!" 유태중이 고함을 버럭 지르며 기어이 분통을 터뜨렸다. 좌중을 일별해가던 그의 시선이 김주연에게 가서 딱 고정되었다.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김주연이 흠칫했다. 유태중의 시선이 이번엔 공손묵에게로 건너갔다. "어디 지도과장 얘기나 들어봅시다. 그 산이 청풍 김씨 문중산이라면서요?" "예에...그렇긴 합니다만, 그게..." 공손묵의 고개가 늙은 혹부리의 혹처럼 축 늘어졌다. 실장도 어쩌지 못한 일을 과장인 자신에게 대책이 있을 리 없었다. 또 그걸 모를 리 없는 유태중일 것이다. 굳이 자신을 지목하고 나선 데는 그 말고 다른 뒤풀이가 있음이렸다. 곧이어 쏟아질 문책을 생각하니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얼굴만 내밀면 된다고 하기에 아무 생각없이 왔는데 와서보니 그게 아니잖는가. 죽사발은 지놈이 깨놓고 걸레질은 날더러 하라니. 회장 책상 위로 뛰어올라가? 올라가설랑 직통전화를 걸어? 둘러댈 핑계가 궁하니 출장이었지 제 놈이 어디 가있는지는 돋보기로 손금보기 아닌가. 바삭바삭 타들어가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던 공손묵이 고개를 힘겹게 들어, 초점 없는 눈으로 먼 산을 건너다 본다. 멀리 복지원이 떠오르고, 문제의 야산이 지척으로 잡혀왔다. 33. 2년 전이던가. 부동산 투기에 혈안이 된 유태중이, 복지원을 휘감고 돌아 앉은 금수산 한닢을 가리킬 때만 해도 별거 아니거니 했다. 돈만 주면 살 수 있는 것이 부동산이었고, 더구나 복지원이 들어선 뒷산이고 보니 매입하겠다는 이유 또한 분명했다. 목장이 어떻고, 유실수가 어떻고, 선산지기가 어떠니 해가며 맘에도 없는 구구한 변명을 늘어놓을 필요도 없이, 딱 한 마디, 병 들고 불쌍한 원생들을 위한 자선사업이라고만 말하면 만사형통일 것이었다. 군청 민원실에 가서 지적도를 띤다 법원에 가서 등기부등본을 열람한다 해서 알아본 결과, 세 사람 명의로 된, 청풍 김씨 문중산이었다. 대표자 격되는 사람이 시내 모처에 근무하는 김 아무개였는데 매입 의사를 밝히자 고귀한 사업이라며 선뜻 응했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까짓놈의 황지(荒地) 친족간에 분쟁이나 일으키지 않을까 그러잖아도 골치거리였는데 아주 잘된 일이라고, 되레 사겠다는 이쪽에 대해 고마워 했다. 거저 공거다시피 헐값에 계약까지 체결하고 잔금까지 다 지불했는데 마지막 등기이전 절차에서 고만 삐그덕 거리기 시작하더니 이날 입때까지였다. 복지원 뒷산이라면 말도 나오기 전에 머리부터 흔들게 되었다. 회장의 관심도는 뒷전으로 하고라도, 도대체가 해결될 기미라곤 좁쌀에 씨눈만큼도 없었다. 그걸 이제와서 낸들 어쩌란 말인가. 공손묵이 심히 못마땅하다는 듯이 먼 산만 계속 주시했다. 그렇다고 콧구멍만 후비고 있는 유태중이 언제까지고 저렇게 조용할 리 없잖은가. "저의 복지원 나름대로 대책을 강구 중입니다만, 워낙 자손들이 많아서... 현재까지 밝혀진 숫자만도 30여 명에 달하는지라 아무래도 다 찾자면..." "앞으로 2년이면 되겠소? 아니지 어차피 늦은 거 원리원칙에 밝고 법대로 하는 냥반들이라 아무래도 20년 정도는 걸려야 되시겠지. 그러다 보면 그 자손이 또 자손을 낳고? 에이잉! 참으로 한심들 하시오! 생각들이 우째 하나같이 그 모양들이오. 일들을 할 줄 모르면 차라리 그냥 쉬시오. 처자식 거느리신 귀한 분들을 설마하니 내쫓기야 하겠소. 놀아두 그냥 노시라 이 말이오. 명색이 대양그룹 중역이란 냥반들이 그래, 허구헌날 청풍 김씨 족보나 베끼고 있는 데서야...당신들은 그래 쓸개도 없으시오. 김문근이 김재순이 죽은 지가 언젠데 아직도 그 밑에서 설설거린단 말이오. 한심한! 그나마 콧구멍이 두 개니 숨이라고 쉬지..." 34. 회의장 분위기는 그 어느 때보다 숙연했다. 기침소리하나 들리지 않는 위태로운 침묵이 이어진 다음, 유태중이 다시 입을 열었다. 엄동에 얼어붙은 얼음장이 쩍쩍 갈라지는 듯한, 그런 목소리였다. "보고 들어온 바로는, 공 과장 어떠시오?" "네에? 무슨 말씀인지..." "복지원 운영 말이오." 이건 완전히 공손묵 자신 한 사람에게 겨냥된 십자포화였다. 이 모든 수모가 변상열이 뒤집어써야 할 것들이라는 생각이 들자 그가 죽이도록 미워졌다. "원생의 숫자가 급격히 줄어든 탓으로 어려운 건 사실입니다만...그 외엔 별 문제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당국과 협의 중이라 조만간 해결될 거로 믿습니다만..." "참으로 딱하시오. 어째 그리 남의 말 하듯 하시오. 복지원에서의 원생은 뭘 뜻하는지나 아시오? 병원에 환자가 없으면? 불문가지 아니오. 폐쇄요 폐업! 예배당에 예수야 없어지면 십자가로나 대신 하면 되지만 이건 까짓 예수 정도의 문제가 아니란 말이오. 우리 모두의 사활이 달려있는 것이오. 사활!" "오오! 쥬여! 쥬여...!" "시끄럽소!" "어쨌건 작금의 제반의 문제를 살펴보면 하나 같이 무능, 무소신, 무기력, 떠넘기기 작태들 때문이란 걸 명심들 하시오. 손 과장께서는 돌아가는 대로 당장에 원생 충원방안을 보고하시오. 임야 이전등기 건은 나에게 따로 생각이 있으니 차후 연락하겠소. 그리고," 그가 무슨 말인가 더하려고 할 때였다. 비서실로 통하는 문이 열리며 장지연이 들어왔다. 벌벌 떨고 있는 사내들을 싹 무시한 채 유태중의 옆으로 가더니 메모지를 내밀었다. 그리곤 그의 귀에다 대고 무슨 말인가 속닥거렸다. "그러니까...의원님께서...몇 시라고? 그래 나를 찾는다 이 말이지?" 유태중이 상기된 얼굴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방유석에게 나머지 지시사항을 시달하고는 부랴부랴 장지연의 뒤를 따라 나갔다. 유태중이 나가고 나자 갑자기 실내가 어수선해지기 시작했다. 담배에 불을 붙이는 자, 가래침을 뱉는 자, 옆사람과 농담을 주고받는 자. 모든 이들의 얼굴이 활짝 피어 있건만 한쪽에 웅크리고 앉아있는 목사 김주연만은 여전히 심각한 채, 긴 탄식을 신음처럼 내뱉고 있었다. "오오! 쥬여!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쉬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쇼셔. 이 모든 환난이 오직 저에게로 말미암이나이다. 오, 쥬여...!" 6. 몰이꾼 1. 산은 산이로되 산이라고 할 수 있는가. 물은 물이로되 그 또한 물이라고 할 수 있는가. 진달래 산벚꽃 색색으로 요염하여 사람을 홀리더니 으아리 한움쿰 손에 들고 따라가면 어느새 저만큼 길을 막고 뿌리치는 노박덩굴 으름덩굴 청미래덩굴이 그렇고, 개망초 소루쟁이 진초록으로 피었다 억새꽃 결결이 날리우며 속절없이 가버리는 심사 또한 얼마나 야속하더냐. 혹한의 가지 끝에 소담스러이 피어있는 눈꽃이 가상하기도 하더니 어쩌자고 한줄기 바람에 분분히 스러진단 말인가. 주야로 그치지 아니하고 사철을 두고 막힘이 없는 청류옥수를 일러 누가 물이라고 하지 아니하련만, 낮은 곳으로 임하고자 하나 근원을 산정에 두고 있음이 아닌가. 돌부리에 잘리우고 산굽이에 휘둘려 천분만열(千分萬裂)로 갈라질지언정 종내는 대해로 통일되는 게 물이라고는 하나 풀잎에 맺들인 물방울이 위태롭고 모롱이마다 회절하는 물길이 지나치게 간살스럽지 아니한가. 산은 산이로되 어쩐지 허전하고 물을 물이라 했으되 아무래도 허무한 것을... 하지만 어쩌랴. 산은 산이어서 산 같지 못함을 알고, 물은 물이어서 물 같지 못함을 알거늘. 산이 산으로만 있다면 산은 이미 산이 아니요, 물이 물로만 있다면 그 물은 진작에 물이 아니었을 지도 모를 일. 그것이 아무리 산 같지 아니하여도 산이라고 불려진다면 어디엔가 산의 모성이 있기 때문일 것이요, 마찬가지로 물이라고 불리워지는 한에 있어서는 물의 근성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대저 하늘의 형(形)을 그리기는 어려우나 하늘이 있음을 알고 땅의 용(容)을 말하기는 쉽지 않으나 누구도 땅이 있음을 부정치 않는다. 철 따라 바뀌는 산은 그래도 산이요 시시로 변하는 물은 그래도 물인 것을... 언제까지고 그 자리에 있고자 하나 시간이 이를 허락하지 아니하고, 머물고자 하는 욕심이 깊을수록 주변의 것들은 쉽게 떠나버린다. 속절없이 스러지는 구름과 같은 것이라 하기엔 왠지 허전하고 사술에 걸려든 건 아닌가 하는 기분에 찜찜하기도 하다. 그렇다고 홀홀이 사라진 다음에도 무언가 남아있을 것이라 믿자니 어쩐지 터무니없는 것 같기도 하고 억지 떼를 쓰는 것 같아 씁쓸하기도 하다. 세월은 벌써 두 달이 지났다. 사람은 변하지 않았건만, 시퍼렇게 커가던 금수산 줄기가 누렇게 시들어지고 있었다. 어쨌거나, 이제나 저제나 앞으로 흐르는 개울물소리만이 한결 같았다. 2. 한국이 삽자루를 겨드랑이에 박은 채 눈을 껌벅거렸다. 아침나절까지만 해도 창창하던 날씨가 점심참이 되자 어둑어둑해졌다. 간간히 흐르던 구름줄기가 서천에서부터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하더니 삽시에 왼 하늘이 구름바다를 이루었다. 느적느적 흐르던 구름덩이를 마지막으로, 하늘은 빼꼼한 틈도 없었다. 쥐어짜면 당장이라도 좌르르 하고 물방울이 튀일 것 같은, 물기 칙칙한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한국이, 이번엔 삽자루를 내동댕이 치더니 아예 퍼질러 앉는 게 아닌가. 후줄근히 땀에 전 와이셔츠가 바람에 펄럭했다. 거무칙칙하니 걸려있는 구름쪼가리나 별반 다를 것도 없이, 꾀죄죄한 차림으로 앉아있는 그 꼬락서니란 영락없는 양아치 신세였는데, 그 흔한 깡통하나 옆에 없다는 것이 실로 애석할 따름이었으니. 한국이 또 한번 눈을 꿈벅했다. 휴우, 하고 긴 한숨을 토한다. 바람이 스적 스치우자 하수를 따라 내리던 악취가 콧구멍을 들쑤셨다. 손을 휘휘 내저었지만 쉬파리 몇 놈 말고는 꿈적도 안 했다. 삽자루를 꼬나 쥐더니 바람 부는 쪽으로 넉가래질을 해댔다. 손바람으로도 어쩌지 못했던 악취가 야실한 삽날에 날려갈 일이 아니었다. 그렇거나 말거나, 미욱하게도 한국의 넉가래질은 여전했다. 그 바람에 한쪽으로 몰려있던 꿀꿀이 놈들만 푸닥거릴쳤다. 한참을 쉬던 한국이 일어났고, 그 옆의 우리로 건너갔다. 복수할 때는 요때다 생각했던지 예닐곱 마리 돼지들이 우루루 몰려들었다. 한국이 보고만 있을 리 없었다. 하루이틀 겪어본 생떼도 아니었다. 벌써 두 달. 어림잡아서 두 달 며칠째를,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이런 식으로 보내왔던 것이다. 앞서오는 놈의 주둥이를 장화발로 걷어차자 선전포고도 없이 얻어맞은 놈은 고래고래 악을 쓰며 옆으로 튀었다. 몰려오는 놈들의 기세가 꺾일 줄 몰랐다. 처음 한동안은 우루르 도망가기에 바쁘던 놈들까지도 어쩐 일인지 날이 갈수록 겁이 없어졌다. 하지만 이젠 놈들이 떼거리로 몰려온데도 외눈 하나 꿈적 안할 한국이었다. 그사이 요령이 붙었고 수완이 늘었다. 장화발로 걷어차고 삽자루로 내몰고, 어느만큼 수선을 피운 다음에야 겨우겨우 자리가 났다. 돼지들의 틈바구니에서 돼지똥을 치우고 있는 한국이 고개를 길게 늘여 저쪽을 본다. 아직도 치워야 할 우리가 세 개나 남았다. 다 치운 아홉 개의 우리도 물청소를 해줘야 한다. 허리가 뻑적지근했다. 후우, 하고 심드렁하게 한숨을 내뿜은 한국이 냅다 발길질을 했다. 3. 얼결에 걷어채인 꿀꿀이 한놈이 멱 따는 소리를 질러대며 저쪽 구석퉁이로 후닥닥 튀었다. 눈두덩이 우멍하게 패이고 주둥이가 별나게 튀어나온 놈은, 한국의 옆에 얼쩡거리고 있었다는 죄 하나만으로 봉변을 당한 셈이었다. 그리고 또 그놈은 돼지로 태어났다는 단순한 이유로 도살장으로 끌려갈 것이다. 인간들의 창자 속에서, 절이절인 살점으로 꿈틀대면서 그래도 놈은 꿈을 꿀 텐가. 죽었다가는 나도, 너 같은 인간으로 태어나 어쩌면 니눔과 니눔의 자식들을 계하에 꿇리고선 쩌렁쩌렁 호령 한마디 할 것이라고. 하지만 이눔아 니눔은 죽으믄 똥인겨. 똥! 그나마 니눔의 살점이 남아 있을 때야 인간의 창사구 속이구 나오믄 똥인겨. 알것냐. 또옹... 한국이 저만치 달아난 돼지를 훌쳐봤다. 놈은 언제 얻어맞았냐 싶게 저(猪)들 틈에 끼어선 꿀꿀거리고 있었다. 그래도 조금은 미안했던지 한국이 실없이 씨익 웃었다. 똥찌꺼기 묻은 손으로 콧등을 문질렀다. 미물이니 축물이니 해가며 사람들은 하나같이 돼지를 욕하지만 그건 터무니없는 중상모략이었다. 한국이 알기로는 돼지란 놈들만큼 똑똑하고 청결한 짐승도 없었다. 쇠똥이 묻은 소는 많이 보여도 돼지똥이 묻은 돼지는 구경하기 힘들다. 아무렇게나 싸제키고 밟아대는 것 같지만 잠자리를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것이다. 좀 멍청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다 손때가 묻으면 강아지 뺨 칠 정도로 애완용으로 길들여질 것이다. 지금 이놈들만 해도 그랬다. 녀석들은 어느새 한국의 속알머리까지도 파악하고 있는 듯했다. 처음엔 겁없이 몰려들다가도 한국이 불끈하고 화딱지가 치민 기색이 보였다 하면 슬금슬금 다들 제자리를 지켰다. 마지막 돼지우리를 빠져나온 한국이 장화를 탁탁 털었다. 하늘을 올려다봤다. 빗방울이 한두 방울씩 후둑거렸다. 곳간에다 삽을 내동댕이치듯 버린 한국이 세이정(洗已亭) 쪽으로 뛰었다. 가늠하기로는, 세이정의 '이已'자는 원래 '기己'자였을 것이로되 이곳의 주인이 바뀌고부터 그렇게 불리웠으리라. 주인은 이곳을 지날 때면 수행원에게 훈시하기를 잊지 않았다. '세(洗)'라고 하는 글자는 그 뜻이 너무도 심오하고 막측하여 쓰임 또한 다양하다고는 하나, 세심(洗心)이거나 세수(洗手)이거나 또는 세검(洗劍)이거나 간에 요는 무엇을 씻는다는 말이 아니겠소. 씻는다는 게 뭐요. 더러워졌다는 말이겠지. 씻고 안 씻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보다는 더러워지지 않겠다는 자세가 더욱 중요하다고 보오. 이곳에 오기 전에, 이미 진작에 표백되어진 사람. 난 말이오. 그런 사람을 존경하오. 돈을 보고도 흑심이 없는 사람. 그런 사람 말이오. 세이정 이 얼마나 좋은 말이오. 그럴 때마다 곁에 있던 수행원은 땅을 보거나 고개를 돌린 채 비웃곤 했다. 4. 억수로 퍼붓는 빗줄기로 보아 쉽사리 물러날 조짐이 아니었다. 세이정으로 다가간 한국이 부랴부랴 수도꼭지에 고무호스를 박는다. 물마가 터지기 전에 끝마쳐야 할 돼지우리 청소였다. 사나운 강아지 병아리 내몰 듯 지청구부터 늘어놓기 시작하는 관리실 송 주사도 송 주사려니와, 어차피 해야 할 일이었다. 손 좀 빌리자고 나설 만한 데도 없었다. 심심찮게 찾아와선 입심으로라도 거들어주던 수다쟁이 황 영감마저 사흘 전부턴 무슨 일인지 그림자도 비치지 않았다. 한국이 수도꼭지에 연결된 고무호스를 늘이고 있을 때,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관리실 쪽에서였다. 황 영감은 아닐까 하여 귀가 번쩍했지만 이내 눈을 내리 깔고 하던 일에 열중했다. 쿨렁쿨렁하는 잔기침을 앞세우긴 했지만 저렇게 경망스러이 호들갑을 떨진 않았다. 그렇다면, 혹시....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졌다. 황 영감이 아니라면 벌건 대낮에 원내를 활보할 만한 인물이야 그놈 말고 더 있겠는가. 더구나 시간으로 보아 다들 양계장이 아니면 채전에 나가 있을 것이다. 십중팔구 뱀대가리 송 주사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캄캄한 하늘이 더욱 캄캄해졌다. 무신 속이 쓰리길래 또 오는겨? 화풀이할 데가 그리두 ㅇ남? 오재미 돌리듯 맨날 나만 볶아치게... 저 인간 뵈기 싫어 고만 퇴직해야 할가벼.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소리가 쟁쟁했으나 한국은 못들은 척 그저 고무호스를 늘여갔다. "야아! 임마. 등걸...!" 한국은 이곳으로 와서 '전한국'이라는 이름 대신 '등걸'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통나무 등걸같이 미련스럽고 우직하다는 뜻이었다. 밑동 잘리고 우죽 꺽여진 신세였으니 보는 놈마다 놀림감이요 만나는 놈마다 장난질이었다. "히이... 오살할 눔..." 뱀대가리 관리실 놈이라 생각했는데 지척으로 다가온 녀석은 다행히 운짱으로 있는 따개눈이었다. 복지원에는 차가 두 대 있었다. 한 대는 봉고차였는데 주로 사람을 실어날랐고, 또 한 대는 타이탄 트럭이었다. 적재량이 1.5톤 정도로, 이곳 복지원에서 생산되는 계란이나 생돈, 또는 그밖에 다른 잡다한 생필품이나 사료 등을 운반했다. 작업량이 많다 보니 그 역시 전한국이 만큼이나 바쁜 사람중에 한사람이었다. 곱사등이 등짝만한 오르막을 오르는 데도 폐병 걸린 늙은이 종아리 긁는 식으로 길길거리는, 구닥다리 폐차에 올라 앉아보면, 짐을 싣기도 전에 속부터 확 뒤집히는 따개눈이었다. 5. 운전수를 한 사람 더 고용하던지 차량을 한 대 더 증차하던지 해야 된다고 기회 있을 때마다 성심성의껏 간청해마지 않는 따개눈이었으나, 가장 적게 쓰는 것이 가장 많이 투자하는 것이라는, 그 말 같지도 않은 소리로 번번히 묵살해버리고 마는 관리실장 변상열이었다. 사무직으로 있는 송가 놈이라도 좀 거들면 낫겠는데, 윗전들의 말이라면 양주현감 죽은 말 지키듯, 고지식하기 이를데없는 작자의 됨됨이로 보아 가당치도 않을 일이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붙어있긴 했으되 개인택시 장만할 돈만 준비되면 미련없이 떠나리라고 벼르고 있는 중이었다. "야, 임마! 불르먼 대답이라도 해야 할 거 아녀. 이젠 귀까정 먹초가 돼부렀냐." "바쁜겨. 쉽게 물러날 빗발이 아니구먼." 헐떡거리는 숨소리가 어지간히 급했던 모양이나 한국으로선 돼지우리 청소가 코 앞이었다. 시멘트바닥이어서 청소하기가 용이하긴 했지만 물로 불리고 싸리비로 쓸고 다시 물로 부셔내고 하자면 코가 석 자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운전대나 잡고 있어야 할 놈이 예까지 찾아온 게 좀 수상쩍긴 했지만 이것 저것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바람 일기가 무섭게 콩 튀듯 튀기 시작하는 빗방울이었다. 날벼락은 맞아도 소낙비는 피해가랬거늘, 잘못 어정거렸다간 꼼짝없이 쫄딱 젖어야 할 판 아닌가. "돼지똥 치울라다 된똥 걸르지 말구. 가자, 어여. 호출이여." "호출...?" "그렴 마. 관리실에서 오란뎌." "왜에?" "근데 시방 이게...말끝마다 토나 달고. 치워! 빨리. 실장이 부른뎌." "뭣여. 실장이?" 한국이 들고있던 고무호스를 냅다 던졌다. 관리실장이라면 이곳에 들어올 때 딱 한번 대면한 적이 있었을 뿐, 두 달이 넘도록 얼굴 한번 보기 힘들 정도로 바쁘고 높은 데 계신 분아닌가. 그런 귀하신 분께서 돼지똥 냄새나 풀풀 풍기는 이런 비천한 상것을 만나겠다니. 뭉기적거릴 일이 아니었다. 한국이 따개눈을 따라 나서자 지켜보고 있던 꿀꿀이 놈들이 '개선될 기미가 전혀 없어보이는 주거환경문제에 관하여' 일시에 성토하고 나섰다. 주동자인 듯한 놈이 우루루 내닫자 곁에 있던 다른 놈들이 덩달아 내달았고, 한쪽 우리가 어수선해지자 주위의 다른 우리 역시 삽시에 소란스러워졌다. 관리실 쪽으로 향하던 한국이 뒤를 돌아본다. 이리 내닫고 저리 치닫는 돼지들과, 그 돼지들이 갇혀 있는 돼지울이 보인다. 한 뼘쯤의 거리나 될까. 그러나 지금은 까마득히 멀어져 있었고, 그 사이를 가뭇한 빗발이 촘촘히 들어서고 있었다. 한국과 따개눈이 관리실에 도착하고 보니 송 주사가 미리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6. 그들이 들어간 곳은 두 칸 정도되는 사무실이었다. 철제 책상과 의자가 방형으로 놓여져 있었고, 입구 맞은편 쪽으론 누렇게 바랜 '관리지침'과 '3대 경영화 방안'이 액자 속에 갇혀 있었다. 그 밑에서 거무티티한 중년 사내가 전화를 받고 있는 중이었다. "아, 예예. 탁월하십니다. 경영학을 전공한 저로서도 거기까진...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분부대로라면 시행상에 문제는 전혀 없을 것 같습니다." 양손으로 수화기를 감아쥔 채, 그는 연신 전화통에다 대고 허리를 조아렸다. "원생 충원 건은 분부대로 따르면 되겠습니다만. 뒷산 등기이전 건이...예에...지도과장한테 보고는 받았습니다. 별도의 복안이라시면..." 한국과 따개눈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나서야 짐짓 위엄을 부려보느라고 어깨를 추석이고 있었으나 극존칭으로 이어지는 목소리는 측은하리만치 기어들어가 있었다. 가물가물 이어지던 목소리가 화작거리는 빗소리에 감겨지더니, 끝내 어항 속에 갇힌 붕어입처럼 입술만 나불댔다. 한국이 초조한 눈빛으로 돼지우리 쪽을 쳐다본다. 뿌옇게 쏟아지는 빗발과, 그 빗발이 몰고오는 칠흑 같은 어둠이 온 산야를 덮치고 있었다.어둠 끝으로 불티처럼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돼지우리가 아니라 검은색 윤기가 반질거리는 승용차 안이었다. "그래두 자신있겠나." "멕여주구 재워만 준다믄...유." "사람하군. 어느 분은 말씀하시기를 얻어 먹을 능력만 있어도 복이라고 했네. 자신이 자기 자신을 도울 수 있다는 건 복이겠지. 하지만 더 큰 복은 이웃을 도울 때 얻어지는 것이네. 원생으로서가 아니라 보호자, 다시 말해서 보조원으로 취직하는 것이네. 가보면 알겠지만 원생들이란 하나같이 늙고 병들고, 어디 한군데가 모자라는 사람들뿐이야. 복지원이란 곳이 원래 그런 곳이거든. 열심히 해보게. 자신도 돕고 이웃도 도울 수 있는 곳이 그곳이거든. 에 또... 명심할 게...자네 소탐대실이란 말 들어봤나. 선서도 하고 교육도 다시 받겠지만 한 마리의 양보다는 먼저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염두에 두라는 것이지. 복지원 전체의 이익을 항상 먼저 유념하도록. 그것이 곧 원생들 개개의 이익에도 부합될 것이고." "글쎄유. 그런 곳은 첨이라놔서...히." "허이, 사람하군. 허구보니 말이 많았군. 어쨌건 성실히 열심히 해보게. 철저한 실적 위주인 만큼봉급도 올라갈 것이고." 봉급이란 말이 새로웠다. 봉급. 그랬다. 어쩌면 그것은 그가 평생을 두고 꿈꾸어온 갈망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작에 포기했던 희망이었다. 하다못해 어디 역부로라도 나앉으면 품에 얼마짜리 일공이야 못 건지랴만, 등잔같이 살아있는 아비가 있고, 뼈를 받은 전토가 있지 않은가. 7.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 이루어지다니. 가슴 설레이는 환희임에 작히나 좋으랴만, 아서라. 아니 될 말이다. 사람에겐 나름대로 가야 할 길이 있고 세워야 할 뜻이 있는 것이다. 자신은 죽었다 깨어나도 농사꾼일 뿐이며, 농부는 굶어죽어도 씨갑씨는 베고 죽는다고, 자신은 누르실에 남아있는 유일한 농사꾼 종자인 것이다. 제 살던 곳이 싫다고 튀어달아나는 콩깍지를 보라. 당장에야 멀리 달아난 듯싶고, 다른 인연으로 만나 개벽한 하늘을 볼 것도 같지만 이듬해 봄이면 실핏줄하나 다르지 않고 똑같은 떡잎이요 새순이 아니더냐. 어디 천리라 해서 멀어질 것이며 만리라 해서 달라질 것인가. 돈 때문에 당신에게 목을 매며 사정한 것은 아니다. 봉급이야 준다면 받기는 하겠지만 딱 30만 원. 그래, 고년한테 고스란히 털린 30만 원만 채워 놓으면 된다. 상국의 집을 나올 때는 시간을 벌자는 욕심이었다. 무진년 도지기 절구방아 찧듯 별 소득도 없이 설설 돌아다니기만 하는 상국을 대하기 민망스러웠고, 병자년 까마귀 곳집(상여집) 기웃거리듯 얕잡아보는 상국의 아내 보기도 역겨웠다. 수중에 돈이 있는데 설마하니 갈 곳이 없겠냐는 배짱이었다. 주연실 양을 찾기만 하면 그때는 미련없이 이 도시를 떠나리라는 각오였다. 거기에 더하여 막연한 기대감도 있었다. 그 기대감이란 다름아닌,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그리고 만나기만 하면 색시감으로 맞이할 수 있으리라는, 그런 옹골차고 다부진 기대였는데...그런데, 이제는 그게 아니었다. 그저 쉬고 싶었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가 않았다. 당분간만이라도 피해 있고 싶었다. 상국을 만날까봐 겁이 났다. 주연실에게는 못할 죄를 지은 것만 같았다. 금방이라도 뒤에서 누가 붙잡을 것만 같았고 부도덕하고 파렴치한 놈이라고 손가락질할 것 같아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히이..." 한국의 귓전으로 무슨 말인가 들리는 듯했지만, 채에 얻어맞은 모기소리마냥 멀어지고 있었다. 폭신한 시트에 파묻힌 한국이 자꾸 하품을 해댔다. 졸렸다. 새벽참에 잠깐 눈을 붙인 것 말고는 내내 뜬눈으로 새웠다. 착 짜부러진 뱃속이 헛헛했다. 따지고 보면 상국의 집을 나온 이후 이제껏 쫄쫄 굶지 않았는가. 연중에, 허기만 지고 갈증만 솟는, 그놈의 풀풀 쉬어터진 수꾸무신기 한 사발에 눈알이 뒤집혀, 녹수 갈 제 원앙 가듯 구름 갈 제 비 내리듯, 한밤을 고스란히 시달리고 났으니 피곤할 것도 당연했다. 아린 몸, 저린 뼈마디가 해초처럼 흐믈거렸다. 8. 복지원이란 데까지만이라도 참아보자고 눈을 부비고 허벅지를 꼬집어댔지만 말짱 허사였다. 봄볕에 아른아른 피어오르는 담배연기 같은 의식이 가위눌림당하고 있었다. 노곤한 몸은 끝모를 나락 저 밑으로 밑으로 자꾸만 떨어져 내렸다. 한국이 눈을 떳을 때는 아주 낯설고 이상스런 데 와 있었다. 거대한 철대문이 나한처럼 버티고 있고, 그 주위로는 길고도 견고한 시멘트블록이 성을 쌓고 있었다. 대낮인데도 전체적인 분위기는 착 가라앉아 있었으며 거무칙칙했다. 띄엄띄엄 널려있는 건물들의 벽이 허옇긴 했는데 도색한 지가 오래되서 그런지 우중충한 빛깔이, 귀기스러울 정도였다. 사람이 살고 있음직한 흔적은 여기저기 배여 있었으나 실제 눈에 띄는 사람은 볼 수가 없었다. 음침하고 황량하고, 해면의 밑바닥 같은 적막함만이 덕지덕지 쌓여 있어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절로 어깨를 움츠러들게 했다. 모든 것이 기밀이었고, 이것은 직원이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의무조항이기도 했다. 한국이 원장 앞에서 선서한 첫번째가 '본원에서 지득한 어떠한 비밀도 누설하지 아니 할 것이며, 신성한 보호자의 주의를 게을리하지 않는다'였다. 이곳에서 일어나는 어떠한 사항도 보안의 대상이었으며 어느 것 하나 비밀스럽지 않은 게 없었다. 그것은 곧 침묵과 무관심을 강요했다. 그리고 이것은 버릇처럼 굳어져서 그렇지 못한 게 오히려 어색할 지경이었다. 원생들은 누구라 할 것 없이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으며, 곁에 있던 사람이 장파열로 나뒹군다 해도 외눈하나 꿈쩍않고 후비던 콧구멍을 마저 후빌 위인들이었다. 남들보다 덜 떨어지고 우둔하고, 천 원짜리 지전으로 껌 한 통을 사는데도 두 손이 다 필요한 한국이긴 했지만, 이곳에 들어온 지 두 달 남짓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알고 있는 것은 수입종 육돈과 그놈들이 싸제키는 오물청소뿐이었다. 물론 이 사무실도 일면식이 있긴했으나 생소하긴 마찬가지였다. 한국이 실내를 휘둘러본다. 칸막이가 보였다. 원장실이었다. 들어오자 마자 허기지고 졸리운 눈으로 무슨 선서인가를 했었지. 비밀이 어쩌구 하면서...쏟아붓는 빗줄기 소리가 청량해서일까. 돌이켜보는 감회가 새로웠다. "앉지. 앉아요. 미우니 고우니 해도 한집식구 아닌가. 편히들 앉아서 얘기하자구." 변상열이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티테이블로 갔다. 공손하기 이를 데 없는 태도였다. 앞서 있던 따개눈이 흠칫 뒤로 물러선다. 마부와 청소부를 손님 모시듯 하는 저의가 까마득했던 것이다. "하안, 냥반들하군...그래 나까지 이렇게 세워놔야 편하겠소. 이러지들 말고 자자 앉읍시다. 격의없이." 변상열이 돼지똥 묻은 손을 덥썩 잡으며 흔쾌히 다독거리기까지 하는 게 아닌가. 9. 한국으로서야 관리실장이라는 사람하고는 처음 대하는 자리이고 보니 그런가보다 했지만 곁에 서 있는 따개눈은 그게 아니었다. 반말도 과분해서 걸핏하면 욕지거리하기를 노린재 방귀 뀌듯 하는 놈이 어쩌자고 오늘따라 퇴기 이방 모시듯 하는가. 아무래도 수상쩍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고 말목처럼 서 있을 수도 없는 일. 하자는 대로 따라 앉긴 했지만 가시방석이었다. "일 잘하고 성실하고 붙임성있다고 소문이 자자합디다. 이렇게 뵙고보니 참으로 든든하군요. 내 진작에 따로 불러다 인사라도 했어야 하는 건데 보시다시피 제가 이렇게 삽니다. 좌우지간 감사하달밖에요." 변상열이 한국에게 허리를 굽신해보였다. 한국이 히,하고 웃었다. "자네두 요새 차량관리에 골몰하다구 얘긴 들었네. 조금만 참아주게. 내년엔 내 과부 대동빚을 내서라두 개차를 주선할 것이니. 시 당국하고 얘기가 어지간히 됐으니 소식이 있을 거야. 연말까지만 버텨보게. 예산에 반영 안 되면 편법으로라도 집행할 계획이니." "그렇게만 해주신다면야..." 따개눈이 허리를 조아리려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한번 속지 두번 속을 일이 아닌 것이다. 지난해도 그랬고 저 지난해도 그랬었다. 속아달라면 속아주겠지만 이 자리가 어떤 자린가. 가복 다루듯 호령하고 떡 주무르듯 닥달하던 일개 운전수와 돼지똥치기를 친전에 불러올리는 것부터가 꺼림칙하더니, 무엇이 모자라 입에 발린 소리로 사람을 홀린다냐. 토사곽란에 새우젓 먹을 일도 아니고 보면 그저 굿이나 보고 새전이나 챙기는 게 상수인 것이다. "허고, 원장님과 상의 중이네만 자네 승급도 말해놨네. 뭐니 뭐니 해도 직원들의 후생복지가 최우선 아닌가. 경영학을 전공한 이사람이 늘 주장하는 바도 바로 이걸세. 내가 어찌나 집요했던지 이젠 원장님도 수긍하는 눈치야. 당연하지 개선됐어도 벌써 개선됐을 일이야. 장기적 안목으로 볼 때, 기계적 능률주의보다는 휴메니즘, 다시 말해서 인간적이고 자율적인 관리경영이 생산성확대에 훨씬 크게 이바지 하거던. 경영학 전문용어로 거시적 합리주의라고 하네만, 암튼 내년부턴 뭐가 틀려져도 틀려질 거야." 한국이 또 히,하고 웃었다. 초가을로 접어든 날씨는 썰렁했다. 비가 와서 그런지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그 어떤 빛으로부터도 차폐당한 실내는, 마주한 사람의 얼굴생김이나 겨우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어두워 있었다. 변상열이 따개눈을 쳐다본다. 따개눈이, 마지못한 듯 고개를 끄덕여보인다. 갑자기 밖이 어수선해진다. 숙사(宿舍) 쪽이었다. 10. 바람인가. 짐승소리가 울린다. 빗발인가. 발자국소리가 어지럽다. 날비를 고스란히 맞았나보다. 히유... 씨부럴 눔의 날... 옘병헐 눔. 어깨죽지까지 깊숙이 파묻힌 채 소파에 앉아있는 변상열이, 한국의 눈엔 치우다 만 돼지우리의 꿀꿀이로 보였고, 따개눈엔 길길거리는 타이탄트럭으로 보였다. "이렇게 두 사람을 부른 건 긴한 부탁이 있어서이네. 복지원 전체의 사활이 걸린... 아주 중요하고도 심각한 일일세. 자세한 설명은 따로 하겠지만, 어쨌든 자네들이 발탁된 걸 글쎄... 축하해야 될지 격려해야 될지... 분명한 건 결코 손해는 아니라는 말이네. 따개눈이 흠칫했고, 한국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 정도로 중요한 일을 왜...?" 따개눈이 입을 열 듯하더니 닫았다. "왜, 나를 시키느냐?" "그런 뜻이 아니라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사람을 잘못 뽑은 것 같아서요." "건 또 무슨?" "복지원 전체의 사활이 걸려있을 정도의 일이라면... 관리실 내근자들두 있구 지도과에 지도원들두 있는데. 저나 이 친구야..." "이거봐, 이 사람아. 자넨 그게 그래서 탈이야. 토부터 달지좀 말라구. 문제두 안 읽어보구 어렵다구 하면 어쩌나. 자넨 그저 운전이나 잘함 돼. 알어?" "..." "뭔 일이든 순서가 있고 요령이 있는 게야. 자네도 알다시피 이래 나가다간 몇 년 안가 우리 복지원은 문닫아야 돼. 문!" "예에...? 문을 닫다니유. 시방 돼지들이 울매나 실헌디." "좋아요 좋아. 현대 경영에 있어서 그런 진취적이고 발전적인 사고가 무엇보다 필요한 거야. 여기 들어온 건 자네가 먼저일지 모르지만 아직까지 멀었어. 이 사람 똥끝에도 못 따라가. 긴 소리 해봐야 그렇고. 암튼 결원된 원생 충원계획이 잡혔네. 극비사항이니만큼 보안에 각별 유념하도록...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도 모르게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고, 또오...만에 하나 실수하는 날엔, 자네나 나나 우리 전 복지원은 그걸로 끝이야. 그렇다고, 서울이 무섭다 무섭다 하니까 새제부터 기더라고 지레 겁 먹을 건 없겠지. 송 주사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별 탈 없을 거야." 그러면서 그는 이제껏 시종처럼 묵묵히 서 있던 송에게 손짓을 보냈다. 송이 합석을 했고, 노트를 뒤적이더니 갈피에서 흰봉투 두 개를 조심스럽게 꺼내는 게 아닌가. 11. 변상열이 송에게서 건네받은 두 개의 봉투를 만지작거리며 먼저 한국을 쳐다봤다. "반복하지만 그 사이 정말 고생 많았네. 얼마 안 되지만 받아 두게. 그 사이 밀린 봉급이라 생각하고 요긴하게 쓰게." 봉투 속에는 한국의 이름으로 등록된 저금통장과 도장이 들어있었다. 입금된 금액이 50만 원이나 되었다. 한국이 얼떨떨해 했다. "이걸..." 영문도 모르는 한국이 머뭇거리자 변상열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한다. "자네 몫이네. 노력의 대가야. 정당한 보상은 신성한 것이네. 허고, 쓰다가 모자라면 언제고 이 사람 송 주사한테 얘길하게." 그러면서 그는 또 따개눈을 쳐다봤다. 두툼한 봉투가 따개눈 앞으로 건너갔다. 현금인 듯했고, 꽤 많아 보였다. "자, 이건 자네 몫이고. 앞으로 일을 추진하자면 비용이 들거야. 보너스라 생각하게. 저번겉이 한입에 톡 털어넣지 말고. 그럼...송 주사! 설명을 해주게 주의사항 겸해서." 곧이어 송의 장황하고도 지루한 '원생 충원방안에 대한 세부계획'이란 것이 조목조목 열거되어졌고, 말끝머리에 가서는 언제나 '각별히 유념하라'든지 '절대비밀'이란 말이 누누히 강조되었다. 우의와 우산을 준비한 그들이 복지원을 떠난 건 그로부터 서너 시간이 지난 다음이었다. 작달비로 쏟아지는 이른 가을 초저녁. 질척질척한 비포장도로를 급류에 종이배 떠가듯,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고 하면서 힘겹게 내달리는 승합차가 있었다. 따개눈이 몰고가는 12인승 봉고차였다. 한국과 관리실 송이 타고 있었다.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을 정도의 어둠이 계곡과 도로와, 그 계곡과 도로가 음부처럼 벌려놓은 야지 위로 빗줄기보다 더 극성스럽게 쏟아지고 있었다. 한국은 잔뜩 겁을 집어먹은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는데 어디가 어딘지 도저히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생소했다. 그런 한국과는 달리 곁에 앉아있는 송은 태평스럽게 졸고 있었다. 코까지 딩딩 골고 자는 송을 쳐다보면서 한국은, 왼쪽 가슴을 더듬어본다. 방탄조끼의 면포처럼 빠닥빠닥한 물체가 만져진다. 저금통장이었다. 이만하면 되돌아가도 넉넉할 돈이었다. 그런데도 어쩐지 모자라는 것 같고 가슴 한구석이 텅 빈 듯한 기분이었다. 12. 비 때문일까. 물길을 따라 자욱이 피어오르는 물안개. 스적스적 바람이 스치울 때마다 갯버들과 왕대와 그리고 무더기로 피어있는 억새꽃을, 감싸안았다 풀었다 하면서 속앓이를 하고 있다. 봄내 여름내 같이 지내온 저들과의 헤어짐이 안타까워서일까. 꽃은 피면서 지고 사람은 만나면서 헤어짐을 기약한다고. 너무나 진부한 말임에도 들을 때마다 가슴은 쌉쌀해진다. 감아돌 듯 풀어놓는 물안개 사이로 얼핏얼핏 내비치는 갯버들의 앙상한 가지와 왕대와, 그리고 엎어질 듯 휘청이는 억새의 줄기가, 죄 많은 수인의 갈비뼈 같다. 그 너머 묵정밭 한 뙈기. 풀지도 않은 메밀꽃이 후줄그레 젖어있다. 한국이 눈을 비벼본다. 비료부대로 우의를 접어 쓴 노인이 물꼬를 트고 있다. 삽질하기도 힘에 겨운지 노인의 몸이 버들처럼 휘청거린다. 앙상한 뼈마디가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만 같다. 한국이 콧등을 문지른다. 죄만스럽구먼유 아부지... 일이 꼬일라니... 다 이눔이 들 떨어진 탓이구먼유. 연실 씨 뵐 낯이 설 때까지는 여그서 쪼매 더 묵어야 할 거 같구먼유. 빗발을 털어내듯 한국이 눈을 감아본다. 딱 한 번인가 만난 그녀, 주연실이란 여자의 얼굴을 그려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되지 않았다. 석배의 소개로 만나본 그날 이후로 한시도 잊은 적이 없는 그녀였지만, 그래서 마음 속에는 느티목처럼 든든히 뿌리박고 있는 그녀이기도 했지만, 막상 얼굴을 떠올리려니 막막하기만 했다. 입 안에서 뱅뱅 도는 그녀의 이름과는 달리 잡힐 듯 잡힐 듯하면서도 막상 그려볼려고 하면 물안개처럼 뿌옇게 흐려지고 말았다. 한국이 그렇게 눈을 감고 얼마쯤을 갔을까 누가 흔들어 깨운다. 뿌연 빗발 사이로 빠르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보인다. 우산들을 받쳐들었고, 널찍한 광장 앞이다. 희끄무레한 시야가 좁기는 했지만 전등 내걸린 데가 없는 걸로보아 야밤은 아닌가보다. 실뱀처럼 꼬무락거리던 인파의 행렬이 집찰구를 빠져나오자 담배연기처럼 흩어진다. 장거리 손님을 받으려는 택시운전수들이, 호외를 알리는 신문팔이처럼 행선지를 외친다. 저 혼자 떨어진 어린 놈이 악을 쓰며 울고 있건만 지나가는 행인 누구하나 왜냐고 물어보는 이 없다. 그저 스치고 지나갈 뿐 곁눈질이란 찾아볼 수도 없다. 오직 목적하는 곳은 단선으로 된 먼 곳일 뿐으로, 누구랄 것도 없이, 그들은 방금 검표원으로부터 바통을 이어받은 100미터 선수들인 것이다. 주변의 모든 공간은, 굳지고 견고한 엄숙함으로 얼어붙어 있고 그것을 깰 재간은 누구에게도 없다. 사람들마다에 얼어붙어 있는 냉엄과 냉담은 너무도 한결같아서 따뜻하다거나 포근하다는 말이 오히려 어색할 지경인 것이다. 13. 일례로 광장에 대기하고 있던 포도주 색깔이 나는 승용차가 있었는데 누군가를 기다리던 운전수가 그냥 돌아가기가 뭣하던지 곁에서 떨고 있던, 폐경기도 훨씬 지난 듯이 보이는, 초로의 부인에게 같은 방향이면 타라고 하자 그 부인은 오히려 놀란 토끼 벼락바위 쳐다보듯 눈알을 멀뚱거리더니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도망가는 게 아닌가. 머쓱해진 운전수는 입맛만 쩝쩝 다시더니 저 역시 부리나케 시내 쪽으로 내빼는 거였다. 어지럽게 흩어지는 인파와, 간간이 들리는 택시운전수들의 호객소리. 비에 젖은 벽보판의 포스터가 바람에 펄럭이고, 푸줏간 앞을 얼쩡거리던 개가 뼉다귀를 물고는 도로를 질주한다. 기차의 경적이 울리고 빗물에 불어튼 그 경적소리는 아주 멀리까지 오래도록 이어지고 있었다. 한국이 바라보는 광장은, 음산하고 칙칙하고 어수선했다. 언제였던가 꼭 한번은 본 듯도 한 곳인데 생판 낯설기만하다니. "야야! 염하다 놓친 놈마냥...뭐하냐! 빨리 끝내고 가야할 거 아념마. 따개 넌 시동걸구 지키구 있어. 여차직하면 튀어야 한게." 한국이 끌리듯 차에서 내려왔다. 휘몰아치는 빗줄기가 갈수록 거세지기만 했다. 우의를 입긴 했는데도 밖으로 나오자 한속이 들었다. 송이 앞섰다. 그의 뒤를 따르는 한국이 두리번거린다. 가슴이 떨리고 다리가 뻣뻣해진다. 오기 전에 다짐받던 송의 말이 윙윙거린다. 설사 붙잡힌다 해도 무조건 벙어리 흉내만 내는거다. 그냥 어버버하란 말이다. 알었지! 니 여물통에서 한 마디만 잘못 튀어나왔다하면 니 신세 조지는 건 고사하고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 쇠고랑이여. 아냐. 멀건 등신처럼 그저 히이,하고 웃기만 하란 말이다. 뒷처리는 걱정 말고. 무슨 수를 써서든 빼내 올테니. 알었냐! 앞서던 송이 대합실로 들어선다. 시간표를 보는 척하며 실내를 쓰윽 둘러본다. 정복경찰은 없다. 사복경찰이 될 만한 사람도 없어보인다. 의젓하고 당당한 자세로 전보다 더 꼼꼼하게 의자 밑과 구석구석까지 살핀다. 누가 보면 그 자신이 사복경찰은 아닌가 하고 의심할 정도다. 천천히, 그러나 아주 당당하고 태연하게 걸음을 옮긴다. 화장실로 통하는 문 쪽을 향해서였다. "의자에라도 앉으시지 그러세요. 누굴...자제분이라도 기다리시는가 보죠?" 유리문과 벽이 교각으로 맞닿아 있는 구석퉁이에 누군가 쪼그려 앉아 있었다. 안노인이었는데 어찌나 몸을 웅숭그리고 있던지 마치 거미줄에 걸린 채로 버둥거리던 딱정벌레가 껍데기로 매달려 있는 것 같았다. 썰렁하게 놓여진 장의자를 보면서 송이 아주 친절하게 말을 걸었다. 노인이 멀겋게 그를 올려다봤다. 14. "두 시간째여... 애비가 마중을 나온다 혔구먼. 빗길에 찬찬히 와야 헐틴데 사고라도 남. 미눌애가 극성이여..." "아드님 집이 예서 먼가보죠? 이런 데서 두 시간씩이나 기다리게 하다니요." 송의 말이 더없이 부드러웠다. "웬걸. 이서 반 시간 짬인걸. 뭣이 그리 바쁜지...젊은 양반두 어딜 가우." 두어 마디를 건넸을 뿐인데도 노인은 쉽게 감동하는 눈치였다. "청소년 선도위원입니다. 여기 이 증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불량청소년들을 지도 훈육하는, 뭐랄까 이를테면 봉사요원입니다. 이런 덴 아주 못되먹은 것들이 많거든요. 잘 타이르고 교육시키는 게 제 임무입니다." 송이 자랑스럽게 비닐로 코팅된 증명서를 내밀어 보였다. 노인이 증명서에 박힌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어려운 일 맡았구먼. 요새 젊은애들 말이나 들어야 말이지. 장허시우." "뭘요. 정부에서 이렇게 자격까지 내주니 하지 안 그럼 그만둬도 벌써 그만뒀을 겁니다.아하! 이거 내 정신하군. 할머니, 이러고 계실 게 아니라 저기 저희들 차에 가서 좀 편히 쉬시죠. 아드님 오시면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 "안심하세요. 저희 지침 중에 노약자보호가 최우선입니다. 사실은 저기 있는 저 차도 정부에서 대준 것이거든요." 그러면서 그는 이제껏 남의집 불구경하듯 서 있던 한국을 향해 호통을 쳤다. 자못 위엄스럽고 점잖은 말투였다. "어이! 김 선생! 이분 모시잖고 뭘하고 있는 게야 어! 빨리 차 안으로 모셔드려! 내원 교육을 받은 사람이나 안 받은 사람이나 똑같애서야...할머니, 걱정 마시고 들어가 쉬세요. 아드님이나 가족분이 오시면 지체없이 연락드릴테니. 에이! 사람들하군." 처음엔 놀란 얼굴로 뒤로 주춤거리던 노인이, 송의 말투가 정중하고 태도 또한 의젓해서인지 이내 수그러들었다. 장정 두 사람 몫은 거뜬히 해치울 허우대 좋은 한국이었다. 망설이는 노인을 짐짝 들어올리 듯 안아서는 곁에 대기하고 있는 봉고차로 갔다. 자의 반 타의 반 끌려가는 노인의 표정이 애매했다. 하지만 싫다고 반항하거나 소리를 지르진 않았다. 노인이 봉고차에 오르는 걸 확인한 송이 손을 번쩍 올렸다. 곧이어 차는 어디론가 떠났고, 송의 발길은 시외버스터미널 쪽으로 향했다. 그들의 인간사냥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15. 대부분이 노인들이었다. 그렇다고 당장에 관을 싸짊어지고 갈 사람들은 피했다. 어느 정도 힘께나 쓰고 제 밥벌이는 할 만한 사람들만 골랐다. 벌써 사흘이 지났다. 소리소문없이 사라진 사람만해도 열 명이 넘었다. 그럼에도 이상한 일은, 파출소나 언론기관에 정식으로 접수된 숫자가 단 한 건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이런 사람을 찾습니다'라는 제하의 벽보나 전단에 뿌려지는 얼굴은 하나같이 미아들이거나 정신박약아들뿐으로 가출했다는 노인들은 없었다. 노인들에 관한 것이라면, 그저 '효도여행 떠난 70대 노부부, 제주도에서 음독자살하다' 또는 '아파트 거주 63세 노인 아사상태로 발견되다'는 등등의 일간지 사회면 기사가 고작이었다. 그 사이 한시도 그치지 않고 비가 쏟아졌다. 억척스런 빗줄기에 성한 곳이 없는 들판이었다. 풀썩풀썩 주저 앉은 논두렁은 윗빼미 아랫마지기 구분없이 합다리가 되어 있었고, 그나마 힘겹게 붙어있던 산전뙈기는 엉망으로 결딴나 있었다. 모가지만 내놓고 허우적거리던 벼이삭도 숨이 끊어졌는지 부표처럼 물살이 도는 대로 떠다니고 있었다. 때 아닌 늦장마에 세상은 온통 뒤숭숭하건만 그런 것엔 아예 아랑곳하지 않고 희희낙낙하는 곳이 있었으니, 바로 대양복지원이었다. 결원으로 남아있던 원생들의 빈 자리도 어느 정도 채워졌다. 악성전염병이 돌거나 집단탈출이라는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는 한 내년도 예산은 확보된 셈이었다. 오늘 활동으로 원생충원계획은 완결이니 끝까지 긴장들 풀지 말고 유종의 미를 거두어주기 바란다는 관리실장 변상열의 훈시를 듣고 나온 것이 오전 열한 시. 지금껏 해온 대로 저녁 무렵을 택하려 했으나 일부러 붐비는 점심시간을 골랐다. 그들이 출동한 곳은 기차역이었다. 첫날과는 달리 각자의 손엔 무선호출기가 들려져 있었다. 한국의 것도 있었으나 차에 두고 내렸다. 거추장스럽기도 했고, 아직 사용법이 서툴렀다. 행동요령은 언제나 같았다. 운전대에 앉은 따개눈이 구름을 잡고, 뱀대가리처럼 반들거리는 송이 바람을 잡는다. 송이 다 됐다는 신호를 보내면 황소 같은 한국이 사냥감을 차에 들어나른다. 일단 차에 태우기만 하면 그걸로 마무리 되는 셈이었다. 한국은 자신과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삶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 듯이 어떤 일이든 앞에 놓여있으면 무조건 해야 하는 것인 줄로만 알았다. 이번 일도 마찬가지였다. 당신이 지금 관여하고 있는 일이 죄가 된다고 사전에 알으켜주었다 해도, 그는 범죄가 무엇인지도 몰랐으므로 그보다 더한 죄악도 서슴치 않았을 것이다. 무지란, 저지르지 않아도 성립되는 가장 끔찍한 죄악이었으며, 만악의 단서요 시초이기도 했다. 16. 대합실은 언제나 만원이었다. 떠나는 사람이 있고 떠나보내는 사람이 있었다. 오는 사람이 있으면 맞이하는 사람이 있었고, 오늘을 저당잡힌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내일을 예약하러 오는 사람도 있었다. 바람 쐬러 나온 남자도 있을 것이고 일부러 바람 맞으러 나온 여자도 있을 터이다. 신문팔이도 있고 구두닦이도 있고 도덕과 학식이 높은 교수도 있겠고, 개중에는 소매치기도 있을 것이다. 어제 만났던 갑순이가 오늘은 귀부인으로 둔갑해 있을지도 모르고, 오늘 오신 회장님께서 내일은 떨거지로 나타날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디 그뿐이랴. 바람 부는 날엔 압구정동엘 가야 한다고 설치는 낭만주의자가 있는 반면 비오는 날엔 영등포엘 가야 한다고 심각해지는 폐시미스트도 있을 것이고 보면, 이런 저런 이유와 사정으로, 대합실은 늘 북새판에 돗때기를 깔아논 형국이었으니, "하이고. 이거 신수가 여전하십니다. 갈수록 젊어지시니 소관에게도 어디 세수를 거꾸로 자시는 비결이나 좀 들려주시겠습니까." 하면서 의자 틈새로 비집고 드는 송이었으나 이상히 여기는 사람은 없었다. 노인을 앞에 둔 송이, 연신 허리를 굽신거리며 너스레를 떨기 시작했다. 광대뼈에까지 웃음을 줄줄 매달은 그는 어느 모로 보나 사람좋게 보였다. 호탕하게 웃어제키던 송이, 갑자기 심각한 표정이 되어버렸다. 노인이 하는 말을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주먹을 불끈 쥐며 분개하는 표정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연극에 불과했다. 치밀하게 계산된, 인간사냥의 모의였음에도 노인은 그저 자신의 불우한 처지와, 그 불우한 처지를 보고도 방치만 하고 있는 주변에 대해 열심히 분개할 뿐이었다. 광장 한가운데 세워져 있는 '오늘의 날씨'판의 그림일기가 구름을 그려놓고 있었다. 어제도 저 모양이었고 그제도 저 모양이었다. 빗발이 들이쳤다. 바람이 불었다. 노변으로 냄비뚜껑이 날리고, 화덕이 지직거리더니 매연처럼 수증기가 풀풀 솟구쳤다. 멀찍이서 송 쪽을 훔쳐보고 있던 한국이, 역사의 난간을 따라 스적스적 걸었다. 화덕에서 피어오르는 김을 보는 순간 요기를 느꼈던 것이다. 한국이 막 화장실로 들어가려 할 때, 누군가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옷맵시가 정숙한 부인이었는데 그래서 그랬던지 귀티가 풍겼다. "미안시럽지만... 뒤를 볼랴는데 요 녀석 티티가... 잠깐이면 된게 잠깐만 봐 주시겠어요. 아저씨이." 그녀는 한국의 말은 들어보지도 않고 품에 안고 있던, 갈비뼈가 툭툭 튀어나온 누런 강아지를 휙 던져오는 게 아닌가. 한국이 엉겁결에 받아들고보니 기가 막혔다. 치마를 걷어올리며 화장실로 뛰어드는 그녀의 뒷모습이 그제서야 천박하다고 생각되었다. 어쨌거나 기다려보자고, 들이치는 빗발을 피해 벽 쪽으로 기대서려는데 어렵쇼 이건 또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17. 한국의 팔에 걸려있던 티티란 놈의 깡마른 강아지가 폴짝 뛰어내리더니 주인이 들어간 화장실 안으로 내빼는 거였다. 경황중에 일어난 일로 한국이 어찌할 바를 몰랐다. 강아지를 잡자니 여자화장실이었고, 모른 체 내버려두자니 그녀의 부탁이 맘에 걸렸다. 난감한 표정으로 머뭇거리던 한국이 뛰었다. 어찌 되었건 부탁은 부탁이니 붙잡고 보자는 생각이었다. 화장실로 뛰어든 전한국. 눈 먼 고양이 갈밭 헤매는 꼴로다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설쳐대는데, 해도 그렇지 여기가 어디란 말이냐. 부녀자들만 우굴거리는 여자화장실이렷다. 덩치만 컷지 쥐며느리 하나 잡는데도 몽둥이를 들고 설쳐야 하는 전한국이, 이거야 말로 미치고 환장할 노릇 아니겠는가. 더구나 티티란 놈 원래가 재빠르고 살살맞아서, 이쪽으로 튀면 저쪽으로 내닫고 앞쪽으로 몰면 옆으로 치닫기를 비호같이 한다. 걸로 뛰고 모로 거꾸러지는 전한국이 저야 자신물 뒤집어쓴 호박꽃이요, 삶아도 죽이 되도록 삶아터진 물감자이니 코가 깨지던 장바구에 피딱지가 엉기던 알 바 아니로되, 이를 지켜보는 숫보기, 되모시, 싸모님들 허옇게 질린 얼굴로 갈바람에 메밀꽃 넘어지듯 여름장마에 감자꽃 휩쓸리듯, 어허야 이 일을 어찌할거나. 치마를 걷어붙이고 서 있던 아낙이 풀먹은 옥양목 찢어지는 소리로 고래로래 악을 쓰신다. 스커트자락을 꼬이던 숙녀분이 눈알을 뒤집고는 고꾸라지신다. 엄마야! 아부지이...! 강도야! 도둑이야...! 오맛! 오빠아, 나 죽어! 외마디가 터지고 비명이 난무하는 화장실은 그야말로 수라장을 방불케했겠다. 그러거나 말거나 신명들릴 대로 신바람이 난 티티란 놈이었고, 식식거리며 돌아치는 전한국인데. 하 이놈 티티란 놈, 무슨 냄새가 그리도 향기롭던지 아예 코까지 벌름거리며 숙녀 싸모님들의 가랑이 사이를 누비신다. 그 뒤를 좇는 전한국 씨, 생각 같아선 저도 저분들의 미끈한 다리 사이를, 물 찬 재비처럼 빠져나가고도 싶다만은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비계살이 원수로고. 헐떡거리던 한국이 딱 멈춰섰다. 출구 쪽이었다. 새파랗게 젊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성년식이나 올렸을까. 맹랑한 년. 남들은 다 기겁을 하며 아랫도리 간수하기에 여념없는데, 이건 겁도없이 해죽해죽 웃고 있질 않은가. 한국을 당하자 어쩌자고 허리까지 꼬고 들었다. 광목값이 든다면 울매나 든다고 좀 질게나 해 입든지. 허벅지까지 눈길을 끌어올린 한국이 차마 더 이상은 기어오를 용기가 없던지 눈을 질끈 감았다. 18. "히 아저씨. 요놈이죠." 한국이 눈을 번쩍 떴다. 강아지보다도 무우 속살 같은, 그녀의 허벅지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한국이 입을 헤 벌리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손에 잡힐 듯 가까워졌다. 그가 막 강아지를 넘겨받으려는 찰나, 닿을 듯하던 그녀의 손길이 일순 까마득히 멀어졌다. 고개를 돌렸을 때, 강아지는 어느새 광장 한복판에서 깨갱거리고 있었다. "호호. 조기요, 조기. 까르르!" 한국이 펄쩍 뛰며 광장 한복판으로 치달았다. 빗줄기가 모가지에 걸리자 섬뜩했다. 예엠병. 오살할...년. 치마나 질게 혀 입든지. "호호. 불쌍눔으 자식! 짜샤, 할 짓이 없음 니 애미 거웃털이나 뽑아줘라. 수운 개눔으 새끼." 지켜보고 있던 여자들이 박수까지 치며 좋아서 어쩔줄 몰라했다. 물마에 돌담 허물어지듯 까르르 웃어젖히는 여자들의 웃음소리를 뒤로한 한국이 어느만큼 뛰었을까. 철주로 된 투시형 담장이 보였고, 기둥 전체가 패로 된 대문이 나왔고, 계단을 지났다. 더 이상은 도망갈 곳도 없었다. 한국이 이마를 훌치며 조막만한 강아지의 덜미를 움켜잡았을 때, 한국의 등줄기 역시 서늘하니 무엇엔가 끌어당겨지는 기분이었다. 줄줄 흘러내리는 빗물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아이쿠우. 이거야 어디. 아니! 그러고 보니...난 또 뉘시라고. 저번에 장닭, 맞어! 히야 이게 얼마만인가. 자자, 어쨌건 앉읍시다. 앉아요." 한국의 얼굴이 당장에 흙빛으로 변했다. 재수가 없을라면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지고 개죽을 쑤어도 망아지가 엎더라고, 이건 산 너머 산은 고사하고 신작로 건너니 북망(北邙) 아닌가. 하필이면 뛰어든다는 게 파출소라니. 파출소도 그냥 파출소가 아니라 단추구멍이 훤하게 열린, 이파리 세 개짜리 저 작자라니. 쥐망울만한 강아지도 도망갈 구멍이 없는 철창에 갇히고 보니 앞이 캄캄한 한국이었다. "그래, 이적지 어디 있었소. 동생 되시는 양반 조석으로 문안 옵디다. 소식은 있냐, 혹시 인신매매단에 끌려간 건 아니냐. 형제지간 우의가 각별합디다. 탄복했소. 대단해요. 그래 그 동안 어디 있었소." "히." 한국이 등신처럼 멀겋게 웃었다. 퍼뜩 떠오른 게 송이 하던 다짐이었다. 만에 하나 붙잡히는 경우를 당하더라도 멀건 등신처럼 그냥 히, 하고 웃기만 하란 말이다. 알겄냐. "히..." "허허 사람하군. 알었네 알었어. 사람이 살다보면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는 법이지. 어찌되었건 무사하니 다행이구만. 허잇. 사람하군." 이파리 세 개가 무궁화꽃처럼 피었다. 19. 태연스레 웃으며 수갑을 걸었다. 한국이 기겁을 했다. 손을 휘휘 뿌리며 뻗대었지만 그치의 수갑 채우는 요령은 능란했다. "오해는 말게. 다 자넬 위한 일이니. 내 이참에도 자넬 놓치면 자네 동생볼 면목이 없어져. 어지간히 무던헌 사람이여. 심덕 곱고. 오래 걸릴 일도 아니니 잠시만 참구 있으라구." 상국이 전화를 받은 건 은숙과 대판 말다툼을 벌이고 난 다음이었다. 목공일이란 게 다른 일과 틀려서 비만 왔다하면 손을 털어야 했다. 며칠째 빤할 틈도 없이 질척거리는 날씨였다. 하늘이 주관하시는 일이라 종없이 나댈 일도 아니었고 달리 가볼만한 데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허리병에 특효라는 알쥐나 구하러 나가볼까 하는 생각도 해봤지만 그것도 귀찮았다. 뒷갈망도 문제였다. 풀섶을 뒤지고 덤불을 헤매다보면 눈에 띌지도 모를 쥐새끼였지만 그놈을 소주에다 절여야 한다니. 4홉들이 소주 한 병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또 그것도 약이라고 혼자 쪼그리고 앉아 마셔대기가 두려워서가 아니라, 털도 안 난 새끼쥐를 통째로 삼켜야 한다고 생각하니 절로 소름이 끼쳤다. 약도 좋고 치병도 좋지만 차마 못할 짓이었다. 눈도 뜨지 못한 어린 것을 잡아 죽이는 것만도 그러한데 소주에 절인 빨구댕이 알쥐를 꿀꺽 해? 진저리를 치며 이불 속으로 기어드는 상국이었다. "당신 오늘도 낮잠이에요?" "낮잠이 아니라 쉬는 거라구. 이거야말로 누가 뭐라해도 내 탓이 아니라 하눈님 탓인 게로. 모르겠어 나도." 상국이 이불을 도르르 말더니 벽에다 머리를 쿡 박았다. 비 오기 시작한 날부터 내내 들어온 타박이요 타령이었으므로 어지간히 이골이 나 있을 법도 하건만, 지껄이는 은숙이나 듣는 상국이나 언제고 짜증부터 도졌다. 허구헌날 집에만 있으면? 쌀이 나와요 탄이 나와요! 일을 못함 품값이래도 받아와야 할 거 아녜요. 미선이 쟤 학원비만 해두 얼마가 밀렸는지나 알아요? 학원 간다구 하구선 학교 운동장으로 도는 애 생각을 한번이나 해 봤어요!" "뭣여! 근데 이 여자가... 우째 입만 벌리면 돈타령이여. 기다려 보라니께. 실내체육관에다 묻어둔 열흘치는 노동부에 꽈박어 놨고. 교회 일은 공구리 끝나는 대로 간주 봐준다 했응게. 뭔 수가 나것지." "허이구 순하기도 하셔. 개천에서 용 나기도 뭣한 판에 사골세 방에다 소 기르겠수." "그래두 요오... 우째 사람이 오늘만 믿고 사나. 내일도 있고 모레도 있는 거지. 소갈머리하군." 20. "흥! 그래요 당신이란 분, 속 넓구 품 크다는 거 진작에 알아뫼셨으니까 이 너른 살골세 방에다 소를 키우던지 돼지새끼를 먹이던지 맘대로 하시우. 이 속 좁은 여자야 훗장에 밍크코트보다는 요번장에 물 날린 홑치마 한장이 납디다." 도르르 말았던 이불을 화작작 걷어부치며 상국이 벌떡 일어났다. 무던히 참았던 속이었다. 성질 급하기로 말한다면야 우물에 가서 숭늉 찾는다는 말은 286짜리 구닥다리 개인용컴퓨터 나올 때나 하던 얘기였으니, 눈동자에선 벌써 불똥이 튀고 있었다. "그래서! 낸들 어쩌란 말여! 식칼이라도 들고 뛰어나가?! 니미랄 거." 주먹을 쥐고 있는 손이 부르르 떨렸다. 은숙이 훽 돌아앉으며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댔다. 치적거리는 빗소리가 가래처럼 끓어올랐다. "퇴에...!" 상국이 빗소리를 컥 받아내며 침을 튀겼다. 전부터 미덥지 못한 은숙이긴 했지만 요즘들어 부쩍 더했다. 그려. 그놈, 고가 그놈에게 부탁하는 게 아니었는데... 등신 겉은 자식. 아무래도 뒤를 잡힌 것 같어. 그만큼 조심혀라 했거늘... 고성만에게 아내의 뒷조사를 부탁하고 난 후, 나흘인가 지난 어느날이었었다. 잊은 건 아니었지만 고성만이 그작자, 별 얘기 없으면 아예 없던 걸로 하려던 상국이었다. 아내의 뒷조사란 게 어디 소설책이라면 재미있으라고나 한다지 이건 벌건 현실이잖은가. 물증이 있는 것도 아니요 서증(書證)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심증만 갖고 섣불리 덤빈 일이었다. 부탁을 받은 고성만 저 역시 잊어버린 듯한 눈치여서 한편으론 잘됐다 싶기도 했었다. 거지반 끝난 일판을 들여다 보면서, 구석으로 자재를 몰고 연장을 챙기고 하는데 어쩌자고 뒷짐이나 지고 설설거리는 고가 놈이었다. "미주알이라도 빠졌냐. 화장실은 저쪽이다." 상국이 불퉁그러진 목소리로 내받았다. 하지만 이작자 상국의 눈치만 슬슬 살피고 있었다. 홀가분해야 할 끝판이 싸아했다. "꼴에 조장이라고... 고가 니눔두 티 내냐. 가우다실 할ㄹ 아예 ㅇ어지는 게 신상에 좋을 기다. 이 으른신두 오늘은...마나님께서 기다리신다." 망태를 걸머질 때쯤해서야 놈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전 씨 내자되는 분. 이런 얘기하긴 시기상조인 줄 알지만... 조심혀야것어." "...?" "오해는 말어. 부부싸움 시키자고 이러는 건 아니니. 내 얘기는, 전 씨가 염려했던 의심이 전혀 기우가 아니라는... 좀 더 조사를 해봐야 알겠지만 그럴 가능성, 소지가 다분하다는 것이지. 그렇다고 지레 속단은 말어. 여자들 속이란 오늘 변하고 내일 변한 게." 21. 그러면서 작자는 덧붙이기를, '그럴 수도 있다'와 '그렇다'는 것은 전혀 다른 별개의 문제로, 모든 인간들이 살성(殺性)은 갖고 있지만 실제로 살인자는 아니라는 거였다. 모든 유기물이 탄화의 가능성은 있지만 발견되는 탄화물은 극히 일부분이 듯이 조금만 더 두고 기다려 보자고 했다. 그리곤 끝이었는데 그 후로도 마찬가지였다. 어찌되었느냐고 묻기라도 하면 되레 어색한 눈으로 그게 아니더라고만 했다. 무엇인가 숨기는 듯한 눈치였으나 무얼 숨기고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요즘 들어 부쩍 잦아진 아내의 짜증과 타박으로 미루어 그녀 쪽에서 놈의 계략을 사전에 눈치챈 건 아닌가 하는 불안이 앞서기도 했다. 만에 하나, 그게 사실이라면 큰일이었다. 그것은 부뚜막 고치겠다고 구둘장 뒤엎는 꼴일 것이고, 변명의 여지도 없는 이혼사유에 해당되는 것이다. 이래저래 심드렁한 판에 때아닌 늦장마까지 들이닥치고 있었다. 은숙의 강짜를 우격다짐으로 틀어막은 상국이긴 했으나 속이 편할 리 있겠는가. 그러잖아도 결리던 허리통이 송곳날처럼 쑤시고 들었다. 어금니를 으드득거리며 김석배한테나 가봐야겠다고 일어서려는데 전화였다. 파출소라고 했다. 죄 지은 놈마냥 가슴이 철렁했다. 당신이 찾던, 당신의 형을 찾았다 했다. 고맙다고는 했지만 전혀 고맙지가 않았다. 까맣게 잊고 있던 정강이의 칼자국을 욕탕에서 발견해 내고는 비누칠로 무던히 씻어낼 때처럼, 다시 찾아진 게 부끄럽고 창피스러울 뿐이었다. 상국이 으스스한 한기를 지우산으로 바쳐들고 찾아간 곳은 기차역 광장이었다. 파출소가 있었고 형님으로 깍듯이 올려받드는 경관이 있었다. 저물녁 퇴근길에 매일이다시피 들리던 곳이었다. 낯익은 건물에 알 만한 사람들이었건만 어쩐지 서먹서먹했고 들어서기가 어색했다. 하긴, 여기가 어딘가. 경찰서 아닌가, 포도청. 세월을 잘 만나 헛기침이라도 해보지 예전 겉으면 굽실거리기도 송구스러워 설설 기어들어와야 했을 것이다. 문지방을 넘기도 전에 육모방망이가 춤을 추었을 것이고 이런 저런 하소연이 웬 말이랴, 치도곤이 앞섰을 일이니. 그래, 국법이 주리로 틀리던 저 까마득한 왕조의 유물을 뒤적거릴 건 또 뭐 있나. 전제군주제하의 할아버지적 얘기가 아니더라도 당신과, 당신의 아들이 당한 수모와 서러움만 해도 섬으로 쌓아도 광으로 한가득일 것이니. 자연을 보호 해야 한다고 개구리와 물고기도 건드리지 말라던 시절에, 양서류나 파충류를 잡던 그 전기밧데리로 지짐을 당하던 기억을, 아마도 당신은 잊지 않았으리라. 22. 세상에 이런 천인공노할 일이 다 있나. 도살장의 소에게 물을 먹이다니. 요따위 악덕업자는 중형으로 다스려져야 마땅하다고 핏대를 세우던 바로 그때에도, 당신의 아들은,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디론가 끌려가 물을 먹고 있지 않았던가. 새삼스럽게 다 지나간 일을 뭣하러 들먹이냐고? 잊을 때가 되면 잊어야 하지 않느냐고. 과거의 상처에 연연해 하기보다는 용서하고 화합하여 힘과 뜻을 한데로 모을 때라고? 아니될 말이다. 망각이, 치유의 방편은 될지 몰라도 그 자체로 미덕이 될 수는 없다. 몇 백만 원짜리 물침대가 날개 돋힌 듯 팔리고 억대가 넘는 외제승용차가 세종로를 활보하는 세상이라고는 하지만 4월이면 여전히 보릿고개를 넘어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면 그 시간이 다 끝날 때까지 주린배를 틀어쥐고 훌쩍거리는 어린것들이 아직도 교정의 뒷그늘에 있다는 사실을, 더더욱 잊어서는 안 된다. 10년 전, 아니 단 1년 전의 어려운 때를 기억해내기만 했어도 이러한 비극이 방치되지는 않았을 지도 모른다. 새떼처럼 날아다니는, 당신 아들의 아들들에게, 당신과, 당신 아들이 겪었던 그 쓰라리고 고통받던 과거의 역사를 들려주는 것을 결코 두려워하거나 기피해서는 아니될 것이다.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위해서다. 아픔이 아픔으로 남아있을 때는 고통일 뿐이나, 그 아픔이 스스로의 인내와 용기를 시험하는 기회로 승화될 때에는 더없이 소중한 자기발전의 자산이 되는 것이다. 후손에게 자랑스러운 업적은, 그들이 당대에 누렸던 복락이 아니라 교훈인 것이다. 부끄럽고 수치스럽다는 것은 자기책임을 다 하지 못했을 때이지 암울하고 뒤처졌던 시대상황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전기찜질을 당하고 물고문을 받고, 또 어찌어찌한 시련을 겪고 했던 일련의 사건들은, 개별적인 것에서 이미 일반적인 것들로 넘어갔고, 결론적으로 한 시대의 역사의 상징으로 남게 된 것이다. 더 이상 추하거나 부끄러운 것들이 아니라 인고의 결정체로서, 고승의 사리처럼 그렇게 빛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것들을 후대에게 교훈으로 남겨주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며, 그것은 곧 새떼처럼 날으는 아이들에게 날지 못함에서 오는 길것들의 답답함과 저주를 볼 줄 아는 혜안, 다시말해서 새들에겐 하늘만이 아니라 지저분하고 더러운 이토도 있다는 것을 알리는 메시지인 것이다. 어느 왕조의 유물처럼 서 있는 파출소. 그 앞에서 한참을 머뭇거리던 상국이 지우산을 접고 있었다. 23. 이놈의 파출소... 그래, 어디 파출소문턱뿐이랴. 병원도 그렇고 관청도 그렇고... 문민정부가 아니라 서민정부가 들어앉는다 해도 여전히 높을 것이니. 파출소 정문부터 비를 맞고 들어가던 상국이 무슨 억하심정이 그렇게도 많던지 계단에다 대고 가래침을 컥,하고 울궈냈다. 노변의 마가목이 정문까지 달려와선 우수수 잎을 뿌렸다. 상국이 문을 열자 사무실 안이 한눈에 들어왔다. 전화를 걸어온 경관의 모습이 먼저 눈에 띄었다. 그는 곁에 있는 사람과 승강이를 벌이고 있었는데 상국의 발자국소리가 작아서 그랬던지 아는 척도 안했다. "이것 보세요. 말이나 되는 소릴 해야 믿지. 이거야 어디 생판 생떼도 아니고." 덩치 큰 경관이 그답지 않게 신경질을 부렸다. 곁에 있던 사내가 책상을 주먹으로 쾅 친다. 살풍경한 꼴이 당장 주먹다짐이라도 오갈 기세였다. "뭐요! 그럼 내가 ㅇ는 말을 지어서 한단 말입니까. 사람이 없어졌으면 찾아줄 생각은 않고, 뭐요? 생떼? 내 이거야... 민주경차알? 좋아하시네. 댁네 겉은 사람하군 긴 얘기하고 싶지도 않으니 파출소장이나 만나봅시다." "하안...나원. 차근차근 얘기나 들어봅시다. 사흘 전이라고 했소?" 경관이 엉덩이에 걸린 허리띠를 끌어올리며 사내를 쳐다본다. "몇 번씩이나 반복해야 믿겠소. 그렇다니까요. 오후 여섯시요 여섯시. 해두 들 넘어간 백주대낮이었단 말이오." 상국이 경관의 곁으로 가려다 말고 그 자리에 섰다. 한쪽 구석에 매달려 있는 한국이 보였다.고개를 푹 수그리는 한국을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수갑을 차고 있다니. 현행범이 아니고서야... 다시 한국을 넘겨다보던 상국이 고개를 갸웃했다. 수갑의 한짝은 한국의 팔에 채워져 있었고 나머지 한짝은 의자팔걸이에 묶여 있어서 운신에는 별 지장이 없는 듯 보였다. 상국이 의아하게 생각된 것은 한국도 한국이었지만, 그의 곁에 있는 강아지였다. 한주먹거리나 될까. 갈비뼈가 내보일 정도로 말라비틀어진 놈은 눈알만 뎅그러니 튀어나왔는데 번사에 초연한 듯, 마치 은자의 모습으로 눈을 지그시 감고는 꼴에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상국이 다시 고개를 늘였다. 목사리 치고는 좀 굵다 했는데 자세히 보니 개목사리가 아니라 한국의 팔에 채워진 것과 같은 은팔찌였다. 허고보면 저놈도 현행범? 어디 노상방뇨라도 했나보지. 24. 그나저나 한국이 저놈은 그사이 어디서 뭔 짓을 했길래 팔목에 은팔찌까지 끼고 나타났드란 말이냐. 조막만한 저놈의 강아지야 구류 3일이면 풀려나겠지만 도대체 전한국이 니눔은...? 한국의 곁으로 비척거리던 상국이 다시 멈칫했다. 사내와 경관의 목소리가 점점 거칠어지고 있었다. "선생의 말씀이 사실이라면 실종인 셈인데..." "답답하기는... 실종이 아니라 인신매매단의 소행이라는 데두. 납치범의 납치극이거나." 허옇게 얼어붙은 사내가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허리를 부여잡은 경관이 좀 전과는 달리 히죽 웃었다. "예이끼 여보슈. 인신매매? 크흐흐... 내 경찰물 이십 년에 환갑진갑 다 지낸 노인네 납치했다는 소린 귀창 뚫리고 첨이요. 좀 심한 말이 되겠지만 그래 낼모레면 구덩이 속에 묻힐 산송장을 누가 엇다 쓰겠다고 납치를 해요 납치를. 지금이 어떤 시댄지 알기나 하고 그런 말을 해요. 스물몇 살짜리 영계도 나이가 많다고 퇴박맞는 틴에이즈, 병아리 선호 시대란 말이오. 틴에이즈. 허고 실례지만 통장에 얼마 들어 있습니까. 예치금말이오." "한 이백..." 돈이란 말이 나오자 사내가 힘없이 수그러 들었다. "크흐흣! 안심하시오. 내 장담하리다. 그돈 이백을 어쩌겠다고 산송장을 납치할 놈은 없을 거요. 양로원에 가보시면 알겠지만 이백짜리 노인이 어디 있는 줄이나 아시오. 적어도 몇천 몇억이오. 세상이 이런데도 납치를 당해요? 선생이 하도 볶아치니 가출인 신고라도 했지 걱정 마시오. 설사 길을 잘못들어 엉뚱한 곳에 내렸다해도 지놈들이 추단하기 귀찮아서도 모셔다 줄거요. 선생의 효행에 감복은 합니다만 인신매매가 어쩌고 납치가 어쩌고, 크흐흐... 자자 이제 고만합시다. 기다리지 않아도 모셔다 줄 거요." "알겠소. 뭔 말뜻인지 알기는 알겠는데...어쟀건, 어쟀거나 꼭 찾아야 해요. 그분이 어찌 되면 당신들 내 가만 두지 않을 거요." 머쓱해진 사내가 뒤통수를 긁으며 문을 나서자 그제서야 경관이 상국을 보고는 아는 체를 했다. "어이구 이제보니 이거 아우님이 와계셨구먼. 앉자구 앉어." 경관의 눈길이 상국을 거쳐, 5일장에 잡혀온 장닭마냥 웅크리고 있는 한국에게로 넘어갔다. "자네가 그렇게도 찾아다니던 형이란 사람 분명하겠다? 틀림없는 장닭이니." "맞습니다만..." "아아, 난 또...수갑 말인가. 걱정 말게. 죄를 져서 그런 게 아니라 아우님에게 인계하기도 전에 튈지도 몰라 그런 것이니." 경찰관이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수갑을 풀었다. 25. 그제서야 상국이 안심이 된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물품수령증에 도장을 찍듯 서류에 지장을 찍은 상국이 부랴부랴 파출소 문을 나서고 있었다. 뒤따르는 한국의 발걸음이 어쩌자고 굼뜨기만 했다. 우산을 팽개치듯 휘두르던 상국이 소리를 꽥 질러댔다. 집에서부터 우글거리던 속이 기어이 뒤틀렸던 것이다. "뭣혀, 임마! 어디서 뭘 했는지는 나중에 따지기로 하고 얼릉 가자. 여길 뜨잔 말여!" "강아지 말여. 쥔이 있는디. 조오기." "알아서 찾아가겠지. 그 개새끼야말루 줘두 안갖겠드라. 보신탕두 못하는 뼉다구추리, 어뜬 눈깔병신이 개눈깔이나 박을라고 주어감 모를까." 두 달만에 만나는 한국이었다. 그것도 형이라고 만나보니 가슴 한구석이 싸아했다. 반갑기도 했고 무사했었다는 것이 고맙기도 했다. 그렇거나말거나 내색할 상국이 아니었다. 우선 이곳부터 뜨고 볼 일이라고, 상국이 한국의 모가지를 올려잡았다. 개 끌리듯 끌려가는 한국이 자꾸만 뒤를 쳐다본다. 대합실 쪽이었는데, 관리실 송도 그렇고 봉고차도 보이지 않았다. 파출소 안에선 이파리 세 개짜리 그 경찰관이 상부에서 내려온 전통을 받고 있었다. 긴급수배. 성명 박영돈 (일명 꽃돼지). 당 42세. 본적, 주소... 173정도의 키에 몸집이 좋고, 얼굴은 마름모꼴로 곱슬머리. 밤색 체크무늬 잠바. 흰 와이셔츠... 절도전과 3범. 인신매매... 볼펜을 내동이친 경관이 부리나케 밖으로 뛰었지만 상국의 일행은 보이지 않았다. 성글어진 빗발을 올려다보며 경관이 툴툴거렸다. "하안 눔의 사람. 장닭 가지고 그렇게 속을 썩이더니만 이젠 닭 대신 강아지새낀가. 차암 내원..." 한국의 멱살을 잡아쥔 상국이 어디론가 떠나가고, 밖에 나와 있던 경관까지 안으로 들어가자 그제서야 골목에 숨어 있던 봉고차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느만큼 갔을까. 한국이 상국의 팔을 틀었다. "이젠 딴 데루 갈 데두 없응께 이 팔이나 놓구가자 야. 챙피하구먼." "뭣여? 챙피? 챙피헌 줄은 알고 남 속썩는 줄은 몰랐다 이 말이냐. 도대체가 넌...그려 긴말할 거 ㅇ고, 암튼 가기나 가자. 어여 따라와!" 상국이 멱살을 풀었으나 대신 한국의 소매를 끌어잡았다. 간간이 지나가던 사람들이 우산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26. "이 질은 생다지 첨 겉은디...느들집 또 이사혔냐? 아무래도 질이 서툴다야." "일 ㅇ다. 이젠 형이고 나발이고 은숙이도 은숙이지만 우리집은 내가 반대다. 꼰대가 직접 쳐들어온대도 너 겉은 종자는 한마디로, 흥부네 제비가 물어다준 호박씨라해도 담장 밖이다. 사절이란 말여. 헌게 담부터래도 우리집 넘겨볼 생각일랑 아예 말어라." "하긴 그려야. 나두. 한국이 느들집 나올 때부터 엔간하믄 안들어 갈랴고 혔응게. 근데 시방...가는 건 가두 행처나 알구가자야." 상국이 눈을 허옇게 치떴다. 소경이 경을 읽어두 호리병부터 막아야 할 놈이 또박또박 대지르는 말대꾸하며 얼굴색하나 변하지 않는 게 아무래도 수상쩍었다. 이적지 어디 숨어서 뭔 지랄을 모의하다 왔길래 간덩이만 처부었단 말이냐. 딴에 믿는 데가 있긴 있는 모양인데 그렇거나 말거나, 마디마디 흐물거리던 경골(莖骨)이 용가래통뼈 될 일도 아니겠고 배꼽노리에서 놀던 놈이 하루아침에 달구경 가자고 지필묵 챙길 일은 더더욱 아닐 것이고 보면, 니눔이 아무리 날고 기어봐야 모노륨 위에 기어든 송장메뚜기보다 나을 것도 없을 것이니. 그래, 뭐를 믿고 천방지축인지 알고나 지내자고 상국이 혀를 질러 묻는데, "자알 생각했다. 그거야 말로 돌배 그자식 말마따나 바라던 바이고. 우리집하고 담 쌓고 발길 끊는 거야 앓던 이 빼고 금니 박는 격이니 듣던 중 반가운 소리로 나무랄 데 없다만 도대체 여적지 어디 백혀 있었냐. 글을 모르면 말이라도 있잖냐. 거긴 그래 전화두 ㅇ데? 좋아, 이 전상국이하고야 말이 형제지간이지 내집에 망아지고 옆집에 얌생인게 그렇다치고, 아부지가 있잖냐. 아부지가. 집에 가선 니가 형일지 몰라도 여기선 내가 아부지잽인게 어디 그 지간의 경우나 따져보자." "전화? 얀. 바빴어. 직장일이란 게 그렇드라." "뭐어...! 직장? 너 지금 똥구녕 얘기하는 거냐? 이게 증말 보자보자 하니까." "야는. 취직혔었다는데 직급받고." 한국이 자랑스럽게 가슴팍을 뒤졌다. 빠닥빠닥한 저금통이 잡혔고, 내보일까 했지만 멍멍이 앞에 똥일거라 그냥 히,하고 웃기만 했다. "돌았구나 돌았어. 알만허다. 원래가 못 먹고 허하면 대가리부터 요렇게 된게. 하구보면 아이큐 백짜리 아래는 돌지 않는다는 것두 말짱 그짓말이고. 젊은놈은 못 먹어서 오락가락 노인네는 나이를 너무 많이 먹어 오락가락...보기들 좋겠다." "근데 시방 어디루 가기는 가는 거여? 알구나 지내자 야." "어디긴 어디냐. 집이다 집! 니가 아부지 앞에 꿇어앉아 밥사발 앤기기 전엔 이 전상국이 지명에 못 죽을 거 같다. 내가 직접 바래다줘야 쓰것다." 27. "뭐여? 그럼... 이 질이 집이루 가는 거여?" "허다니까. 근데 너 좀 전에 직장이 어떻고 월급이 어떻고 그게 그렇다치고, 파출소엔 뭔 일이 있었냐. 설마 고년 어떻게 할라고 악심 품었든건 아니제?" "히...야는." 상국이 그의 형 한국을 데리고 찾아간 곳은 버스정류장이었다. 이 도시는 다른 도시와는 달리, 시내버스정류장과 시외버스정류장이 따로 떨어져 있질 않았다. 일컬어 공동주차장인 셈이었다. 어디 먼 데로 가는 사람이건, 근교 가까이 마실 가는 사람이건 모두 이곳으로 와야 했고, 자연 버스정류장은 사람들로 붐볐다. 그날이라고 그들 두 형제의 자리가 비었을 리 없었다. 상국이, 한 손으론 한국을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론 속호주머니를 뒤지면서 주차장 출입문을 머리로 들이받고 있었다. "됐다. 여기여. 너 여기 꼭 백혀 있어야 한다. 언눔이 와서 뭔 지랄을 해두 요기 이 전화통을 사수하란 말여. 알었지?" "니는...?" "표 끊어 놔야지. 시간도 알아보고. 휘딱 갔다올팅께 꼼짝 말란 말여. 알것냐." 한 걸음 건너 뒤를 확인하는 상국이 매표구까지 어지간히도 길었다. 그제서야 수갑까지 채워놨던 이파리 세 개의 예지가 무궁화꽃처럼 빛나보였다. 대기행렬의 한가운데서 순서를 기다리던 상국이 쫓기는 사람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버릇이었다. 법이 없어도 살아간다는 건 거짓일지 모르나 법을 모르고 살아온 상국이었다. 그런 면에선 한국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늘 누군가에게 쫓기는 듯한 심정으로 살아왔다. 한국과 다른 점이었다. 주위를 살펴가던 상국의 눈길이 한군데서 딱 멈추었다. 자벌레처럼 모가지를 길게 늘이고는 눈을 연신 깜빡였다. 그가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 곳은 직행버스 출구였다. 방금 빠져나간 그 작자, 그 작자가 분명...이제 상국의 앞으로는 단 한 사람만이 남았다. 누르실까지의 승차권을 떼는 데는 말 한마디면 될 것이다. 그런데도 그가 뛰었다. 신문 가판대를 가로질러 직행버스 출구까지 단숨에 내달은 상국이 벽에 바짝 붙어 서서는 문 밖을 엿보는 게 아닌가. 순간 상국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입을 딱 벌리고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연신 눈자위를 부벼댔다. 저놈이..., 저놈을 여기서 만나다니... 무슨 생각인가 골똘히 하던 상국이, 이내 돌아온 길로 뛰었다. 그가 표를 산 곳은 누르실이 아니었다.